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연대위원회 미분류 2011-02-15   1382

무바라크 독재의 공범들이 민주 개혁을 주도한다?

무바라크 독재의 공범들이 민주 개혁을 주도한다?


이집트 민주화의 이상한 흐름



“우리가 무바라크를 이겼다. 우리가 민주화를 해냈다” 지난 1월 25일부터 카이로 타흐리르(자유) 광장에 모여들어 호스니 무바라크(83)의 퇴진을 요구하던 시민들이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이집트 민주화 시위가 벌어진지 18일만의 감격적인 승리였다.


1928년생인 무바라크는 1981년 대통령 직에 오른 뒤 30년을 집권했던 장기 독재자다. 태어날 때부터 대통령이라곤 무바라크밖에 모르는 이집트 젊은 세대들은 변화를 바랬던 것은 자연스런 정치적 욕구였다.


1970~80년대 한국 닮은 이집트


중동 취재 때 이집트를 돌아보며 30년 무바라크의 철권 독재가 낳은 정치적 무기력증이 온 나라를 덮고 있다는 느낌을 가졌다. 그리고 1970~80년대의 한국이 떠올랐다. 1970년대의 유신독재와 1980년대의 군부독재 시절, 한국의 대학교 정문엔 형사들이 진을 치고 드나드는 사람들을 검문하곤 했다. 언론도 자체 검열에 ‘알아서 기는’ 처참한 상황이었다. 말도 조심했다. 곳곳에 정보원들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21세기의 이집트가 그랬다.


카이로 국립대학의 교수를 만나려 대학정문을 들어서는데, 사복경찰이 막아서면서 “당국의 인터뷰 허가를 맡고 왔느냐?”고 물었다. 이집트 최대 야권 조직인 무슬림형제단에서 여는 집회에 참석하려 한 모스크에 갔더니, 사복형사들이 막아섰다. 그들의 험악한 얼굴에서 지난날 서울 명동성당에서 민주화 요구 모임들이 열렸을 때 그 앞에 진 치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겹쳐졌다.


카이로 곳곳에 사복경찰이나 보안요원들이 감시의 눈길을 번뜩이고, 지식인들이나 거리의 민초들이나 모두 몸을 사리는 모습이었다. 카이로를 떠나면서 이런 생각을 했었다. “다른 곳에 시민혁명이 일어나면 몰라도 이집트만은 어렵겠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틀렸다는 것이 올해 초에 드러났다. 시민혁명의 꽃이 이집트에서도 피어났다.



군부는 무바라크의 공범자였는데…


30년 철권통치를 휘두르던 독재자 무바라크는 이집트령 홍해 휴양도시인 샤름 엘셰이크로 몸을 피했고, 통치권은 이집트 군사최고회의에 넘어갔다. 바로 엊그제까지만 해도 무바라크의 충실한 부하였던 오마르 술레이만 부통령은 11일 저녁 “무바라크 대통령이 이날 사임하고 이집트 군이 통치권을 가지게 됐다”고 공식 발표했다. 군 최고위원회 대변인은 “(군부가) 민주적인 권력 이양 과정을 관장하고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에 권력을 넘기겠다”이라는 성명도 내놓았다.


그렇다면 이집트 민주화는 제대로 이뤄지는 것인가? 무라바크 퇴진으로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인가? 무바라크와 손을 잡았던 공범자들은 어찌 되는 것인가? 무바라크 독재의 물리적 기반이었던 군부는 민주화의 숙정 대상에서 빠지는 것인가? 지난 30년 동안 이집트에 15억 달러의 무상원조를 건네주면서 무라바크 독재 체제와 손을 잡고 중동 정치 환경을 이스라엘 안보에 유리하도록 이끌어왔던 미국에겐 아무 문제가 없는가? 의문부호는 꼬리를 문다.



나세르와 무바라크-술레이만의 차이


극소수이긴 하지만 일부 이집트 사람들은 무바라크의 권력을 잡은 군부가 양심적으로 이집트를 끌어가줄 것이라는 희망을 품는다. 그들에겐 그럴만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1952년 가말 압둘 나세르(1918~1970)를 중심으로 한 청년장교들이 부패하고 무능한 이집트 파루크 왕조를 뒤엎고, 그때까지 영국을 중심으로 한 외세와 그 외세에 기생하던 부패왕조 아래 정치적 무기력증에 걸려있던 이집트를 바꾸었다. 그때껏 영국과 프랑스의 관할 아래 놓여 있던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 조치(1956년)로 접수한 것은 아랍 민족주의의 대표적인 사건이다.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이집트는 미국-이스라엘과 불편한 관계 속에 지냈다. 나세르는 옛 소련으로부터 정치·군사적 지원을 받아 미국·이스라엘에 맞섰다. 그러나 나세르가 죽고 난 뒤로 이집트는 바뀌기 시작했다. 무바라크의 전임자였던 안와르 사다트는 미국의 중재 아래 이스라엘과 평화협정(1979년)을 맺어 외교관계를 텄다. 그 대가로 이집트는 해마다 15억 달러(이 가운데 군사원조는 13억)를 미국으로부터 받아 챙겼다.


많은 이슬람 민중들의 눈에 그 평화협정은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있던 시오니스트들과의 더러운 거래’로 비쳐졌다. 그때껏 ‘나세르의 이집트’를 떠올리며 대이스라엘 항쟁의 맹주로 이집트를 대접해왔던 중동국가들도 경멸의 눈빛을 던졌다. 아랍세계의 분노를 샀던 바로 그 일로 사다트는 1981년 무슬림형제단의 한 과격 분파에게 암살당했고, 그 빈자리를 무바라크가 이어받아 30년의 부귀영화를 누렸다.


공군사령관, 국방차관, 부통령을 지낸 무바라크의 대외정책은 사다트와 마찬가지로 친미-친이스라엘로 요약된다. 현지 취재를 통해서도 확인했지만, 이집트인들의 대미감정을 좋을 리 없고, 특히 대이스라엘 감정은 최악이다. 무바라크의 30년 독재에 진저리를 쳤던 이집트 사람들은 1952년 혁명처럼 이번 시민혁명으로 그동안 잊었던 아랍인으로서의 자존심을 회복하고 싶다는 꿈을 지녔다. 그러나 곧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하기 마련이다. 무엇보다 군부의 체질이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나세르의 지도력을 따르던 1950~60년대의 이집트 군부와 무바라크 30년 독재체제에 기생하던 이집트 군부는 너무나 다른 체질을 지녔다. 나세르의 군부가 아랍 민족주의의 바람을 일으키고 사회주의적 개혁을 실천해나갔던 혁명의 주체 세력이었다면, 지금의 포스트-무바라크 군부는 각종 이권으로 배를 불려온 21세기의 반혁명·반개혁 세력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이들은 이집트 민중의 민주화 열기에 놀라 잠시 주춤하고 있을 뿐 무바라크와의 공범으로서 지금껏 누려왔던 기득권을 내놓을 마음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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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자였던 미국의 속앓이


이번 이집트 시민혁명의 과정에서 미국은 어정쩡한 태도를 보여 왔다. 겉으론 이집트 민주화를 말하면서도 친미-친이스라엘 무바라크 체제의 붕괴를 반길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번 민주화 요구 시위 과정에서 오바마는 “무바라크 대통령을 즉각 물러나게 할 것인지는 우리가 개입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미국의 초당적 자유인권단체인 프리덤하우스의 사무총장 데이비드 크레이머가 “미국은 쫓겨나는 독재자들을 지지한다는 인상을 남긴다”고 한탄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집트 민중들은 그런 미국의 이중적 태도에 분노했다. 무바라크에 대해 아랍 민중들이 분노했던 것은 미국의 중동정책의 핵심인 친이스라엘 일방주의에 무바라크가 협조적이었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무바라크 독재 체제를 떠받쳐온 기둥이자 공범이다. 미국이 중동 민주화를 말해왔지만, 그 민주화론의 창끝이 겨누는 곳은 이란과 시리아 등 반미 성향의 국가들이지 무바라크의 이집트는 아니었다.


워싱턴과 텔아비브의 지도자들의 시각에선 좋든 싫든 이집트 군부의 겉치레 민주화 개혁 조치 속에 기존의 중동정책(이스라엘 안보와 석유의 안정적인 수급)이 그대로 이어지는 구도가 바람직하다고 여길 것이다. 그들의 입장을 정리하면 이렇다. “무바라크 체제가 우리에겐 좋았지만, 그가 어쩔 수 없이 물러난 자리를 (무슬림형제단과 같은 반미-반이스라엘 성향의 과격 정치조직들이 아니라) 구체제 인사들로 채워 기존 중동질서를 지켜낸다”



시민혁명은 이제부터다


이집트 민주화의 앞길엔 아직 많은 과제들이 남았다. 무바라크 독재 헌법을 폐기하고 선거법을 포함한 민주적 헌법 개정은 언제 이뤄질 것인가? 오는 9월로 예정됐던 이집트 대통령 선거는 예정대로 치르게 될 것인가? ‘무바라크 독재의 고무도장’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던 지금의 의회를 해산하고, 부정선거라는 의혹을 받았던 의회 선거를 다시 치를 것인가? 이 모든 과정에서 현실적인 영향력과 돈줄을 쥔 패권국가 미국이 이집트의 군부와 어떤 주고받기 관계를 맺을지가 관심거리다.


혁명은 민중의 피가 뿌려진 토양 위에서 자란다고 한다. 2011년 2월의 이집트 시민혁명으로 적어도 300명, 많게는 900명이 피를 흘리고 죽었다. 앞으로 이집트 군부의 기만적인 민주화 조치가 이집트 민중들을 실망시키고, 이집트 민주화보다는 중동 석유 이권과 이스라엘 안보를 챙기는 미국의 중동정책에 대한 이집트 사람들의 인식이 더욱 분명해진다면,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에선 더 많은 피가 흐를 것이다.


이제는 고전이 된 <혁명의 해부>(1965년)란 책에서 크레인 브린튼은 혁명이 (혁명 세력의 의도와는 달리) 단기적으로는 전보다 못한 부정적인 결과를 낼 수 있고, 혁명의 긍정적 성과는 긴 시간이 흐른 뒤에야 나타날 수도 있다고 봤다. 브린튼의 이런 해석은 이집트 민주화를 위한 시민혁명의 경우에도 들어맞을 것 같다. 신해혁명(1911), 볼셰비키혁명(1917), 이란 이슬람혁명(1979) 등 20세기를 흔들었던 혁명들이 단 한 번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었듯이, 이집트 시민혁명도 이제부터다.
 


김재명 프레시안 기획위원. 국제분쟁 전문기자. 성공회대 겸임교수
 


* 이 글은 프레시안 칼럼(2011.02.14 )란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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