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감시센터 칼럼(jw) 2009-03-24   2240

[떼법은 없다 서평] 법은 다시 주인에게로

“떼법은 없다”를 읽고

김민수 자원활동가

C학점

경영학 필수전공으로 들어야 했던 상법 전공서적은 들고 다니기도 무거웠다. 어떻게 수업을 했는지 지금은 기억도 잘 나지 않지만 어쨌든 무거운 전공서적을 들고 다니기가 싫어서 제본도 하지 않은 채 ‘부~욱’ 찢어서 해설부분만 들고 다녔던 것 같다. 그 당시에는 말이 어려워서 이해도 못했고, 이해를 못하니 도무지 흥미를 붙일 수 없었다. 믿는 건 성실함밖에 없었기 때문에 결국 결석 한 번 없는 학생에게 하사된 학점은 C. 일상에서 법을 마주할 기회도 별로 없기 때문에 법은 C학점 한 과목으로 내 인생에서 마무리 지어지는 듯 했다.

법은 그 나라의 국민을 지키고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 법을 바탕으로 한 공권력의 행사는 국민들을 억압하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사진 : 이영동 회원)

보이지 않는 공포의 대상

그러나 작년 촛불 때 유모차 부대가 아동학대죄로 기소가 되고, 인터넷에 자신의 견해를 밝힌 미네르바가 구속되었다. 또한  소비자 불매운동을 하자고 권유했던 카페지기들이 집행유예를 받았다. 처벌의 기준을 알 수가 없었다. 유일한 공통점이 있다면 정부의 생각과 다른 사람들을 검찰이 잡아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해할 수 없었던 법은 이제 보이지 않는 공포의 대상으로 인식되고 말았다.

하지만 최근 참여연대에서 기획하고 일곱 명의 법 관련 전문가들의 글을 모아 놓은 책 ‘떼법은 없다’는 왜 내가 법을 두려워하는가를 알려 주었다.

법치의 본질

“법치의 본질은 법을 통해 정부권력을 통제하고 이를 통해 권력으로부터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함에 있다… 권력이 남용되지 않도록 국민들이 법률을 만들고 이 법률로써 정부를 견제하고 통제하는 것이 바로 법치의 실체이다.”

한상희 교수는 ‘법치의 종말’이라는 글에서 법의 본질이 권력으로부터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함에 있다고 말한다. 검찰은 편협한 조문들을 무기 삼아 국민을 꼬투리 잡고 협박하기 위한 조직이 아니라는 뜻이다.

박경신 교수는 ‘판사님들, 시민단체 두려워하지 마세요’라는 글에서 “삼권분립 원칙에서 사법부 독립은 입법부나 행정부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지 국민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사법부도 국민의 대표이며…”라고 말한다.

국가의 최고 권력인 대통령도 국민들의 권리를 잠시 위임받은 자리다.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국민을 억누르는 것은 배은망덕한 머슴의 행태에 지나지 않는다. 대통령도 이러한데 하물며 사법부가 자신의 존재 근거를 망각한 채 국민에게 폭력적이고 고압적인 자세로 일관하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다.

또한 연예인 죽음에 관련하여 사이버모욕죄를 만들겠다는 정부와 여당의 움직임에 한상희 교수는 ‘그들의 헛짓에 저항하라’라는 글에서 ‘그들은 그녀의 죽음을 막아야 했던 국가의 의무와 책임에 대한 회개는 아예 거부해 버리고 만다’라고 말했다.

법은 처음부터 끝까지 국민을 억압하는 행정 권력의 도구로 전락해버린 느낌이다. 미네르바 사건, 광고주 불매운동 사건, 집시법 개정 등 많은 사건들 속에서 법은 국민의 염원을 저버렸다.

촛불의 물결(사진 : 이영동 회원)

국민을 위한 민주사법으로

법이 보이지 않는 공포로 자리잡게 된 원인을 알 수 있었다. 국민은 법을 ‘사법시험을 통과한 소수 기득권층’에게 빼앗기고 말았던 것이다. 국민을 지켜야 할 법이 행정부의 권력을 지키고 있다. 사회의 소수자와 약자를 지키기 위해 임명한 사법관계자들이 권력자와 강자에게 종사하고 있는 것이다. 몇몇 판사와 검사들이 사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사법부의 양심을 지키려고 한다는 것에 안타까울 따름이다.

법은 이제 다시 자신의 주인에게로 돌아와야 한다. 국민의 신뢰를 받는 사법부로 거듭나기 위한 실천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다. 전관예우 근절, 공판중심주의 실현을 위한 형사소송법 개정, 국민의 재판 참여제도, 로스쿨 도입을 통해 사법부가 국민에게 다시 돌아와야 함을 책은 주장하고 있다.

하태훈 교수는 “억눌린 대중의 하소연과 답답한 군중의 함성을 ‘떼법’이자 ‘불법’으로 낙인찍는… 법치를 강조하는 분들이 그런 인식을 갖고 있다.”라며 책의 서두를 열었다.

“다시 법이 지배의 도구로 재편되고 시민의 지배자로 군림”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소크라테스가 법적 안정성을 지키기 위해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음에도 지난 독재정권에 의해 소크라테스는 수없이 왜곡되어 왔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아름다운 삶, 정직한 삶을 위해 사법부의 재판에 저항했다. 저항을 위해 죽음의 극단적 방법을 선택했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알려진 사실이다. 권력을 위한 독재사법이 아닌 국민을 위한 민주사법으로 우리나라 사법부가 전환되길 기대한다.

떼법은 없다 : 벼랑 끝에 몰린 법치와 인권 구하기
참여연대 기획
김창록  박경신  임지봉  조국  차병직  하태훈  한상희 지음
2009. 4. 1 | 해피스토리 | 10000원

‘떼법’이란 말은 어디서 왔을까요? 참여사회연구소는 이에 대해 흥미로운 조사 결과를 내놓은 적이 있습니다. 1997년부터 2008년 5월까지의 신문기사를 대상으로 ‘떼법’이란 말이 ‘얼마나 자주’ 그리고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조사한 것입니다.
(http://blog.peoplepower21.org/Research/30225)

단순 빈도수로 보면 한국경제(73회), 동아일보(50회), 중앙일보(37회), 조선일보(33회), 경향신문(23회), 한겨레(14회) 등의 순서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용의도를 살펴보면 경제지 혹은 보수지로 평가되는 신문은 ‘파업시위 비판’에, 한겨레・경향 등에서는 ‘정책우려’와 관련된 기사 혹은 칼럼에 많이 쓰임을 알 수 있고요. 자세한 내용까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같은 용어를 사용함에도 그 주체에 따라 다른 어법이 작동함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천하에 떼법은 없다. 억눌린 대중의 하소연이 있고 답답한 군중의 함성이 있을 뿐 떼법은 없다. (한상희, “‘떼법’은 없다”에서)

“시위나 파업을 ‘떼법’으로 부르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파업․시위는 떼쓰기에 불과하다고 보는 사용자의 시선’과 ‘헌법보다는 집시법이나 도로교통법이 훨씬 중요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몰상식함’”(참여사회연구소)이 우리 사회에 ‘떼법’이라는 프레임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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