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감시센터 칼럼(jw) 2010-04-30   2536

‘룸살롱’ 검찰과 ‘패악질’ 국회의원, 무법시대에 국민이 할 일

우리의 검찰과 국회의원들께 드리는 대정부 담화문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전 소장

권력은 있되 법은 없는…

한상희 교수대한민국의 법질서가 어쩌다 이 지경에까지 왔나. 총체적인 무법의 시대다. 그냥 앉아서 신문 한 쪽만 뒤적여도 오만가지 불법과 비리와 탈선행위가 종합선물세트처럼 펼쳐진다.

부정부패를 단속해야 할 검사들이 패거리지어 룸쌀롱과 모텔을 오가는 부정부패를 몸소 실천하였다는 이야기가 뭇 신문들을 황색저널처럼 변색시키며, 정책선거를 향해 공정한 선거관리에 전념해야 할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이번에도 변함없이 정책비판과 부정선거운동을 구분하지 못하는 치매의 상태에 빠져 있다.

민중의 지팡이를 자처하던 경찰은 두 명만 모여도 집시법 위반 운운 하며 민중을 곰팡이 취급하며, VIP를 보호하라고 만들어 놓은 경호처는 G20정상회의를 핑계로 집회와 시위 자체를 차단하면서 민주주의를 가로막으며 정권 경호에 앞장선다.

그 뿐이랴. 생각 없는 장관 한 분은 인증도 되지 않은 아이패드를 들고 온 국민 앞에 나타나 불법을 홍보하며 세계의 눈총을 자초한다.

이런 와중에 당찬 군수 한 분은 위조여권, 차량추격전, 내연녀 등등으로 B급 액션영화 한 편을 그려내는 덕분에 우리는 약간의 숨고르기라도 할 여유를 찾게 된다.

총체적인 법붕괴의 순간이다. 권력은 있되 법은 없는, 전형적인 폭력의 공간이다. 헌법재판소가 우리 헌법이 가장 소중한 가치로 삼고 있다고 선언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그 밑바닥에서부터 무너지는 현장이다. “자의적 지배와 폭력적 지배를 거부하고 ……” 자유민주주의라는 것이 자의와 폭력의 거부에서부터 시작된다는 헌법재판소의 판단이 옳다면, 이 모든 행패들은 그 자체 반헌법적이며 반국가적이다.

국민적 정당성을 구하지 아니한 채 독단적으로 법을 해석하고 적용한다면 그것은 자의적 지배가 되며, 법의 통제를 받지 아니한 채 자기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른다면 그것은 폭력적 지배다. 최단기간내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자랑스러운 나라라고 으스대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 새 법은 사라지고 질서가 무너지는 암담한 현실에 처해져 있는 셈이다.

법과 폭력: 검찰의 줄타기·물타기

하지만 이 모든 법질서 교란행위는 공판중심주의조차 무시해버리는 검찰과 파산을 무릅쓰고 눈물겨운 투쟁에 나선 한 여당 국회의원에 와서야 비로소 그 장엄한 하이라이트를 맞이한다.

검사의 공술 도중 갑자기 방청석 이곳저곳에서 킥킥 웃음이 터진다. 한 여성 방청객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한 채 큰 소리로 웃고 만다. 결국 경위 한 사람이 뛰어 와서는 그 방청객에게 조용히 하라며 주의를 준다.<「김상곤 교육감 재판에서 웃음이 터져나온 이유는?」 프레시안, 2010. 4. 28>

W. 멕도갈에 의하면 웃음은 상대방에 대한 호의의 표시거나 혹은 조소와 같이 상대방에 대한 비판의 표현이다(두산백과사전, 「웃음」). 곽노현 서울시교육감 예비후보의 재판방청기에 나오는 한 여성 방청객의 “터져 나오는 웃음”은 어느 쪽일까?

재판은 시국선언에 참여한 교사들에 대해 그 사건의 확정판결이 대법원에서 선고될 때까지 징계를 미루었다는 이유로 김상곤 경기도교육감에게 직무유기죄의 혐의를 지워 형사재판에 회부한 사건을 다룬 것이다. 여기서 웃음은 검사가 유죄를 증명하는 증거로 ‘반국가교육척결국민연합’ 등 우익단체의 고발장이나 몇몇 극우적 성향을 보이는 메이저 신문의 기사들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터져 나왔다고 한다.

유죄의 입증을 위해 증거라고 내어 놓은 것이 겨우 편향된 시각을 가진 사람들의 일방적인 의견뿐이라는 사실이 웃음을 유발한 것이다. 어떤 관념과 관념이 불균형적일 때 웃음이 나타난다고 한 A. 쇼펜하우어의 말은 적어도 이 광경에서는 진리가 된다. 이 재판의 검사는 엉뚱한 행동, 아니 보다 품위 있게 말하자면 ‘낯설게 하기’라는 고도의 인문학적 발상으로 법정의 분위기를 일거에 바꾸어 놓았다. 법의 공간에서 폭력의 공간으로….

검사들이 법의 이름을 빌어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는 이 사건에 한정되지 않는다. 한명숙 전 총리의 수뢰혐의로 진행되었던 사건은 또다른 예가 된다. 합리적인 의심을 배제할 정도로 제대로 된 유죄의 증거는커녕, 제대로 된 수사도, 제대로 된 논리도 구비하지 못 한 채 단순한 심증만으로 혹은 심증을 빙자한 다른 의도만으로 한 사람을 피의자의 신분으로 몰아 넣고 온 세상에 대놓고 그녀에게 악당이라는 낙인을 찍어 내었다.

노회한 장사꾼 한 명을 벼랑끝까지 다그치며(혹은 구슬리며) 얻어낸 진술만으로 시민 한 사람(과 의자와 화장대까지)을 자기 권력의 수중에 넣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래도 이 사건은 검사가 직접 수사(?)라는 것을 한 것이다. 용산참사와 관련한 재판을 비롯하여 소위 시국사건이라 불리는 재판들에서 공판담당검사들이 유죄의 증거라고 내어 놓는 것이 겨우 경찰의 수사기록이나 혹은 정보보고서들일 따름이라는 말을 듣게 되면 정말 기겁할 지경이 된다. 피의사실과 무관하거나 혹은 정황증거로서의 의미조차도 없는 기록들을 뭉텅이로 내어 놓고 막무가내로 피고인을 구속하고 기소하며 또 유죄의 판결을 얻어 감옥에 감금해 놓고자 하는 것이다.

폭력도 이런 폭력이 없다. 사자가 아기 양을 잡아 먹기 위해 이런 저런 핑계를 갖다 대는 우화가 그대로 복제되는 순간이다. 여기서는 법도, 정의도, 심지어 재판도 필요 없다. 검사가 피의자를 ‘찍고’ 그의 죄명을 선택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일단 구속이라는 처벌과 피의사실공표라는 서동요 식의 낙인이 그의 손에서 먼저 이루어진다. 재판은 이런 폭력을 사후적으로 정당화하거나 아니면 방치하는 수순에 불과하다. 정치인에 대해서는 뇌물이나 수수하는 타락자로 낙인찍고, 인권활동가에 대해서는 집단폭력을 부추기는 폭력방조범으로 낙인찍고, 노동자에게는 업무방해를 일삼는 양아치로 낙인찍고, 철거민이나 빈민들에 대해서는 횡패를 일삼는 패악자로 낙인찍는다. 법원의 재판이 나오기도 전에, 혹은 법이 제대로 호명되기도 전에 말이다.

법학을 강의하다 보면 더러 조폭과 국가의 차이를 고민하게 된다. 양자는 모두 아무런 댓가도 없이 정기적, 부정기적으로 돈을 뜯어가고, 이런저런 명령으로 귀찮게 하며, 자신의 필요에 의해 주먹을 휘두른다.

그럼에도 전자보다 후자가 나은 것은 내가 그에 동의하며 그의 행동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혹은 국가는 자신의 그런 행동이 정당하다는 점을 시도 때도 없이 국민들에게 인식시키고 또 그런 확인을 받고자 애쓰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헌법이 있고 법이 있고, 입헌주의가 표방되며 법치가 거론된다. 하지만, 어느 시공간에서 국민에게 자신을 납득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중단된다면 아니, 그를 넘어 국민을 윽박지르며 자기 존재를 과시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국가일 수가 없게 된다. 그것은 오로지 야만일 따름이다.

“조폭”, “깡패” 그리고 판결

이런 야만은 다시 조전혁 의원(한나라당)의 홈페이지에서 꿈틀거리며 현현한다. 법원의 가처분결정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전교조를 비롯하여 각종의 교원노조에 가입한 교사들의 명단을 공개한 것도 모자라, 법원의 가처분명령이 이행될 때까지 하루 3,000만원의 이행강제금을 지급하라는 법원의 결정을 “조폭판결”이니 “깡패판결”이니 하면서 원색적인 비난을 서슴지 않는 그와 그가 소속한 정당, 혹은 그 주변의 뉴라이트계열 단체들의 행태는 법의 무시라는 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노동조합에의 가입여부는, 의료·건강정보나 신앙, 정치적 신념, 성생활 등과 마찬가지로 민감한 개인정보(sensitive personal information)에 해당한다. 그것은 개인의 인격을 형성하는 가장 핵심적인 것들로 그 어떤 개인정보보다 우선하여 보호된다. 변호사의 출신이나 연수원기수, 학력, 친한 법조인 등과 같이 직업정보나 이미 알려져 있는 정보들에 비견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하고도 중대한 보호가치를 가진다.

그래서 유럽 등 법선진국들에서는 하나같이 이 정보에 대해서는 아주 특별한 예외가 존재하는 경우(예컨대 생명이 위태롭다거나 중대한 공익상의 필요가 있는 경우등)를 제외하고는 그 공개는 물론 데이터를 처리하는 것조차 금지하고 있다. 그리고 설령 예외적인 상황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그 수집·처리·공개 등은 반드시 법률의 규정에 따라 하도록 한다. 이것은 법에 있어서의 상식이다. 환언하자면 조전혁 의원과 같이 입법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거나 혹은 알 수 있어야 하는 상식이다. 그가 몰랐다면 보좌관이라도 알고 있어야 하며 보좌관도 몰랐다면 그가 소속한 정당에서라도 알고 있어야 한다. 혹은 조전혁 의원이 자문을 구했다고 하는 변호사가 진정 있었다면 그 변호사는 이런 정도의 지식은 가지고 자문에 임했어야 했고 또 그러했으리라 본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조전혁 의원은 일개 법원이 어떻게 입법기관인 국회의원에게 명령을 할 수 있느냐고 다그친다. 이 또한 법에 있어서는 상식에 해당하는 언술이다. 우리 헌법재판소가 1989년 출범하여 가장 먼저 내어 놓은 결정이 국가에 대해서는 법원이 가집행선고를 할 수 없도록 한 소송촉진등에관한특례법 관련조항을 위헌이라 선언한 바 있다.

헌법재판소가 최초로 선고한 것이 바로 국가라 하더라도 법원의 판단과 그 명령에 복종하여야 한다는 판단이었던 것이다. 이 사실 또한 법에 있어서는 하나의 상식이다. 국가도 법 앞에서는 일반 국민과 다르지 않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법의 입이 되는 법관의 판결에 복종하여야 한다. 헌법재판소의 최초의 결정은 이를 달리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국가가 그렇다면 국회의원은 더더욱 예외일 수가 없다.

그럼에도 조전혁 의원은 법원의 가처분결정에 반발하며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하면서 그 결정이 날 때까지는 명단공개를 계속하겠다고 강변한다. 또 다른 법상식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입헌주의는 권력분립을 기본요소로 삼는다. 국가권력은 입법, 행정, 사법으로 분리되어 서로 견제와 균형의 원칙에 따라 정립하여야 한다는 것이 프랑스혁명 이래 근대문명이 합의한 규율이다. 이를 다른 식으로 돌려서 말하자면 어느 한 국가기관이 한 행위나 처분은 다른 국가기관에 의해서 존중되어야 한다는 원칙으로 이어진다.

입법부의 행위가 설령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일단은 그것을 존중해서 그 효력을 유지시켜야 한다는 것이 바로 법률의 합헌성추정이며 사법자제의 기본근거가 된다. 마찬가지로 법원의 판결이나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입법자나 행정관은 그 판결이 번복될 때까지는 그것을 존중해야 한다. 이것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뼈대를 이루는 권력분립론이며 근대문명이 창안해 놓은 입헌주의체제의 핵심이다. 또는 이것이 바로 정치를 업으로 삼는 국회의원들이 언제나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하는 자유민주주의의 상식이다.

문명의 상식과 야만의 폭력

국민을 범죄자로 규정하기 위해서는 그가 유죄라는 점에 대해 합리적인 의심이 들지 않을 만큼 탄탄한 증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리고 검사의 역할은 이런 증거를 확보하고 그것을 법정에 제출하여 법관과 온 국민으로 하여금 더 이상의 의심을 하지 않을 만큼 확신을 주는 데 있다. 이것이 형사사법의 상식이다.

노조가입여부와 같은 민감한 개인정보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만 법률의 근거 위에서만 수집되고 처리되고 또 공개되어야 한다. 이것은 정보화시대의 상식이다.

국가도 법원의 판결에 복종해야 하며 국회의원은 더더욱 그러하다. 이는 v. 다이시가 말하는 법의 지배(rule of law)의 두 번째 명제이자 법치국가의 상식이 된다. 더 나아가 법원의 명령에 대해 모든 국가기관은 그를 존중하고 일단은 그에 복종하여야 한다. 이것은 입헌주의의 상식이며 자유민주주의의 기본토대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검찰과 우리의 국회의원(그리고 그를 둘러싸고 있는 정당과 단체들)은 이런 사실을 굳이 외면하고자 한다. 아니 애써 부인하고 있다. 검찰은 교묘한 수완으로 탈법의 줄타기를 하는 반면 국회의원은 공공연하게 패악에 가까운 몸부림으로 이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 그 실질은 다름이 없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의 법질서는 형편없이 허물어져 내려앉는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승전국들은 독일 제3제국의 자존심이 자리한 도시 뉘른베르크에서 전범자재판을 연다. 승전국이 패전국을 규율하는 힘의 정치가 아니라, 윤리적으로 우월한 국가가 윤리적으로 열등한 국가(혹은 전범자)를 처단하는 법의 재판이 벌어진 것이다. 이런 전환을 정당화하는 가장 큰 논리는 문명이다. 문명의 이성 대 야만의 폭력 – 이 대비가 오늘날과 같은 세계체제를 존재하게 하는 기본전제를 이룬다.

하지만, 법을 업으로 삼고 있는 우리의 검찰과 국회의원은 이런 문명의 요청을 정면으로 거부한다. 인류가 몇 백년에 걸쳐 수많은 시행착오와 희생과 고통을 겪어가며 어렵게 성취한 그 상식의 길을 외면한 채 그저 손쉬운 야만의 길을 선택한다. 총체적인 무법의 시대를 이끌고 있는 것이다.

국민들의 대정부 담화문

지난 날 쇠고기 수입문제로 촉발된 촛불시위에 대해 당시 김경한 법무부장관과 원세훈 행정안전부장관은 “법과 질서를 지키기 위한 조치”를 취할 수도 있음을 담화문의 형태로 발표한 바가 있다. 하지만 이 법질서가 그들에 의해 총체적으로 무너지고 있는 이 시점에서는 국민들이 “법과 질서를 지키기 위한 조치”를 필요로 한다.

국민들이 이제 그 담화문을 그들에게 돌려줘야 할 판이 되어 버렸다: “불법과 폭력을 자제하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성숙한 자세를 보여주기를 간곡하게 당부드린다.” 제발(젠장)….

(이 글은 4월 30일 프레시안에 기고한 내용입니다.)

첨부파일: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


참여연대 NOW

실시간 활동 SNS

텔레그램 채널에 가장 빠르게 게시되고,

더 많은 채널로 소통합니다. 지금 팔로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