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감시센터 칼럼(jw) 2004-09-03   1248

<안국동窓> 돌아보지 마라!

1965년 밥 딜런은 공연을 위해 런던에 3주간 머물렀다. 펜네베이커는 그때 밥 딜런의 생활이며 공연 모습 등을 기록하여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1967년에 발표된 이 다큐멘터리의 제목은 ‘돌아보지 마라’이다. 교육방송에서 8월 30일부터 ‘국제다큐멘터리 페스티벌’이라는 대단히 과감한 프로그램을 시작하면서 이 귀한 다큐멘터리를 방송했다. 거의 끝나갈 때에 보게 되어서 너무 아쉬웠지만, 23살의 천재 밥 딜런을 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밥 딜런은 60년대 미국을 대표하는 예술가이다. 그는 작사, 작곡, 편곡에 모두 능한 전방위 음악가이다. 기타와 하모니카 연주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그와 함께 60년대 미국을 대표하는 또 다른 예술가로 앤디 워홀을 들 수 있다. 팝아트의 개척자로 알려진 워홀은 소비사회의 특징을 포착하는 데서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밥 딜런과 전혀 상관이 없을 것으로 보이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왜 그런가?

워홀은 벨벳 언더그라운드라는 뛰어난 록 그룹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영화 ‘접속’에서 사용된 ‘Pale Blue Eyes’라는 노래가 국내에서 뒤늦게 히트치면서 이 그룹이 새삼스럽게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이 그룹의 리더는 루 리드라는 사람이다. 1993년에 열린 밥 딜런의 데뷔 30주년 기념 헌정공연에 출연하기도 했던 이 사람도 역시 천재 음악가이다. 그리고 밥 딜런과 마찬가지로 평화를 사랑하는 평화 음악가이기도 하다.

‘돌아보지 마라’를 보면서 다시 그 시대를 돌아보게 되었다. 낡은 전쟁세력에 맞서서 젊은 반전세력이 치열하게 맞붙었던 그 뜨거운 시대를 돌아보며 지금 우리의 현실과 미국의 현실과 세계의 현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세상은 왜 이다지도 엉망이란 말인가? 오래 전에 밥 딜런이 노래했듯이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대포밥이 되어야 세상에 평화가 깃들게 될 것인가? 우리의 노력은 정녕 쓸모없는 것인가?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의 명백히 시대착오적인 판결을 보면서 더욱 더 비감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자유민주주의를 그 뿌리에서부터 위협하는 반인권법인 국가보안법을 유지해야 한다는 판결을 다른 곳도 아닌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이 내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이 반인권세력의 수호자를 자처하고 나서다니 이 나라가 과연 자유민주주의 국가란 말인가?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은 이 나라를 이승만과 박정희와 전두환의 독재시대로 돌려놓으려고 하는가?

밥 딜런의 다큐멘터리에 ‘돌아보지 마라’는 제목을 붙인 까닭은 50년대의 메카시즘과 60년대의 베트남전쟁을 일으킨 낡은 질서와 가치로부터 떠나야 한다는 것을 호소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 메카시즘은 찰리 채플린과 같은 예술가로 하여금 영원히 미국을 등지게 하였고, 베트남전쟁은 수많은 미국인들의 머릿속에 영원히 나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겨 놓았다. 밥 딜런은 런던에서 이렇듯 반인권적인 낡은 질서로부터 떠날 것을 노래로 호소했다.

그런데 이 다큐멘터리의 끝은 낡은 질서의 힘이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님을 절감하게 한다. 공연이 끝나고 젊은 밥 딜런은 승용차를 타고 공연장을 떠난다. 뒷자리에 같이 탄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밥 딜런에게 런던의 신문에서 밥 딜런을 ‘아나키스트’라고 불렀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 밥 딜런은 충격을 받았는지 잠시 대꾸를 못하다가 ‘공산주의자라고 하지는 않냐’고 묻는다. 이어서 런던은 참 이상한 곳이라고 뇌까린다.

전쟁에 반대하고 자유를 옹호하기 위해 런던에 온 밥 딜런이었건만 ‘아나키스트’라는 신문의 평가에 이렇듯 움츠러들고 말았다. 무엇 때문일까? 미국에서 사상의 자유를 거의 질식시켰던 매카시즘의 악령이 젊은 밥 딜런의 무의식에 스며들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밥 딜런조차 이런 반응을 보였다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의 무의식에 그 몹쓸 악령이 스며들어 있지는 않았을까? 열렬하기로 유명한 미국의 애국주의라는 것도 결국 매카시즘의 악령과 동전의 양면인 것은 아닐까?

일찍이 존 스튜어트 밀이 설파했듯이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자유민주주의의 기초이다. 바로 이 점에서 국가보안법은 자유민주주의의 적이다. 그것은 헌법 위에 군림하며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기 때문이다. 그 영향은, 밥 딜런의 경우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너무도 크다. 국가보안법은 일찍이 매카시즘이 그랬듯이 시민을 독재의 노예로 만들기 위해 만들어졌다. 수많은 시민이 오랫동안 싸움을 벌여서 비로소 이 악법 중의 악법을 폐기하고 이 나라를 자유민주주의의 반석 위에 세울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이 팔을 걷고 나서서 우리에게 뒤를 돌아볼 것을 강요한다. 대체 무엇을 돌아보라는 것인가? 우리에게 인권침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라고, 반인권세력의 권력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것인가? 돌아보았기 때문에 오르페우스는 사랑하는 아내를 영원히 하데스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나는 다시 밥 딜런의 다큐멘터리를 떠올린다. 돌아보지 마라. 돌아보면 사랑하는 사람을 지옥의 신에게 영원히 빼앗기게 된다. 돌아보지 마라. 돌아보면 우리는 돌이 되고 만다.

홍성태 (참여연대 정책위원장, 상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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