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감시센터 사법감시紙 2000-10-01   1342

[15호] 누가 변호사업계를 위기라 말하는가

얼마 전, 근무하는 학교의 한 학생과 약간은 심각한 상담을 한 적이 있다. 저녁에 시내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사소한 일로 시비가 되어 낯모르는 청년과 싸움이 붙었는데, 경황 중에 일이 좀 커져 법적으로도 문제가 될 것 같다는 것이었다. 이런 일로 연구실을 찾아 온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이, 사건의 전후관계에 본인의 주장, 변명, 하소연을 뒤섞어 한참 동안 넋두리를 이어가더니, 학생은 그제서야 분(憤)과 한(恨)이 좀 풀리는지, 사실은 부모님이 지역에서 가장 잘 나가는 변호사를 선임하셔서 사건 자체는 어느 정도 잘 정리가 될 것 같다고 스스로 위안하려 했다.

'별 것 아닌 일인 모양인데,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잘도 넘어가는 구나!' 이미 마감을 넘긴 원고 생각에 일순 야속한 생각이 고개를 들 즈음, 부모님께 정신적 물질적으로 폐를 끼쳐 죄송하다는 예의 인사말을 이어가는 학생의 문장들 속에서 충격적인 인포메이션이 퉁겨져 나왔다. "뭐? 다시 말해 봐. 얼마, 얼마라고?"

학생의 말로는 자기와 자기 친구의 변호사비용으로 일금 1,400만원을 지급했다는 것이었다. 학생의 말 중에 구속 운운하는 언급이 있었던 것을 보아, 짐작한 것보다 사안이 훨씬 중하다고 하더라도, 1,400만원은 너무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서작업이 과중하다거나, 구치소를 자주 들락거려야 한다거나, 보조인력들을 이용해 자료를 수집할 일이 많은 것도 아닐텐데, 이런 사건에 1,400만원씩이나 받아서 도대체 어쩌겠다는 말인가?

늘 하는 버릇대로 잠시나마 당사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려고 노력도 해 보았다. 직원들 월급도 주어야 할 테고, 사무실 임대료도 내야 할 테고, 내가 모르는 까다로운 법 논리를 개발할 필요가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흔히 있는 학생들 싸움 건에 1,400만원은 너무한 것이 아닌가? 대충 계산하여 그 금액이 대학 졸업자들의 초봉 일년치에 해당한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이건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것임에 틀림없다는 어떤 노여움이 치밀고 올라 왔다.

덕분에 혼이 난 건 상담을 마치고 나가려던 그 학생이었다. 자기 부모가 그 많은 돈을 주고 법적 명운(命運)을 부탁한 잘 나가는 변호사님의 이름조차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몰라도 되는 게 따로 있지? 자기 변호사의 이름을 모른다니, 그게 말이나 되니? 그럼 그 많은 돈은 뭐하러 줬어? 자네, 그러고도 대학생 맞아?"

한 번씩 서울에 갈 때마다, 여기저기서 변호사업계의 상황이 예전 같지 않다는 말들을 듣는다. 고위 법관들이 퇴직할 때 전에는 로펌을 고를 수가 있었는데, 이제는 오히려 로펌의 눈치를 봐야 한다든지, 사법연수원생들이 초봉에 관한 은밀한 카르텔을 맺었다가 취업걱정에 바빠 유야무야 되었다든지, 형사사건의 단가가 떨어지는 것은 물론 소액사건에까지 냉혹한 수임경쟁이 시작되었다든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사무실 운영비를 못 건져 전전긍긍하는 변호사들이 수두룩하다든지. 이런 저런 풍설(風說)에다가 평생 보장에 학문적 자기실현을 도모할 수 있으니 대학교수야말로 최고의 직업 아니냐는 추임새까지 곁들여지고 나면, '뭔가 달라지긴 달라지는 모양이구나!'하는 생각에 짐짓 야릇한 감상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서초동을 벗어나면서 곧바로 부딪히게 되는 것은 변호사업계의 위기론과는 전혀 다른 국민들의 생활감각이다. 사법서비스의 소비자인 국민의 입장에서 볼 때는 이전과 별반 달라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아직도 사법서비스의 단가는 터무니없이 높고, 법률가(변호사)들은 만나기조차 어려우며, 사법과정의 분위기 또한 지나치게 고압적이다.

더욱이 사법기관 주위의 사건브로커들은 여전히 활개를 치는데, 어제의 고위법관들이 줄줄이 재벌기업의 고문변호사로 입신하는 모습은 변호사비용이 무서워 사법접근권을 포기하는 국민들에게 근본적인 배신감만을 불러일으킬 따름이다. 여기에 제2의 IMF사태를 염려케 하는 나라 안팎의 경제상황까지 결부되면, 변호사업계의 위기론은 그야말로 찻잔 속의 엄살태풍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게 된다. "도대체 잘난 변호사들이 이렇게 많은데, 국민의 혈세(血稅)로 살린 알토란같은 기업들은 왜 별다른 법적 협상(legal negotiation)도 없이 헐값에 해외에 매각되어야만 한단 말인가?"

확신을 가지고 말하건대, 오늘 변호사업계의 위기론은 오랜 봉건적 기득권에 착념(着念)하는 노스탤지어의 반영일 뿐이다. 그런 향수에 빠져 있으면 있을수록, 새로운 시대의 무한경쟁에서는 도태될 수밖에 없다. 위기의식을 느끼면 느낄수록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하여 획기적인 이노베이션(innovation)을 추구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왜 국민대중과 변호사업계를 갈라놓는 저 광대한 브로커집단들의 영지를 마음먹고 공략하지 않는가?

왜 고시(高試)의 신화가 제공하는 렌트(rent)를 과감하게 포기하고, 소비자 속에 들어가 말 그대로 법률서비스의 가격으로 승부하지 않는가? 왜 세계화와 정보화의 물결 속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잠재적 법률서비스 수요를 능동적으로 계발하지 않는가? 사법시험을 준비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할 때, 오늘의 변호사들 중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켰던 것은 속물적인 출세의욕이 아니라 '공공선을 향한 헌신'이라는 대의(大義)였다고 믿고 싶다. 그렇다면, 권력자들에게 빌붙어 지역구 공천을 구걸할 것이 아니라, 풀뿌리에서부터 민중을 엮어 매는 법률가·정치가 후보자들도 여기저기서 등장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대다수의 사회과학자들이 전망하는 것과 같이, 앞으로의 사회는 급속도로 법중심의 사회로 변모해 갈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법률가의 사회적 중요성 역시 높아져서, 하버마스 식으로 표현하자면 체계와 생활세계, 국가와 시민사회를 잇는 핵심고리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변호사업계의 위기론을 유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궁지에 몰린 사람들의 코묻은 돈을 챙기는 이러한 행태로는 결코 다가오는 시대의 행운을 향유할 수 없다.

그렇다면 누가 이 시대정신을 이끄는 역사적 주인공의 지위를 차지하게 될 것인가? 봉건적 기득권에 길들여진 선배 변호사들의 틈바구니에서는 이제 더 이상 나누어 먹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90년대가 낳은 젊은 법률가들이 절감하게 되길 바란다.

그리고 어차피 잃을 것이 없는 이상, 새로운 기풍으로 새로운 법률가상을 실현하는 것 이외에는 대책이 없음을 합의하게 되길 빈다. 자신들의 생존을 담보로 한 이들의 집단적인 개혁노력 외에는 솔직히 희망을 걸만한 대안을 발견할 수 없다. '밑으로부터의 개혁!' 요컨대, 이것이 변호사업계의 위기론을 불식하고 우리 사법시스템의 고질병을 해결하는 근본적인 대책인 것이다.

이국운 | 한동대 법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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