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감시센터 판결/결정 2015-04-16   1431

[판결비평82] 긴급조치 발령 합법 판결 ② 헌법적 불법을 응징해야 법치

 

지난 3월 26일, 대법원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긴급조치 발령에 대해 “국가배상법상 불법 행위로 볼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2013년 4월, 대법원이 “긴급조치는 위법”이라고 판시해놓고선 이번에는 “긴급조치를 발령한 것은 ‘고도의 정치행위’였기 때문에 정치적 책임은 있지만 민법상 불법행위 책임은 없다”며 자기모순적 판결을 내 놓은 것입니다.

국가 폭력의 피해자 구제의 길을 막아버린 사법부의 퇴행적 판결에 대한 지난 한상희 건국대 교수의 비평에 이어, 아주대 오동석 교수의 비평을 소개합니다.

 

 

[광장에 나온 판결] 긴급조치 발령 합법 판결 ②

 헌법적 불법을 응징해야 법치

 

 

대법원 제3부 2015.3.26.선고 2012다 48824 손해배상(기)

판사 박보영(재판장), 민일영, 김신, 권순일(주심)

 

 

오동석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오동석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실행위원

 

 

대법원은 긴급조치 제9호로 불법구금 당했던 원고의 국가배상청구를 기각했다. 유신체제 아래에서 긴급조치에 의거해 저지른 국가폭력을 법의 이름으로 정당화했다. “대통령은 국가긴급권의 행사에 관하여 원칙적으로 국민 전체에 대한 관계에서 정치적 책임을 질 뿐 국민 개개인의 권리에 대응하여 법적 의무를 지는 것은 아니므로, 대통령의 이러한 권력행사가 국민 개개인에 대한 관계에서 민사상 불법행위를 구성한다고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왕이 통치하는 군주국이 아니다. 옛날처럼 죽은 왕을 부관참시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 자식에게 연좌 책임을 묻자는 것도 아니다. 대통령직은 개인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국가의 이름으로 책임을 지우자는 것이다. 대통령이 권력을 남용해서 저지른 행위에 대해 국민 개개인이 책임을 물을 수 없다면, 대통령의 폭력은 영원히 무소불위 무책무죄란 말인가. 군주 시대도 그렇지는 않았다. 또한 긴급조치를 둘러싼 대통령과 국민 개개인의 관계는 헌법적 불법관계이다. 전형적인 민사상 불법관계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한다고 해도, 그보다 우위에 있는 ‘헌법적 불법’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말인가. 

 

 

소멸시효에 관해서도 그렇다. ‘중앙정보부 소속 공무원이 수사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긴급조치 위반으로 체포․구금한 것은 불법행위’라고 인정했다. 그렇지만 유죄판결을 받지 않았으니까 곧바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었는데, 왜 3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손해배상을 청구했느냐는 취지로 판단했다. 도대체 서슬 퍼런 독재체제 아래에서 내내 국가폭력의 공포에 시달렸던 국민의 입장을 잠시라도 생각해본 것인가. 국가가 과거의 범죄에 대해 입법적으로 청산하는 노력을 제대로 했었나. 사법부는 과거청산에 대한 조치를 제대로 취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국민들이 사법부를 신뢰할 수 있을까. 국가폭력 피해자의 트라우마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독재 시대이건 민주화 시대이건 법관의 권력은 변함이 없기에 피해자의 관점이 눈에 들어올 리 없다. 그러니 헌법보다 민법을 우선시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국가의 국가배상법리를 어떻게 불법국가의 국가폭력에 적용할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결국 대법관들의 헌법규범의식 부재라고 생각한다. 

 

 

헌법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하라고 법관에게 명령하고 있다. 그 책무에 대응하여 헌법은 법관에 대해 징계로써 파면하지 못하도록 그 신분을 보장하고 있다. 반면 유신헌법 아래에서 법관은 징계처분으로도 파면당할 수 있었다. 유신체제는 대통령이 일반 법관을 임명하도록 함으로써 권력분립의 기본조차 되어있지 않은 불법체제였다. 유신헌법이 국민의 기본권은 물론 사법권의 독립을 훼손했기에 현행 헌법은 법관의 신분을 보장한 것이다. 독재 권력에 끈질기게 저항했던 국민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법원이 응답해야 할 차례였다.

유신헌법은 법관의 신분 보장을 부정할 정도로 ‘헌법적 불법’의 전형적인 예이다. 국민의 이름을 도용한 것이었다. 사법부는 민주화에 전혀 기여하지 못했다. 권력의 시녀라는 오명을 얻었을 뿐이었다. 사법부의 과제는 과거 불법체제 아래에서의 ‘어두운 역사’를 반성함으로써 민주적인 사법부로 거듭나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사법부는 시대착오적이다. 독재 시대의 구태의연한 인식에 머물러 있다. 피해자인 국민에게 지난 일은 잊으라며 왜 이제야 손해배상을 청구했냐며 힐난한 꼴이다. 

 

 

그러나 국가폭력은 국가권력이 아니며 불법체제에서의 국가폭력행위는 소멸시효가 있을 수 없다. 대법원은 헌법적 불법을 법치주의 합법으로 바꿔치기 한 것이니 헌법을 왜곡한 것이다. 헌법은 부칙 제5조에서 “이 헌법시행 당시의 법령과 조약은 이 헌법에 위배되지 아니하는 한 그 효력을 지속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헌법에 위배되는 법은 그 효력을 인정할 수 없다는 명령이다. 이미 수명을 다한 법이라도 현행 헌법에 위배된다면 다시 법의 심판대에 세워야 한다. 국가는 헌법의 이름으로 불법적인 법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손해를 갚아야 한다. 불법에 저항한 사람들의 행위가 적법한 것임을 민주헌법의 이름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유신체제 아래에서의 사법부 과오를 조금씩 사면 받아 가는 것이다. 법치적인 자기사면의 길이다.

 

 

비록 한참 늦기는 했지만 그래도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한다. 그게 과거의 부정의를 바로잡는 것이고, 현재의 정의를 행하는 것이며, 미래의 정의를 굳건히 다지는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정의를 위해 선뜻 나서지 않을 것이다. 법치를 아무데나 가져다 붙여서는 안 된다. 국가권력을 이용해 저질러진 불법에 대해서 법치는 단호하고 냉정해야 한다. 폭력행위자들이 민주화의 과실(果實)을 따먹게 방치해서는 안 된다. 저항한 사람들의 행위를 법과 정의의 이름으로 인정해야만 과거 국가범죄는 죄 값을 치르는 것이고 국가는 교정(矯正)된다. 민주공화국이라고 헌법에 적어놓는다고 자동적으로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 되는 건 아니다. 과거 국가의 잘못을 교정해나가면서 민주공화국에 가깝게 되는 것이다.

 

 

법관이 그 직을 걸고 인권과 민주주의 그리고 헌법의 편에 서지 않는다면, 책무는 없고 특권만 남는다. 유신헌법 또는 긴급조치와 같은 ‘헌법적 불법’에 대해 단호히 맞서는 헌법적 책무가 매우 중요하다. 과거에 못했다면 이제라도 과거의 불법판결을 바로잡아야 한다. 그렇게 못한다면 그것은 국민을 두 번 배신하는 일이다. 민주헌법에 기대어 재판하지 않는 대법원은 필요 없다. 국민이 직접 선출하거나 책임을 물을 수 있게 할 것이다. 기본권 침해를 외면한다면 헌법재판소를 통해서라도 대법원판결을 통제할 것이다. 헌재가 그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헌재 또한 국민의 직접 감독과 통제 아래 둘 것이다. 사법체제를 다시 꾸릴 것이다. 국민들은 통치행위를 행할 것이다.

 

 

대법원판결은 불법적인 긴급조치를 ‘고도의 정치적 국가행위’로 왜곡시킴으로써 독재자의 폭력에 ‘사후 동조’했다. 민주공화국에서 통치행위자는 독재자가 아니라 주권자인 국민이다. 경찰 통계로 불법폭력집회․시위가 가장 많았던 해는 1987년이다. 현행 헌법의 모태가 바로 그 불법폭력집회․시위였다. ‘불법’으로써 헌법을 만들어내는 것이 고도의 정치적 행위로서 구시대 법으로 심판할 수 없는 국민의 통치행위이다. 주권자는 유신체제와의 타협 없는 단절을 명했다. 긴급조치에 의한 피해를 배상하도록 판결하는 것이 대법원의 할 일이다. 긴급조치에 대한 저항을 정당하고 적법한 것이라고 판결하는 것이 대법원의 할 일이다. 그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는 대법관은 주권자에게 항명한 것이니 헌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

 

 

 

*  [긴급조치 발령 합법 판결 ①] 역사를 유신독재 시절로 되돌린 대법원의 판단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는 최근 판결 중 사회 변화의 흐름을 반영하지 못하거나 국민의 법 감정과 괴리된 판결, 기본권과 인권보호에 기여하지 못한 판결, 또는 그와 반대로 인권수호기관으로서 위상을 정립하는데 기여한 판결을 소재로 [판결비평-광장에 나온 판결]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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