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감시센터 사법감시紙 2000-10-01   1731

[15호] 시민이 본 형사재판

이 글은 형사실무연구회가 주최한 강연회에서 박원순 변호사가 발표한 내용을 발췌한 것입니다.(지면상 존칭은 생략합니다.)

나는 지난 1991년 8월부터 1년간 영국에 머물면서 바라본 법정에서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변호사들이 법정을 드나들 때 90도 각도로 깍듯이 절을 하는 것이었다. 물론 우리도 법정에 드나들면서 인사는 하지만, 그들처럼 깍듯한 마음은 없는 것 같다. 변호사가 판사에게 항의하다 그 자리에서 구속되었다는 보도도 있었고, 300년 만에 부부강간을 인정, 아내를 폭행·강간한 남편에게 징역7년을 선고하는 기사도 보았다.

사정은 미국도 비슷한 것 같다. 1993년 12월 20일자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뉴욕주 판사가 홈리스(Homeless)를 위한 구호소에 대해 수 차례 시정명령을 내렸는데도 이를 듣지 않자, 그 구호소 관리위원회 위원장인 뉴욕시장을 그 해 12월 25일 하루동안 그 구호소에 감금한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구호소 관리를 못했다해도 어떻게 부시장을 감금할 수 있을까….

하지만, '참 멋진 판결'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법정모독죄(contempt of court)를 발동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런 법률이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 판사들 가운데 이런 판결을 할 수 있을까, 정말 언제까지 이런 판결을 부러워하고만 있어야 할까'라는 착잡한 생각이 들었다. 불행하지만 그 동안 우리 사법부의 굴절된 역사 때문에 국민들의 시각을 고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려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아직 사법부가 형사사법의 정의를 충분히 실현하고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사법정의는 있는가

다음 세 가지 인용문은 일반도서와 내가 받은 편지 중에서 정리한 것이다. 다소 거친 표현이 있지만, 이들은 자신이 당한 사건을 통해 우리나라에 사법정의가 있느냐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특히 마지막 글은 강원도의 한 촌부가 당시 사법감시센터 소장, 이화여대 박은정 교수에게 보낸 것인데, 그는 '왜 판사를 이렇게 교육시켰냐'며 법대 교수들을 질책하고 있다.

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된다면, 법이 강자와 가진 자의 보호막으로 존재한다면, 힘없는 자, 못 가진 자가 수사과정에서부터 재판과정을 통해 정당한 법익을 보호받지 못한다면, 그런 사회는 민주사회라고 부르기 힘들 것이다…(중략) 실정법 상 필자는 완벽하게 죄인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필자가 무죄라는 것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며 필자를 고소한 사기꾼이 더 잘 알고 있다. 내 양심을 걸고 나는 무죄라고 증언한다. 아무리 소리치며 나는 죄인이 아니라 해도 무력해질 때, 필자는 법정에서 혀를 물고 죽어버리려 한 적도 있었다. 실형을 선고받고는 유서를 써두고 죽음으로써 내 결백을 입증하려고도 했다(김성래, 목숨을 건 재판, 새세상출판사, 1997).

② 낮과 밤, 맑은 날과 흐린 날, 비 오는 날과 눈보라치는 날, 시간은 그렇게 창밖에서만 흐르고 이 차가운 감방 안에서는 모든 것이 정지된 느낌이다. 진실과 정의는 존재하는 것일까? 과연 나는 이 차가운 감방에 갇혀 지내야 할 만큼 큰 죄를 지은 것일까? (중략) 나는 지금 나를 망가뜨린 권력형 범죄 앞에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맞서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감방만큼이나 차가운 마음으로, 진실된 고백으로 이 글을 쓰려 한다(석성열, 누가 죄인인가!, 소백출판사, 1997).

③ 나는 강원도에 사는 보잘것없는 촌부로서 소위 법치국가, 민주국가라는 이 나라에서 저 악명 높은 공산치하의 인민재판보다 더 혹독한 재판을 받고, 엄청난 고통과 피해를 입었음에도 아직도 그런 폭력적인 불법판결이 시정되지 않음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런 사람들을 교육시켜 온 이 나라 법과대학교수들께 엄중한 항의를 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에 이르렀습니다. (중략) 길거리를 걷는 사람들에게 소위 법조인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 물어보시오. 민중의 입이 모이면 쇠를 녹이고 그 비난이 쌓이면 산을 무너뜨린다 하였습니다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초도1리 장홍근의 진정서).

억울한 사람들의 천국

나는 인권사건을 많이 다뤄 봤지만 시민단체에 와보니까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사법피해자'들이 너무 많아 대한민국은 '억울한 사람들의 천국'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그중에는 판사들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법률을 오해했거나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쉽게 승복하지 않는 우리 국민성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문제는 그 사람들이 억울하다고 느끼는 데 있다.

'왜 우리의 재판은 국민을 설득하지 못하는가'하는 점은 판사들이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더구나 사법피해자뿐만 아니라, 일반국민들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데 더 큰 문제가 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이런 사법불신을 상징적으로 드러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국민의 인식이 무조건 잘못된 것이라고 반박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물론 판사들만이 아니라 검사들이나 변호사들의 잘못도 많다. 하지만 일반 국민들은 법조인들을 사실 잘 구별하지 못한다. 어느 누가 잘못해도 모두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국민들은 검찰이 정치적 또는 사회적 영향력 때문에 억울한 사람을 기소하거나, 또는 죄 있는 사람을 무혐의 처리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변호사들도 성의없이 변론하고 돈이나 챙김으로써 당사자들이 승소하거나 무죄가 돼야 할 사건이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럴 땐 모두 판사가 판결을 잘못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판사들에게도 문제가 없지 않다고 본다. 이른바 '전관예우'라는 것도 그 중 하나다. 물론 지금은 전과 달리 이른바 '전관'인 경우 수석부에서만 다룬다든지 하는 방법으로 개선하고 있다. 그러나 어제까지 법원에서 근무하다 오늘 퇴직하고 바로 그 법원을 상대로 변론을 한다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일본의 경우 법관으로 근무하고 나오면 대체로 변호사개업을 안 한다고 들었다. 우리는 일본과 많이 다르지만 법관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비상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오래되지 않은 신문기사들을 모아봤다.

▲의정부사건 뒤 자정 결의 말뿐 – 작년도 전관이 휩쓸었다

수원지법 형사사건 수임 1-5위 (1999년 1월 14일자 한겨레신문 기사)

▲퇴직3년 이내 판검사 상위 20명중 15명 차지 -서울 형사사건 변호사수임실태분석

(1999년 1월 14일자 동아일보 기사)

이걸 보는 국민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된다. 판사들이 퇴직하면 모두 큰돈을 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심지어 재판이 모두 이렇게 인지상정으로 봐주고 넘어가는 거라고 믿게 된다면 그건 너무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모든 사건에서 언제나 오판 없이 완벽하게 진실이 밝혀질 수는 없다. 문제는 그런 일들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는데 심각성이 있다. 내가 그냥 눈에 띄는 대로 스크랩해 두었던 것을 정리해 보았다. 만약 철저하게 검색해보면 이런 무죄사건은 크게 늘어날 거라고 생각한다.

– 억울한 동생 형이 구했다 – 폭력혐의 구속되자 진범찾기, 추적 7개월 무죄밝혀내

(1993년 11월 3일자 중앙일보 기사)

– 검경 강압수사 국고 축낸다 – 허위자백 잇단 무죄 판결, 피해자들 앞다퉈 손배소

억울한 옥살이 국가상대 승소많아 (1993년 11월 9일 동아일보 기사)

– 어느 경관의 억울한 살인 누명 1년 – 내인생 누가 보상하나 – 강압에 거짓자백,

1.2심 12년형, 진범잡혀 자유 – 경관까지 이러하니 – 우리재판 이런 건가

(1993년 12월 10일 문화일보 기사)

– 15년 억울한 옥살이 – 자살로 절규 (1997년 2월 6일자 한겨레신문 기사)

물론 이 경우는 대부분 법원에 의해 무죄가 선고된 것으로 그나마 다행인 사건들이다. 그러나 이런 사건들을 보면서 '과연 법원에 의해 이런 잘못된 기소들이 다 걸러지는 거냐'라는 의문이 든다. 여전히 우리는 수사기관에서의 변호인 입회권이 인정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검찰조서는 증거능력이 인정된다. 물론 임의성을 인정할 수 있는 경우라는 조건이 있지만 검찰 조사과정이 공정하지 못한 경우는 많이 있다.

검사들의 과중한 업무와 과학수사의 부재는 수사의 잘못을 부를 가능성이 여전히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이런 표현의 기사가 게재된 적이 있다. "검사들 사건 법원 전달하는 지게질만", "판사도 업무과중 이유 진실 추적소홀" (1993년 12월 28일 중앙일보 기사). 정말 무섭고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좀 더 공정한 재판을 위해

판사들의 숫자는 적고 업무는 과중한 것이 우리 현실이다. 집에서도 기록을 봐야 할 실정이다. 하지만 아무리 업무하중이 높다고 해도 여전히 오판은 변명하기 힘든 것이다. 따라서 당사자의 참여와 이의제기가능성을 언제나 열어두고 재판과정에서 투명성을 보다 증대시켜야 한다. 피고인이 법정에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고 입증하는 것이 어려운 현실에서, 어떤 때는 판사들 가운데 피고인이 증인을 신청하면 "그거 꼭 불러야 되겠어?"라고 말한 경우도 있다.

지금은 피고인이 부인하는 경우에도 보석을 허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일단 부인하면 보석신청이 인용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구속상태를 일단 면해야 한다는 점 때문에 보석신청단계에서 심지어는 1심 재판과정에서 자백하는 경우를 왕왕 보았다. 불구속의 확대와 구속절차의 혁신 때문에 그런 현상이 많이 사라졌다고는 생각하지만 법정에서 판사의 미움을 살까봐 주장과 증거신청을 하지 못한다면 이는 문제이다.

또한 기록열람과 등사도 쉽지 않다. 많은 재판관계자들이 기록접근문제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다. 무기대등의 원칙은 기록열람과 등사가 핵심이다. 기소되면 1심 공판전이라도 기록을 피고인이나 변호인에게 보여줘야 재판준비를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기록복사는 시간이 걸리고 때로는 급행료라는 이름의 불미스러운 일이 개재되기도 한다.

사실상 이름뿐인 구두변론주의도 대폭 강화돼야 한다. 형사변론은 좀 다르지만 민사재판은 원고, 피고 얼굴보기도 어렵다. 법정 밖에서 당사자를 만나고 함께 자유스럽게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그 사람의 여러 가지 모습을 볼 수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판사가 저런 모습을 본다면 진실을 밝히는데 참 중요할텐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형사사건에 있어서 국선과 사선을 포함해서 변호사 선임률이 아직도 20%가 되지 않는다고 들었다. 미국, 일본 등 주요 선진국에서는 거의 대부분이 자신을 대변할 수 있는 제도들이 마련되어 있다. 물론 우리나라도 국선변론이 확대되고 특히 희망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짐으로써 상당한 질적 개선이 이뤄졌다. 그러나 형사사건은 약식사건을 제외하고는 원칙적으로 모든 사건에 관해 변호인이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미국의 퍼블릭디펜더 제도의 도입이라거나 국선전담변호사제도의 설치 등을 고민해 볼 만하다고 본다. 그리고 지금의 수당을 조금만 더 올려도 국선변론제도가 좀 더 실효성을 갖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판결문 양식도 바꾸어야 한다. 그동안 법원은 어떻게 재판진행과 판결문을 쉽고 간이(簡易)하게 할 것인가를 주로 고민해 왔다고 보여진다. 물론 신속한 재판은 매우 중요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국민과 당사자의 입장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변호사 입장에서 보더라도 "사법경찰관직무취급 작성의 피고인에 대한 피의자신문조서 중 판시사실과 부합하는 일부진술기재"라는 식으로 기재되면 참 우울한 생각이 많이 든다.

도대체 그렇다면 어느 부분이 부합하고 어느 부분이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인지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 적어도 무죄를 다툰 사건에서는 좀 더 친절하게 상술한다면 당사자를 납득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영국은 심지어 하급심에서도 소수의견을 반드시 기재한다고 들었다. 아마도 그걸 발견하면 당사자는 그래도 내편을 든 사람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고, 더 나아가 항소심에서도 다툼의 준거가 될 것이다.

헌법적 고민의 부재

1986년 즈음 형사지방법원에서 영장담당판사로 근무하던 연수원 동기가 술자리에서 고민을 털어놓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요지는 최근 법무부장관이 헌법개정을 위해 길거리에서 서명운동을 하면 도로교통법위반으로 구속하라는 지시를 했는데 그 영장이 자기에게 오면 어떻게 해야할지 걱정이라는 것이었다. 즉 헌법개정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헌법이 보장하는 참정권으로 국민의 기본권에 속하는 것인데, 길거리에서 서명을 받는다고 도로교통법위반으로 처벌할 수 있는 것이냐는 고민이었다.

나는 그 고민을 듣고 저 정도로 고민하는 법관이라면 우리가 그 결정을 따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지난번 총선연대 활동을 하면서도 부패한 전력을 가진 국회의원 후보를 찍지 말라는 것은 헌법이 보장하는 참정권이자 표현의 자유 범주 안에 들어간다고 보았다. 그런데 선거법에 마이크를 써서 그런 의사표현을 해서는 안된다든지 플래카드를 걸면 안된다는 식의 조항이 있다면 그게 과연 합헌일 수 있느냐는 생각 아래에서 그런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헌법적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민주시민의 의무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 법률가들은 너무 헌법을 고민하고 있지 않다. 헌법은 나라의 근본법이고 모든 법률의 최고상위법이다. 따라서 모든 법률을 해석하고 적용함에 있어 당연히 헌법의 규정이 지향하는 바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헌법은 크게 보면 국민의 기본권보장과 통치구조에 관해 규정하고 있다. 특히 국민의 기본권보장에 관한 한 우리 헌법은 다른 나라 못지않는 선진적 헌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실질적으로 보호되는 인권의 수준은 그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법률을 적용하는 법관을 비롯한 법률가들이 충분히 그 헌법을 수호함으로써 국민의 기본권을 옹호하는 사명을 다하지 못한 결과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기드온의 나팔소리"(Guideon's Trumpet)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플로리다교도소에서 절도죄로 구속되어 있던 기드온은 미국대법원에 자기가 가난해서 변호인을 선임할 수 없으니 나라가 선임해 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청원을 냈다. 그는 이미 전과가 있는 그야말로 잡범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도 법정에서 대표권을 가질 수 있다는 이 사람의 주장은 결국 미국대법원에 의해 받아들여졌고 이 결정은 미국 사법사에 영원히 남는 금자탑이 되었다.

법률이 제아무리 자세히 규정되어 있더라도 복잡한 현실은 그만큼 법관에게 법해석의 재량을 남길 수밖에 없다. '법관에 의한 법창조'라는 말이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판사들이 지나치게 실정법적 해석에 치우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좀 더 법의 정신과 헌법적 고민에 따른 과감한 해석들이 나와야 된다.

법관의 세계관

우리 헌법은 법관은 "법률과 양심에 따라" 재판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양심'이란 무엇인가.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 인생의 경험과 경륜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고 사물을 이해하는 것이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이 일반상식과 너무 지나치게 다르고 왜곡되어 있을 경우에는 올바른 법률해석이 나올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세계관의 공정성과 편향성의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물론 10여년 전의 이야기이지만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노동사건 전담변호사 한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당시 서울민사지법의 노동전담부 판사들은 "어떻게 하면 노동자들을 불리하게 할까 고민하는 사람같아 보인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그 이야기는 다소 극단적인 예이지만, 법관의 사고가 형성되는 과정을 보면 사실상 노동자보다는 사용자편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사회과학의 기초를 쌓고 세상의 다양한 경험을 한다는 것은 법관의 판단에 있어서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법과대학이 대학원 코스로 되어 있고 학부에서는 다른 교양학문을 익히도록 되어 있는 취지도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본다. 내가 하버드 법대 객원연구원으로 있을 때, 법과대학원 행정실에 두꺼운 파일이 몇권 있길래 보니까 인턴을 받아주는 국내외의 여러 인권단체·여성단체·시민단체들의 리스트였다.

이들은 방학 중 또는 6개월에서 1년간 인턴과정을 거치며 강의실에서 배울 수 없는 것들을 익히게 된다. 더구나 법학교육과정에서 그리고 변호사가 된 후에도 이들은 끊임없이 법률클리닉과 공익활동에 대한 강조, 재교육의 실시 등이 이뤄져 현실에서 유리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 6-7년전 진주지원의 어느 판사가 '한국사의 이해'를 저술한 경상대 교수들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하겠다는 영장을 청구해오자 이를 기각한 일이 있었다. "……이런 책을 일반 사회과학 서점에서 접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고……" 필자는 사건을 접하면서 적어도 그분은 평소 사회과학 서점을 다닌 판사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 판결 때문에 그 당시 이른바 '공안흐름'이 차단될 수 있었다. 판사들의 서점돌기, 이야말로 세상 돌아가는 일을 따라잡는데 너무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저작권에 관한 논문을 읽으면서 이런 구절을 본 적이 있다. 미국의 유명한 홈즈대법관이 평소 지하철을 타고 다니고, 야구구경도 가고, 만화책도 읽는 것을 보고 라스키라는 친구가 대법관으로서의 체신을 지키라고 권고했다고 한다. 그의 대답은 법관이 그런 노력이라도 하지 않으면 어떻게 자신의 재판대상인 일반시민들을 이해할 수 있겠느냐는 반문이었다.

나는 때로 모든 법관의 판단이 정말 평균인의 상식을 담보하는가 하는 회의가 들 때도 있다. 영남대 박홍규 교수가 배심제 도입을 주장하는 취지도 그런 것이라고 본다. 물론 우리나라 일반시민들이 실제 배심이 되는 경우 오히려 사회적 여론이나 외부의 압력에 영향을 받을 수 있고, 아직 권리의식·법에 대한 이해도가 낮아 부작용이 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사들이 상식을 따라잡는 데 소홀히 할 때는 배심제 주장이 그 근거를 얻어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본 사법개혁의 최고 화두는 배심제이다. 일본변호사연합회가 공식입장으로 배심제를 지지하고 있고 일본변호사연합회가 중심이 되어 100만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러한 동향을 주의깊게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판결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

온 세상의 분쟁이 우리의 사법부로 몰려든다. 판단하기 힘들다고 하여 보류하거나 거부할 수 없다. 어떤 결론이든 내야 한다. 그 중에는 고도의 정치적 사건도 있고 재벌의 문제도 있고 또 복잡하게 얽힌 인생사도 있다. 당사자들은 판사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쓰고 어떤 결론이 날지에 관해 사력을 대해 싸운다. 판사들의 판결은 단순히 피고인 한 사람에게만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 판례로 말미암아 세상의 물꼬가 바뀌는 경우가 적지 않다.

미국 대통령은 자신의 재임기간 중 가장 큰 치적으로 치는 것이 어떤 대법관을 임명했느냐이다. 자신은 퇴임하지만 그 대법관은 종신기간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판사들의 업무는 정말 힘겹다. 하지만, 모든 당사자들을 납득시키는데 사법과 판사의 사명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잔이다.

박원순 | 참여연대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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