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감시센터 사법감시紙 1997-08-01   1110

[09호] 햇빛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쟁송

작은권리찾기 – 17.1

햇빛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쟁송

변호사 김호철

이 글은 현재 진행중인 사건과 관련된 것이어서 지금 게재하는 것이 편집의도와는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권리주장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국민에게 알리려는 의도에서 싣기로 하였다.

대학시절, 어느 불문학자의 유학시절을 회고한 수필의 내용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 학자분은 전쟁이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절 끼니를 거르며 어렵게 대학을 마친 후 파리유학을 갔는데, 먼저 파리에 와있던 선배들이 무조건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처음에는 사치스런 소리라고 치부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온몸의 기력이 빠져나가 현기증이 일고 정신까지 흐릿해지자 선배들의 말이 일리있는 충고였음을 깨닫고 능력 닿는데까지 음식량을 늘리고 고기도 열심히 찾아 먹으면서 겨우 기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까닭은 파리는 태양없이 비만 오락가락 하는 우기가 매우 길어 그 기간 동안은 태양이 주는 에너지를 전혀 받을 수 없어 그 부족분을 지방기 많은 음식으로라도 때우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때 "한국인은 태양을 먹고 사는 민족"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배곯던 시절, 초보적인 수준의 보건체계도 없던 척박한 시절을 건강하게 왕성한 의욕으로 부지런히 일하고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풍요로운 태양빛 덕분이었다는 것을 절감했다는 것이다.

"태양을 먹고 사는 한민족", 필자는 그 문학적 표현이 마음에 들었는데, 세월을 거듭할수록 그 문구가 지니는 환경적 의미에 더 공감을 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주위에 개발과 효율이라는 매혹적인 괴물이 나타나 햇빛을 집어 삼키고 어둠을 드리우는 일들이 종종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 어둠에서 시들어 가던 어떤 이들은 햇빛을 빼앗긴 고통을 배상해 달라고 법에 호소하였고 우리 법원은 최근에 그 호소를 어느 정도 들어주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몇 푼 돈으로 햇빛을 빼앗긴 고통이 치유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요즈음 들어서는 햇빛을 빼앗기지 않게 해달라며 법원을 찾아가 호소하는 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필자가 대리하고 있는 강남 수서지역의 한아름 아파트 주민들도 그러한 사람들 중 하나다.

그 분들은 알뜰하게 재산을 모아 비교적 훌륭한 주거환경을 지닌 강남 수서지역의 한아름아파트단지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무난한 주거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나산이라는 굴지의 종합건설주식회사가 한아름아파트 정남방에 높이 80여미터나 되는 지상 20층짜리 상가·오피스텔건물 3동을 나란히 건축하기 시작하였다. 아파트 주민들은 위 3 동의 건물이 들어설 경우, 주변 아파트를 포함한 3,700여 세대와 인근의 초 중 고 학생 4,600여명이 이용하기에도 다소 버거운 도로에 같은 회사가 곧 완공할 대형백화점을 드나드는 차량들이 채워지며 교통지옥이 생기고, 주변문화는 소비·향락적으로 변하여 주거와 교육여건이 피폐될 것이라는 걱정도 컸지만, 무엇보다도 햇빛이 들어오는 길목에 거대한 콘크리트 차단막이 서는 결과가 되어 하루종일 햇빛을 보지 못하고 살 일이 가장 걱정스럽고 두려웠다.

아파트주민들은 1년여간 허가관청인 강남구청을 비롯해서 서울시와 청와대까지 찾으며 문제해결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강남구청으로부터 아파트주민들에 대한 일조침해가 우려하던대로 심각하다는 객관적 조사결과를 얻어냈지만 그 이상은 아무런 해결책도 얻지 못하였다. 이에 아파트주민들은 참여연대 작은권리찾기운동본부를 찾았고 그곳에서 듣기에도 생소한 일조침해를 이유로 한 건축공사금지가처분신청을 법원에 제기하여 그 결정을 받는 것이 현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방법임을 전해듣고 법원에 가처분신청을 내기에 이르렀다. 아파트주민들은 그들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정도의 일조가 보장되도록 건축주가 일정 높이 이상은 건축공사를 하지 못하게 해달라는 취지의 가처분신청을 하고 있다.

이 사건의 문제점은 대략 세 가지로 정리된다. 우선 일조침해의 정도를 밝히는 감정이 필수적인데 그 감정비용이 2,000만원을 넘어서는 막대한 액수였다. 주민들이 힘을 모아 기꺼이 그 부담을 감수하여 감정은 시작되었는데, 감정기간이 최소 3개월 가량은 걸리는데다, 상대방은 그 감정결과를 문제삼아 재감정을 신청하는 등으로 시간을 끌면서 그 사이에 건축공사를 최대한 진척시켜 놓아 법원이 가처분결정을 내리는데 부담스러운 상황으로 몰고 갈 것이 예상된다. 그러한 상대방의 소송지연술이 원천적으로 차단될 수 있도록 감정이 정확하게 실시되어야 할 것이고, 그러한 감정결과를 법원이 전폭 신뢰해 주어야 하는 문제가 남는다. 다음으로, 상대방 측은 상가·오피스텔 건물이 적법하게 건축되고 있으므로 그로 인하여 아파트주민들이 일조침해를 당한다 하더라도 건축행위를 중지시키거나 예방을 구할 권리가 없다는 주장을 한다. 그러나 설사 건축법상 적법한 건축행위라 하더라도 일조침해를 이유로 건축행위를 중지시킬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는, 법리적으로나 외국의 판결례상 가능하다는데에 이론이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과거 1979. 11. 15.경에 가처분결정을 확정한 대법원 판결이 있는 외에 그 이후 가처분신청이 받아들여진 선례가 없는 상황이어서 법원이 과연 이 번 사건에서 적법한 건축행위일지라도 일조침해가 인정될 경우 건축공사를 중지하는 결정을 내려줄 것인지 쉽게 장담할 수는 없는 사정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큰 법적쟁점은 아파트주민들이 입게 될 일조침해가 사회생활상 요구되는 수인한도를 초과하는가라는 점인데, 우리 법원은 "아파트와 같은 공동주택의 경우에는 동지일을 기준으로 9시에서 15시까지 6시간중 일조시간이 2시간 이상 확보되는 경우 또는 8시에서 16시까지 사이의 8시간중 일조시간이 통틀어서 최소한 4시간 정도 확보되는 경우 수인할 수 있다고 보고 위 두가지중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아니하는 일조침해는 수인한도를 넘는다"는 판결을 내린 적이 있다(1996. 3. 29., 서울고법 제1민사부 판결 94나 11806).

피신청인인 나산측은 아파트주민들이 공존과 호양의 미덕을 외면한 채 집단적 이기심을 앞세워 가처분신청을 하는 것이라며 예의 집단이기주의론을 들고 나오고 있다. 그러나 태양을 먹어야 살아갈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태양을 빼앗아 가면서까지 돈을 거두어 들이려는 자가 외치는 집단이기주의론은 너무도 공허하다.

이제 한아름아파트주민들이 햇빛을 받고 살 권리는 법원의 결정에 의하여 지켜지게 되어 있는 바, 아무쪼록 우리 법원이 햇빛의 소중함에 대한 인식과 친환경적 인식을 바탕으로 진일보한 결정을 내려주어 한아름아파트주민들이 태양을 먹으며 살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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