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감시센터 사법감시紙 2002-05-07   1735

[16호] 약자를 위하는 사법부

대학 신입생 때의 일이다. 1학년 때는 교양과목 중심으로 수강을 해야했던 터라 서양사개론을 신청하여 듣고 있었다. 그 과목은 어느 젊은 강사분이 맡고 있었는데, 특히 법대 신입생들이 수강학생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강사분의 '법관(法觀)'은 우리 법대 수강생들을 자못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이었다.

강의가 소크라테스와 악법 등에 관한 설명으로 이어졌을 때라고 기억하는데, 그분은 법은 '강자의 이익'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 법은 사회적·경제적 강자가 그들의 이익을 구체화하여 사회적·경제적 약자들에게 그 준수를 강요하는 '강자들만의 이익'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강의실 곳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법대 수강생들의 웅얼거림이었다. '사회정의의 실현', '약자의 보호'와 같은 거창한 명제를 법대 입학의 이유로 대며 의기양양하게 갓 입학한 우리들에게, '법'이 '강자의 이익'이라니? 그러면 우리가 앞으로 배우게 될 '법'은 약자들의 가슴에 겨누어지는 강자들의 칼이며, 우리가 되고자 꿈꾸는 법률가는 강자들에게 고용되어, 약자에 대한 착취를 법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강자들의 넒은 곳간에 곡식이 쌓이게 하는 그런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인가?

그 후에도 그 강사분의 법관(法觀)은 강의시간 중에 몇 번 더 강조되었고, 그 때마다 그 말씀에 대한 내적 거부반응과 부정은 필자의 마음 속에서 계속되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법이 '강자의 이익'일 수도 있다는 찜찜한 우려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게 되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로크나 몽테스키외 등에 의해 권력분립이 강조된 근세이후, 몇몇 사회주의·공산주의국가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들은 권력분립의 원리에 기초한 삼권분립을 그들의 헌법에 받아들이고 있다. 이때 이 '삼권(三權)'은 '삼부(三府)'에 분장되는 권력을 의미하며 이 '삼부'에는 국민의 선거로 뽑힌 국민의 대표들이 법을 만드는 입법부, 국민의 선거로 뽑힌 국민의 대표가 그 최상층부를 구성하면서 입법부가 만든 법을 집행하는 행정부, 국민의 선거로 뽑히지 않고 보통 일정자격을 갖춘 이들이 임명되어 입법부가 만든 법의 의미를 해석하고 구체적 사실관계에 적용하는 사법부가 속한다.

이 삼부는 그 조직과 구성, 권한 등에 걸쳐 여러 차이점들을 가지지만, 입법부, 행정부 – 비록 행정부는 그 최상층부만 선거로 뽑히지만 – 와 달리 사법부는 일반적으로 말해 선거와 무관하게 임명된 판사들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이러한 차이점에 크게 주목하면서, 미국 등의 정치학계나 헌법학계에서는 국민의 선거 등을 통한 국민의 의사에 그 구성과 존립이 달려있는 입법부와 행정부를 '다수파기관(majoritarian institution)', 국민의 의사와는 직접적인 상관 없이 구성되고 존속하는 사법부를 '비다수파기관(non-majoritarian institution)'이라 구별하고 있다.

사법부는 바로 이 '비다수파기관'이기 때문에 '사회적·경제적 약자의 보호'에 진력할 수 있다. 다수파기관인 입법부나 행정부는 다음 선거에서도 뽑히기 위해 다수 국민의 의사에 항상 주목하고 이에 신경을 써야한다. 그러나 삼부 중 유일하게 비다수파기관인 사법부는 국민 다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보다는, 다수의 목소리에 묻혀 – 혹은 다수를 가장한 사회적·경제적 강자의 큰 목소리에 눌려 – 듣기 어려운 사회적·경제적 소수자와 약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이들의 이익을 법의 적극적·창조적 해석과 적용을 통해 실현하고 보장할 수 있는 태생적 장점을 가지는 것이다.

입법부와 행정부가 다수 국민의 의사를 국정운영에 반영하기 위해 존재하는 '다수'를 위한 기구라면 삼부 중 다른 하나 정도는 '소수와 약자'를 위한 기구가 되어야, '다수의 지배'와 함께 '소수의 보호'를 그 구성요소로 하고 있는 민주주의의 이념에도 더 합치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이런 의미에서 사법부를 – 무시되기 쉬운 사회적, 경제적 약자의 자유와 권리를 포함한 의미에서 – '국민의 자유와 권리의 보장을 위한 최후의 보루'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회적·경제적 약자는 통상적인 '정치 과정(political process)'을 통해서는 그들의 이익을 잘 결집하고 대표하여 이 과정에 반영하지 못한다.

즉 다수파가 주도권을 쥔 다수파기관에서의 의사결정과정에서는 약자들의 이익이 잘 대변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약자의 이익은 바로 비다수파기관인 사법부에 의해서 가장 잘 대변되고 보장받을 수 있으며 또한 보장받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지난 한해 우리의 사법부를 뒤돌아보자. 우리 사법부는 대법원을 정점으로 한 일반법원과 헌법재판소의 두 축으로 이루어진 이원적 사법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중 헌법재판소는 옥상옥에 불과한 불필요한 기구라는 탄생시의 우려를 불식시키며, 꽤 많은 약자를 위한 판결들을 내려왔다고 평가하고 싶다. 작년 11월 29일에 내려진 [재외동포의출입국과법적지위에관한법률] 제2조 2호에 대한 결정은, 정부수립 이전에 국외로 이주한 동포를 '재외동포'의 범주에서 제외한 법규정에 대해 헌법불합치결정을 내림으로써, 동포로 대우받지 못하고 외국인으로 인식되던 '정부수립 이전의 국외이주 동포'의 이익을 잘 대변한 약자를 위한 판결이었다고 생각한다.

일반법원의 경우에도 과거와는 달리 약자를 위한 판결들을 속속 내리고 있다. 특히 이러한 경향은 몇 년 전의 법개정을 통해 들어온 판사에 의한 영장실질심사에서 뚜렷하다고 본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나 일반법원이 약자보다는 사회적·경제적 강자의 편에 선 판결을 내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특히 우리 헌법이 재산권 행사의 공공복리적합의무를 규정한다든지 혹은 사회적 시장경제질서를 규정함으로써 개인 재산권의 사회전체를 위한 한계와 제한을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도외시하고 민사법적인 논리에만 얽매여 재산권의 보장만을 강조하는 보수적 판결들은, 분명 필자의 눈에는 강자의 기득권을 옹호하기 위한 판결들로 비춰진다.

결론적으로, 사회적·경제적 약자를 위한 판결들을 좀더 많이 내달라고 우리 법원이나 헌법재판소에 부탁하고 싶다. 그것이 다수파기관인 입법부나 행정부와 달리 비다수파기관인 사법부만이 할 수 있고 또 해야할 바이며, 개인적으로는 '법은 강자의 이익일 수 있다'는 필자의 오랜 기간의 찜찜한 우려를 과감히 떨쳐 버릴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임지봉 | 건국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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