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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법감시紙
  • 1995.12.11
  • 1254
지난 해 10월 6일 나는 소위 '북한 장학금 교수' 사건으로 국가안전기획부에 연행되어 이틀간의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1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많은 정신적 고통을 겪어 왔다.

언론, 그 거대한 공룡과의 싸움

우선 국가안전기획부가 확실한 증거도 없이, 긴급 구속을 집행한 것, 밤 11시에 6∼7명의 수사관이 불쑥 들이닥쳐, 수색영장이나 구속영장도 없이, 30분간 집을 수색한 것 등은 민주주의가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 사회라면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었다. 이 국가에 세금을 납부하며 살아가는 한국민으로서, 국가가 이렇게까지하여 자신의 체제를 유지해야 되나를 생각하면 나는 서글픈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그러나 안전기획부에 못지않게 나를 분노케 한 것은 언론의 태도였다. '북한 장학금을 받은 교수'가 있다는 오보를 5대 일간지가 1면 내지 사회면 톱기사로, 3개 방송사가 8.9시 뉴스에서 다루었으나, 이에 대한 정정보도는 다루지 않았다. 두 개의 신문을 제외한 대다수의 매체가 국가안전기획부의 보도자료를 그대로 받아서, '혐의 교수들은 일단 귀가 조치를 하였다'는 보도만을 내보냈다. 분노한 나는 주변의 여러 사람들과 상의를 해보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언론의 횡포를개탄하면서도, 그 거대한 공룡과의 싸움은 자제하라는 충고를 하였다.

이런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론과의 고독한 싸움을 시작하였다. 우선 나는 언론중재위원회에 중재신청을 내었다. 개인적인 통로를 통해 정정을 요구할 때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던 언론들은 내가 변호사와 함께 언론중재위원회에 나타나자 태도를 바꾸기 시작하였다. 어쨌든 처음 보도된 기사의 크기에훨씬 못 미치는 것이었으나, 대다수의 신문들은 정정보도를 내보내었다. 나는 정정을 거부하는 한국방송공사와 서울방송을 상대로 정정보도청구권 재판을 시작하였다. 1심에서 내가 승소하자, 두 방송은 판결에 따라 뉴스 첫머리에 정정보도를 내보내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내가 겪었던 시달림을 일일이 다 설명하려면 지면이 모자랄 정도이다. 어쨌든 이 사건은 방송이 국가보안법 관계 기사에 대해 정정보도를 내보낸 거의 최초의 사건인 듯하다. 그후 한국방송공사는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를 제기하였으나 기각되자, 다시 대법원에 상고하여, 현재 이 사건은 대법원에 계류중이다.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항소심부터는 소송 대리인의 도움 없이 이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정정보도 청구 따로, 손해배상 소송 따로

1년간의 이런 경험들로 나는 많이 똑똑(?)해졌다. 다시 말하면 이는 그저 평범하게,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한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인권을 침해당하고, 그 과정에서 법이 서민들을 보호하기에 얼마나 무력한가를 깨닫고, 그리고 법적 관행에 분노하면서 자신의 권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여기에서 내가 느낀 사법제도나 그 관행의 문제점을 몇 가지 지적하고 싶다.

첫째로, 정정보도청구권 재판의 경우, 피해자가 승소할 경우에 언론사측이 재판비용을 전적으로 부담하는 제도가 정착되어야 한다. 나의 경우는 언론중재위원회에 중재신청을 내면서부터 소송대리인의 도움을 받았다. 직접 언론중재위원회에 참석하면서 여러 전문지식을 요하는 이 과정을 혼자서 감당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나는 확인하였다. 그러나 소송 대리인을 선임할 경우 비용문제가 생긴다. 물론 1심에 승소하자, 재판부는 언론사에 재판비용을 부담하라는 판결을 내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돌려 받을 수 있는 소송비용은 실제로 든 변호사 비용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대다수의 피해자들은 재판비용을 찾기 위해 '명예훼손에 대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다시 제기할 수밖에 없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그러나 손해배상청구소송은 정정보도청구권 재판보다는 기간도 오래 걸리고 재판도 까다로워서 피해자들은 망설이게 된다.

시간과의 싸움을 하는 직업을 가진 나 역시 시간 문제가 손해배상청구소송을 포기한 여러 이유 중의 하나이다. 그러기에 언론중재위원회에서부터 변호사 비용이나 중재신청에 든 실질적 비용을 언론사측이 부담하는 제도가 정착되어야 한다. 바로 이러한 제도의 개선이 사법부, 언론사 그리고 피해자 모두가 쓸모 없는 힘의 낭비를 줄이고 재판에 드는 엄청난 변호사비용 때문에 서민이 법의 정의로부터 소외되는 현실을 막는 길이다. 나의 경우에는 '민주주의를 위한 변호사회'덕택에 소송비용의 많은 부분을 경감할 수 있어서, 고마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법률보험의 필요성

천문학적 소송비용과 관련하여 또 한가지 제안하고 싶은 것은 법률 보험의 도입이다. 사회보장제도가 발달한 독일의 경우, 대다수의 중산층 가정들은 법률보험에 가입하고 있다. 개인의 세세한 사생활 침해에 대한 법적 보호 장치가 발달한 나라인 탓인지, 소송비용 자체를 보험이 부담해주는 제도가 잘 발달하였다. 개인에 못지않게 학교나 각 단체들도 거의 이런 법률보험에 가입하고 있다. 흥미 있는 사실을 한가지 소개하자. 최근 독일에서는 10여년이 넘게 여전히 학위를 못 끝내고 있는 외국인 학생들에게 독일 정부가 체류허가를 내주지 않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내가 아는 한국학생중에도 이 때문에 2-3천 만원씩 드는 재판을 몇 년째 하고 있는데, 학생회가 법률보험을 들고 있는 까닭에 이비용을 보험회사가 지급하고 있다. 이 제도가 없었다면 가난한 제3세계 학생들은 꼼짝없이 추방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둘째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사법계에서의 여러 관행들이 좀 더 민주적으로 진행되었으며 하는 바램이다. 재판 과정에서 법관들 고압적인 분위기도 서민들을 질리게 하려니와, 소송 대리인과의 관계 역시도 좀 더 민주화되었으면 좋겠다. 기존의 판례나 법률 관행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해주는 변호사가 몇 명이나 될 것이며, 실제로 재판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의뢰인의 의사가 제대로 반영되기도 어렵다. '전문가'라는 특권 아래 의뢰인의 희망사항은 아예 도외시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우리가 지향하는 민주주의가 형식적인 것을 넘어서서 실질적인 민주화로 가는 긴 과정이라면, 이런 일상생활에서의 민주화 역시도 우리가 점점 관심을 넓혀가야 할 영역이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교육과정에서 법률에 대한 실질적 지식의 전달이 가능해져야 한다는 당위성을 뼈저리게 느꼈다. 안전기획부로의 연행 과정에서부터 법률 지식의 부재로 인해, 나는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마른 하늘에서 날벼락을 맞는'이었다. 우리의 교육과정이 법률 그 자체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은 주지 못하더라도, 법률 지식에 도달할 수 있는 구체적인 통로를 가르쳐 주었어야 하였다. 또한 사법부는 서민이 쉽게 법조문이나 판례에 도달할 수 있도록 다양한 간행물이나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하나, 현실은 그렇지를 못하였다. 나도 판례 수집과 관련하여 컴퓨터 데이타를 뒤져보았으나, 그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이미 언급한 이런 저런 관행들이 개선되어야, '법의 정의'라는 것이 서민들에게 비로소 현실감을 갖게 될 것이다.

정현백 l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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