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감시센터 판결/결정 2014-03-03   3034

[판결비평] 23년 만에 내려진 무죄판결

1991년 분신 자살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사회부장 김기설씨의 유서를 대신 써준 혐의(자살방조 등)로 징역 3년을 선고받은 강기훈씨가 지난 2월 13일, 23년 만에 재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습니다. 이번 [판결비평]은 바로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도 불리는 이 유서대필 사건의 무죄 판결에 대한 비평입니다.

[판결비평]은 주로 법률 전문가 층에만 국한되는 판결비평을 시민사회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어 다양한 의견을 나누고 이런 과정을 통해 법원의 판결이 더욱더 발전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마련한 자리입니다.

 

 

23년 만에 내려진 무죄판결

 

서울고등법원 제10형사부 2014년 2월 13일 2008재노20결정

재판장: 권기훈, 배석판사: 이주영, 김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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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지봉/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헌법 제27조는 “모든 국민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법원에 신속한 재판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헌법상의 기본권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신속’은 ‘공정’ 등과 함께 재판에 있어 생명과도 같다. 지체된 재판은 아무리 정당한 재판이라 할지라도 소송당사자에게는 무용지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당한 이유 없이 재판이 지체되는 것은 소송당사자에게는 씻을 수 없는 고통을 강요하는 것이 될 수 있다.

 

 

1992년 대법원의 자살방조 유죄판결 그리고 그 후

 

1991년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으로 유서대필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 피고인 강기훈씨는 노태우 정권에 항의하며 분신자살한 김기설씨의 유서를 대신 써 주었다는 혐의로 구속되고 형법상의 자살방조죄 등으로 3년의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자살의 방조’란 이미 자살을 결의한 자에게 도움을 주어 자살을 용이하게 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물질적인 것이건 정신적인 것이건, 유형적인 것이건 무형적인 것이건 불문이다.

 

스위스, 오스트리아, 일본의 형법은 우리나라의 형법처럼 자살의 방조를 처벌하고 있지만 독일은 자살방조의 처벌규정을 두고 있지 않다. 따라서 독일에서는 자살자를 돕는 일체의 행위를 처벌할 수 없게 하고 있다. 물론 종교적·윤리적으로 죄악인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이러한 자살방조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자살을 용이하게 돕는다는 방조의 고의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1992년 7월 24일 판결에서 대법원은 단순히 자살을 결심하고 있는 자의 유서를 대필해 준 정도만으로는 자살방조라고 하기 어렵지만 유서 대필 이외에 증거물인 전민련수첩, 업무일지, 메모 등을 사후에 조작·은폐하려 했다는 검찰측 주장까지 받아들이면서 자살의 방조에 해당한다고 판시했었다. 이후 강기훈씨는 3년을 복역한 후 만기출소했다.

 

그러나 2007년에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에 따라 구성된 진실·화해 위원회가 추가적인 필적 감정결과 등을 기초로 재심 등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진실규명 결정을 내리면서 다시 이 사건이 사회적 관심을 끌게 되었다. 이 후 2009년에 서울고등법원의 재심개시결정이 내려지고 2012년에 이에 대한 검찰의 재항고를 대법원이 기각하면서 이 사건에 대한 본격적인 재심 심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지난 2월 13일에 서울고법에서 재심 무죄결정이 내려지면서 23년 만에 판결이 뒤집히게 된 것이다.

 

 

자살방조죄 무죄판결의 명백한 근거

 

필자는 약 80쪽에 이르는 서울고법의 무죄판결문을 직접 읽어 보았다. 읽는 내내 강기훈씨가 동료였던 김기설씨의 자살을 방조한 파렴치범으로 몰리며 겪었을 심적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하는 생각이 내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서울고법 재판부는 우선 피고인이 유서를 대필해 주는 것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 없고 자살 현장에는 이 사건 유서만이 남겨져 있었으므로 결국 이 사건 유서의 필적이 과연 피고인의 필적인지 여부가 이 사건의 핵심쟁점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진실·화해 위원회의 추가적인 필적 감정결과 유서상의 ‘ㅎ’의 필법이나 ‘ㅆ’ ‘보’등의 필법이 피고인 강기훈씨 진술서 등의 필법과 다르다는 점, 원심에서 유죄의 주된 근거로 삼았던 국과수 수석감정인의 감정서가 속필체와 정자체로 서로 필체가 다른 문서들을 단순 비교하여 필적감정의 일반원칙에 어긋나는 감정을 한 점, 수석감정인이 당시 국과수에 재직 중이던 감정인 4명이 마치 모두 직접 감정에 참여하여 공동심의를 한 것처럼 허위의 증언을 한 점, 필적의 동일성 등에 근거해 봤을 때 업무일지나 전민련수첩이 조작되었다 하더라도 그 조작자는 적어도 피고인은 아니라는 점, 메모지 필적이 이 사건 유서의 필적과 동일한데 피고인의 필적은 이 사건 유서의 필적과 상이해 적어도 피고인은 메모지의 작성자도 아니라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유죄의 인정은 법관으로 하여금 합리적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의 확신을 가지게 하는 증명력을 가진 엄격한 증거에 의해야 한다고 하면서, 이러한 법리에 비춰 봤을 때 원심에서 유죄의 증거가 되었던 국과수 수석감정인 작성의 감정서 중 유서의 필적과 피고인의 필적이 동일하다는 부분과 유서의 필적과 분신한 김기설씨의 필적이 상이하다는 부분은 신빙성이 없고, 검사가 제출한 나머지 증거만으로는 피고인이 유서를 대필해 주어 자살을 방조했다는 공소사실이 합리적인 의심 없이 진실한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할 정도로 입증되었다고 보기에 부족하다고 하면서 자살방조 부분에서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지체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그러나 서울고검은 판결 6일 후인 지난 19일에 이 사건을 대법원에 상고했다. “과거 대법원 판결에서 유죄증거로 채택되었던 국과수 필적감정 결과의 신빙성을 재심 재판부가 배척하면서 무죄를 선고했기 때문에 다시 한 번 판단을 받아볼 필요가 있다.”는 설명이 덧붙여졌다. 원심에서 유죄의 근거가 되었던 국과수 감정결과가 그 후의 추가적인 감정결과들에 의해 뒤집어진 상황에서, 과연 검찰은 대법원에서 이 사건에 대한 판단이 달리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을까? 상고를 강행한 검찰의 태도는 여러모로 납득하기 어렵다.

 

이제 공은 대법원으로 넘어갔다. 대법원은 이 사건과 관련해 최대한 신속한 재판을 내려주어야 한다. 서울고검은 2009년 9월 서울고법의 재심개시 결정이 내려졌을 때에도 대법원에 재항고를 했었고, 대법원은 그 때도 3년이 지나도록 특별한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결정을 미루어오다가 2012년 10월 19일에야 서울고검의 재항고를 기각하고 재심개시결정을 내린 전력이 있음을 국민들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런 재판 지체가 반복되어서는 곤란하다. 간암 투병 중인 강기훈씨에게는 진실을 규명받을 시간이 별로 많이 남아있지 않을 수 있다. 그에게 신속한 재판을 받을 헌법상의 권리야말로 지금 이 순간 그 무엇보다도 절실한 권리일 수밖에 없다. 그에게 있어 지체된 정의는 그야말로 정의가 아닐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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