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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2005.11.14
  • 1202
때가 되면 계절이 바뀐다. 푸른 잎이 울긋불긋해지고, 이윽고 갈색이 되어 땅에 떨어진다. 미생물은 낙엽을 썩히고, 다시 솟아나는 푸른 잎의 양분이 된다. 이렇게 돌고 도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의 기본법칙이다. 유한한 세상에서 무한한 생명이 이어질 수 있는 것은 바로 순환 때문이다. 순환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생명도 이어질 수 없다. 그리고 순환은 떠나야 할 것이 떠나야 할 때 떠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한국 경제의 가장 큰 문제는 순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순환은 경기순환이 아니라 구조순환을 가리킨다. 생태계와 꼭 같은 것은 아니지만 경제계도 생태계와 비슷하게 순환이 이루어져야 활력을 갖게 된다. 경기순환뿐만 아니라 구조순환도 이루어져야 한다. 구조순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경기순환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성장을 이끌었던 구조가 시간이 흐르면, 오히려 성장을 억제하는 구조가 되어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는 낡은 구조의 지배 속에서 질식하고 있다.

한국 경제의 낡은 구조는 다름 아니라 재벌이라는 괴물로 대표된다. 재벌기업은 근대적 대기업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실제 운영은 전근대적 자영업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기업이다. 이런 모순적 상황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존재가 바로 재벌총수이다. 그러니까 재벌총수야말로 한국 경제를 질식상태로 몰아가고 있는 주범이다. 재벌총수는 시장에서 능력을 입증받은 경영인이 아니라 기괴한 방식으로 재벌기업을 소유하고 있는 소유자일 뿐이다. 재벌총수는 소유권을 유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결국 재벌기업을 단순한 사유물처럼 다루지 않을 수 없다. 그 결과 재벌기업의 주주와 직원들에게 막대한 손해를 입힐 뿐만 아니라 나아가 국가 경제 전체에 심각한 피해를 입힌다.

한국의 재벌기업들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두산재벌이 이런 사실을 다시 확인해주었다. 형제들에 의해 퇴출된 박용오 전회장의 투서로 시작된 ‘형제의 싸움’은 ‘미스터 쓴소리’ 박용성 회장이 사실은 ‘미스터 헛소리’이며 두산재벌이 본질적으로 100년 전에서 별로 진화하지 못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밝혀주었다. 물론 형제가 싸울 수도 있고, 헛소리를 할 수도 있고, 100년 동안 조금도 진화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책망할 수도 없거니와 징벌할 수도 없다. 그러나 법을 어기고 죄를 지은 것에 대해서는 엄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수백억원에 이르는 천문학적 금액의 돈을 빼돌려서 사적으로 유용하고, 정치인과 관료와 언론을 구워삶고, 주주와 직원에게 커다란 경제적 손해를 입히고, 국가 경제에 피해를 입힌 중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들을 용서하는 것은 그 자체로 심각한 범죄적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이런 범죄를 저지르고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는다면, 도덕적 해이의 만연과 모방범죄의 창궐을 피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전유죄 유전무죄’의 절규가 이 사회의 본질을 꿰뚫는 명언으로 여겨지는 한, 이 사회는 언제나 사상누각의 위기 속에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재벌기업이 고도성장을 이끌었고, 재벌총수가 그 선두에 있었다는 주장이 사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시대는 끝났다. 한국 경제의 성숙은 물론이고 성장을 위해서도 낡은 구조를 개혁해야 한다. 재벌총수라는 괴물을 갈 곳으로 보내야 한국 경제의 구조순환이 이루어질 수 있다. 그렇게 해야 한국 경제가 활력을 얻고 침체에서 벗어나 성숙한 성장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물론 재벌총수라고 해서 시장에서 실력을 입증받은 경영인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진정한 경영인이 되고자 한다면, 우선 재벌총수이기를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검찰에 대해 ‘검새’라는 조롱마저 쏟아지고 있다. 누가 봐도 명백한 두산재벌의 총수 집안이 저지른 흉악한 범죄에 대해 검찰이 불구속 기소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검찰은 죄를 시인하고 수사에 협조했으며, 증거인멸 및 도주의 우려가 없어서 불구속 수사를 해야 하고,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을 구속하는 것은 국익에 위배되고, 선처를 호소하는 각계의 탄원이 많다는 등의 이유를 들었다. 이 이유들은 검찰의 결정이 별 근거가 없다는 것을 확인해줄 뿐이다. 물론 중거인멸 및 도주의 우려가 없어서 불구속 수사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럴 듯해 보인다. 또한 불구속 수사의 원칙은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협조론이며 국익론이며 탄원론은 검찰이 재벌총수를 위해 불구속 수사의 원칙을 악용하고 있을 뿐이라는 의혹을 품게 한다.

이제 검찰은 재벌총수의 경호원이 되기로 작정한 것일까? 삼성재벌의 이건희 총수를 봐주기 위한 수순이라는 평가들도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이건희를 봐주자니 박용성을 봐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법을 올바로 집행해야 할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 검찰이 법을 조롱하고 있다는 의혹이 커지고 있다. 국민들이 지금은 검찰을 ‘검새’라고 조롱할 뿐이지만 이윽고 분노의 매를 들게 될 것 같다. 대통령에게도, 법무장관에게도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빠득빠득 대들던 대한민국 검찰이 아닌가? ‘검찰의 독립’을 외치며 노학자를 국가보안법으로 구속해야 한다고 우기는 대한민국 검찰이 아닌가? 이렇게 용감무쌍한 대한민국 검찰이 재벌총수 앞에서는 배부른 고양이가 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어느 것이 대한민국 검찰의 본모습인가?

검찰은 이 나라의 가장 강력한 지배자가 재벌총수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해주었다. 검찰은 ‘삼성공화국’으로 대표되는 재벌총수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다시금 생생히 확인해주었다. ‘정치검찰’에서 ‘민주검찰’로 거듭나라고 했더니, 그런 척하면서 어느 틈엔가 ‘재벌검찰’로 탈바꿈한 모양이다. 민주화와 함께 ‘정치검찰’의 문제는 조금 해결이 된 것 같다. 그러나 ‘재벌검찰’의 문제는 앞으로 더욱 악화될 듯하다. 쓸쓸한, 아니 씁쓸한 늦가을이다.

홍성태 (상지대 교수, 정책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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