국제연대위원회 칼럼(is) 2006-07-11   671

<아시아 생각> 신부 사오는 사회

결혼(結婚, marriage)이란 것은 지구 위의 짝짓기하는 어떤 다른 동물들도 가지고 있지 않은 인간 특유의 문화제도이다. 결혼이 단순히 각기 다른 개인이 누군가와 함께 생활하는 형태를 말하는 것만이 아닌 이상 그러할 것이다. 사람들이 결혼을 왜 하는지는 시대마다 또 문화마다 크고 작게 다른 배경과 까닭을 가지고 있다. 이십일세기 남한 사회에서 결혼은 따라서 이십일세기 남한의 정치, 경제, 사회적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문제일 것이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결혼하려는 이들은 누군가? 왜 결혼하려는 것일까? 그들 중 결혼을 ‘못하고’ 남겨지는 이들은 누굴까? 왜 이들의 결혼못함이 사회적 반향을 얻고 사회적 호소가 되어 급기야 범사회적인 ‘신부 수입’ 열풍이 일어나기까지 하는 것일까?

‘남들처럼’ ‘결혼 적령기’에 ‘여자’와 결혼해 집을 사고 차를 굴리고 안정된 정규직 직장을 다니며 6개월이 된 아들을 둔 한 삼십대 중반의 이성애 ‘남자’인 친구가 내게 들려준 이야기가 문득 떠오른다. 지금 나이가 될 때까지 혼자 사는 남자들은 결혼을 못한 ‘잔여물들’일 가능성이 많고 여자들은 오히려 능력있는 ‘독립인’들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이 여자들과 남자들은 서로 맞을 수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그는 말한다. 나는 그의 의견에 뜻을 함께 하고 안하고를 떠나서 한 번쯤은 생각해 볼 일이라 여겼다. 그는 이런 현상이 여자에게 가해지는 결혼에 대한 사회적 (주로 가까운 ‘가족’들에 의한) 압력보다 남자에게 가해지는 압력이 더 심하기 때문이라고 의견을 댔다. 결혼한 게 후회스럽다고 가끔 투정하는 그는 그러나 아내에게 잘 하고 아이양육에 열심히 참여하는 ‘좋은’ ‘남편’이자 ‘아빠’로 보인다. 그리고, 남한의 많은 남자들이 그러하듯 그도 결혼을 해서 잃은 것보다는 얻은 게 많은 것 같다. 그래서일까? 결혼도 ‘못한’ ‘못난 놈’이라 흉을 잡히거나 혹은 노후에 돌봐줄 이 하나 없이 냄새나는 뒷방 늙은이로 살다죽을까 걱정 듣는 남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남자들은, 심지어 남자 동성애자들까지도 우선 결혼은 하고 본다. 남성에게 실질적 보상 (사회적 성인으로서의 인정, 무급 가사노동력 충당, 성욕해소, 재생산, 사회관계용 에스코트서비스, 맞벌이인 경우에는 경제적 보상까지)이 실로 엄청난 결혼을 마다하는 것은 어쩌면 바보나 할 짓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남겨지는’ 남자들은 주로 소외층에 있다. 한편, 여자들은 당연히 이같이 엄청난 내용의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하게 되는 사회적 ‘거래’이므로 안정적인 ‘평생 직장’을 갖기 위해서 현명한 계산을 하게 된다. 국내의 결혼알선업과 고급 중매업의 성행이 이토록 장수하는 것은 결혼이 ‘제도’를 빙자한 ‘거래’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베트남 신부’를 ‘사오는’ 남자들은 국내에서 일어나는 결혼 거래에서 소외된 이들이다. 지역적으로나 계급적으로 혹은 두 가지 모두의 이유로 국내에서 신부를 거래해오지 못한 이들은 가난한 나라들의 값싼 노동력에 눈을 돌리는 다국적기업들마냥 베트남, 중국, 필리핀, 소련 등 할 수 있는 모든 선을 동원해 신부를 수입한다. 대체로 상대인 남한의 남자들보다 나이가 훨씬 어려 젊음이라는 권력을 누려봄직도 했을 이 신부의 거래조건은 여느 이주노동자들과 마찬가지다. 본국에 남은 가족들에게 얼마만이라도 생활비를 보내 줄 수 있는 것. 해외취업을 나가는 이주노동자들처럼 이들은 ‘평생직장’을 잡으러 한 두 번의 선을 뵈인 후 경쟁자들 중에서 ‘뽑혀’ 한국으로 ‘사들여져’온다. 한국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재수가 좋으면 본국에서의 자신의 집보다 좀 덜 가난한 ‘남편’의 집에서 하게 될 가사노동, 재생산노동, 남편에 대한 성적 서비스, 어느 경우에는 임금노동을 해서 집안을 되려 먹여 살리는 경우까지 다양한 ‘아내 노동’이다. 소통과 이해가 절대적으로 부재한 상태에서의 고립된 노동.

최근에 ‘베트남 신부 수입’에 대한 반인권적 내용의 광고들에 대한 한국의 인권단체들과 베트남 내부의 비판적인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해도 너무했기 때문이다. 신부를 거래하듯 사오는 것까지는 눈감을 수 있겠으나 너무 적나라하게 광고를 했기 때문이었을까? ‘절대 도망안감’같은? (사실 거래내용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고 거래를 맺은 이들이 결과가 기대했던 것과 다르게 나오면 당연히 따져서 재거래를 할 수 있거나 혹은 거래 자체를 파기하고 돌아설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인가? 늙은 여자인 노모의 가사노동과 감정노동에 의지해 살아가는 혼자 생활할 능력을 키우지 못한 ‘남겨진’ 남자들인가? 혹은 결혼제도 안에서의 성만 사회적으로 용인할 수 있는 성이라고 인정해주는 분위기인가? 아니면 결혼안한 혹은 못한 이들은 죽어서도 제삿밥을 얻어먹을 수 있는 ‘가족신’이 되지 못할 거라는 믿음, 세상에 태어나 제 핏줄하나는 만들어놓고 죽어야 한다는 핏줄계승주의 뭐 이런 것들인가? 결혼하지 않은 이들에게도 똑같은 사회경제적 혜택이 주어진다면, 결혼하지 않은 이들에게 아무런 비하나 호기심 혹은 동정의 시선이 쏟아지지 않는다면, 남자들이 어려서부터 스스로 생활을 챙길 수 있도록 교육받았더라면 굳이 가까이에서 나란히 생애를 함께 보내고 싶은 이들을 이렇게 ‘사와야’ 할 일이 생겼을까? 본국에 남은 ‘가족’들의 생계를 돕자고 ‘평생직장’을 찾아 이주해온 이 여자들도, 이국땅까지 건너가 신부를 ‘사 오게’ 된 이 남자들도 내게는 같은 맥락에서 보인다. 무엇이 나빴던가? ‘가족’관계가 될 여자들을 마치 강제노동을 하게 될 노예 대하듯 써 내린 적나라한 광고였던가? 허풍과 거짓약속으로 신부를 사온 (몇몇?) 남자들인가? 거래를 하고서도 약속한 기일을 채우지 않고 도망간 여자들인가? 아니면 강제적 이성애 ‘결혼제도’ 그 자체인가? 가난하고 소외받으며 사는 우리에게 따로 혹은 함께 살아갈 또 다른 방법들은 없는가?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 가능성들에 대한 상상과 실천을 방해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다시 질문의 소용돌이 속에서 머릿속이 얼얼해 온다.

박이은실(성공회대 노동대학 담임, 국제연대위원회 실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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