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감시센터 칼럼(jw) 2005-02-04   1444

<안국동窓> ‘그때 그 사람들’과 검열권력

2월 3일 ‘10․26 사건’을 다룬 임상수 감독의 영화가 개봉되었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이 영화는 법원의 판결에 의해 심각한 훼손을 당했다. 26년 전에 일어난 이 역사적 사건을 그린 첫번째 영화를 우리는 제대로 감상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우리가 이룬 민주화의 수준이 얼마나 얕고 약한 것인가를 이 영화에 대한 법원의 판결에서 읽을 수 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대해야 한다.

이 영화에 대한 논란은 예상된 것이었다. 무려 18년에 걸친 박정희(다카키 마사오)의 폭정을 끝낸 ‘10․26 사건’을 소재로 다룬 영화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이 사회의 곳곳에서 막강한 위세를 부리고 있는 박정희의 후예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박정희 식의 ‘음모론’이 여기저기서 들려오더니, 결국 그의 아들이 법원에 상영금지 가처분신청을 냈다.

이 가처분신청에 대해 서울중앙법원 민사50부(이태운 부장판사)는 ‘부마항쟁 시위 장면’, ‘박대통령이 사망한 뒤 김수환 추기경이 추모하는 장면’, ‘박대통령의 장례식 장면’ 등 세 부분의 다큐멘터리 장면을 삭제하라는 조건부 상영을 결정했다. 이유인즉슨, 다큐멘터리 장면이 극의 내용을 사실로 혼동하게 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재판부가 보기에 시민들이 사실과 허구를 혼동할 정도로 수준이 낮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어이없는 판결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가 처음 세상에 선을 보였을 때, 관객들은 대소동을 일으켰다고 한다. 스크린에 비친 기차의 모습을 보고 자신들에게 달려오는 것으로 착각해서 모두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대피하려고 했던 것이다. 아마도 재판부는 우리가 지금 이런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영화의 일부분으로 삽입된 다큐멘터리 때문에 시민들이 사실과 허구를 혼동하리라고 판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늘날 영화는 가장 인기있는 오락물이자 예술품이다. 그런데 이번의 재판부는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판사들로 짜였던 모양이다.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영화나 보는 정도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다큐멘터리를 영화에 삽입하는 것이 대단한 것이 아닌 극히 평범한 기법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일일이 예를 들 필요도 없이 아주 많은 영화들이 이 기법을 사용한다. 이 기법 때문에 사람들이 사실과 허구를 혼동했다면, 이 세상은 이미 아주 엉망이 되어 버렸을 것이다.

재판부의 우려와 달리 시민들의 수준은 아주 높다. 아마도 재판부보다 영화에 대해서도 훨씬 더 잘 알 것이다. 사실과 허구를 혼동할 정도로 수준이 낮은 것은 시민들이 아니라 바로 재판부이다. 다큐멘터리가 섞인 영화를 보면 관객들이 사실과 허구를 혼동할 것이라는 허구를 사실로 받아들인 재판부는 다큐멘터리가 섞인 영화를 보며 즐기는 관객들의 조롱과 비난을 사기에 충분하다. 이번의 재판부는 사법개혁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었을 뿐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표현의 자유’라는 기본권에 대한 침해이다. 재판부의 판결은 어떤 사실적 근거도 없이 막연한 추측만으로 검열을 행했다. 재판부는 시민들을 모욕했을 뿐만 아니라 ‘표현의 자유’를 침해했다. 자유민주주의를 떠받치는 가장 중요한 기초인 ‘표현의 자유’를 지킬 책임이 있는 법원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검열권력으로 나선 것이다. 이런 검열권력이 작동한다면, ‘창작의 보고’로 여겨지는 우리의 현대사를 소재로 다룬 창작활동은 심각하게 위축되고 말 것이다.

여기서 박정희가 자행했던 검열을 떠올리게 된다. 박정희는 한일국교정상화로 거세게 일어난 ‘왜색 비판’을 피하기 위해 당시 최고의 인기가요였던 이미자 선생의 ‘동백아가씨’를 금지가요로 만들어 버린다. ‘왜색’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참으로 생뚱맞지 않은가? ‘그때 그 사람들’을 훼손한 재판부가 내세운 이유도 마찬가지다. 관객들이 사실과 허구를 혼동할 우려가 있다니, 이 얼마나 생뚱맞는가?

박정희를 보호하기 위해 어떤 논리도 근거도 없이 자행된 재판부의 이 생뚱맞은 폭거에 맞서서 ‘표현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 이번의 폭거는 임상수 감독이나 영화인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정당한 권리에 대한 폭거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온전한 ‘그때 그 사람들’을 볼 권리가 있다.

홍성태 (정책위원장,상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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