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감시센터 사법개혁 2011-07-25   4563

[2011/07/20 국민참여재판 방청기③] 새로운 시작

 

이 글은 2011년 7월 20일 서울중앙지방법원(형사합의26부) 서관 417호 법정에서 열린 국민참여재판을 함께 방청한 참여연대 인턴(8기) 여러분의 방청기입니다.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는 [함께해요 국민참여재판]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배심제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나누고자 합니다. 누구나 언제든지 배심원이 될 수 있는 ‘국민참여재판‘을 지켜본 방청자들의 경험을 통해 여러분도 함께 배심원단이 되는 간접체험을 해보시길 바랍니다. 소중한 방청기를 보내주신 김지훈 님께 감사드립니다.


김지훈 (참여연대 인턴 8기)

#1.

새벽 2시 13분.
“…징역 23년을 선고합니다.”

평결 말미, 형 선고를 끝으로 약 13시간동안의 숨 막혔던 공판과정은 막을 내렸다.
피해자 유족들 중 여성분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울음을 터뜨렸고, 남성분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하나 둘 검사에게 다가가 수고했다는 인사를 전했다.
피해자 어머니의 제삿날을 정확히 2시간 13분 넘긴 시점이었다.

#2.

피해자와 피고인은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어른이 되어 부동산 투자 건으로 다시 만난 그들은 투자금을 둘러싸고 갈등을 벌였고, 결국 피고인은 피해자를 42.5cm 칼로 33번 찔러 죽였다.

쟁점은 크게 두 가지였다.

1) 범행동기

피고인 측은 투자처로의 투자금 유치 및 피해자에게서 빌린 10억의 상환에 대해 본인과 기타 가족들이 피해자로부터 ‘지속적인 육체적․정신적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유죄임은 인정하되, 양형의 감경조건인 ‘지속적 피해’를 강조한 것이다.

검사 측은 피고인이 피해자로부터 빌린 10억의 전체 상환을 모면하고자, 즉 돈을 목적으로 피해자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2) 우발 vs. 계획

피고인 측은 우발적 살인이라 단정했다. 칼은 사건 당일 낯선 이로부터 받은 전화로 심화된 불안감 때문에 호신용으로 구입했을 뿐, 살인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피고인은 당일 전화가 온 낯선 이와 피해자 간의 관계를 의심하고서, 피해자로부터 빼앗겼다가 되찾은 구겨진 아들 사진을 본 순간 우발적으로 살인을 생각했다고 했다.

검사 측은 계획적 살인이라고 보았다. 사건 당일 칼을 구입하기 위해 상점을 돌아다녔던 점, 자동차 운전석 시트 밑에 칼을 숨겼다가 꺼낸 점, 살인 직전 화장실에 들어가 심호흡을 여러 차례 했었다는 피고인의 진술, CCTV화면에 담긴 태연하면서도 담담한 피고인의 살인 모습까지 다양한 증거를 제시하였다.

피고인 측에 따르면 피고인은 길어야 6년형이었지만, 검사 측에 따르면 유기징역으로는 최대 25.5년형이고 심하게는 무기징역까지 선고할 수도 있었다.

#3.

배심원들은 겉으로 보기에 30~40대가 주를 이루었다. 성비는 남자가 조금 더 많았고, 예비배심원 1명을 포함하여 모두 10명이었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검사와 변호인은 친절한 말투와 여러 가지 도구들을 활용하여 배심원단에게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증거들을 최대한 ‘각자의 입장’에서 보여주려고 노력하였다. 배심원단을 설득해야만 피고인에게 목적한 양형 결과를 이끌어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검사 측에서 피고인에게 유리한 진술 부분을 손으로 가린 채, 불리한 부분을 배심원단에게 소개했다는 지적이 변호인으로부터 나오는 짤막한 해프닝이 생기기도 했다.

재판부는 증인 심문, 증거 제시, 피고인 심문 등 일련의 절차에서 최대한 양측에게 공정한 기회를 부여하려고 노력하였다. 석연찮은 부분들에 대해서는 직권으로 심문을 하여 배심원들에게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자 하였으며, 필요한 경우 배심원단에서 궁금한 부분을 대리하여 질문하기도 하였다.

새벽 1시 30분이 되어서야 최종 변론까지의 과정이 모두 끝났다. 그때까지 배심원들은 집중하여 검사와 피고인 측의 주장을 듣는 열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물론 개중에는 이미 마음의 결론을 내린 듯 지루한 표정으로 공판 과정을 지켜본 배심원도 하나 둘 있었다. 그러나 같이 지켜본 내가 판단하기에도 공판의 후반부, 특히 피고인 심문은 이전까지의 과정에서 주장되었던 바를 확인하는 차원에 불과하였기에 그 지루함에 십분 공감되었다.

#4.

새벽 2시. 평의 결과가 나왔다.

배심원단은 피고인의 유죄를 인정하고, 특히 계획살인 및 잔혹한 범행 수법을 인정하여 특수 가중 처벌할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또한 피해자부터의 지속적 육체적․정신적 피해를 입증할 객관적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판단, 범행동기를 양형 감경에 참작할 수 없다고 결정했다. 양형에 관해서는 최저 18년에서 최대 30년까지 다양한 형량이 제시되었으나 다수결로서 23년이 결정되었다. 재판부는 배심원단의 의견을 모두 존중하여, 평의 결과에 따라 징역 23년을 피고인에게 선고하였다.
 
1) ‘상식’의 한계는 어디?

짤막한 내 상식에 따르면, 형사재판은 크게 사실관계 판단과 적용법조 판단으로 나뉜다. 살인 사실의 유무를 판단하는 것이 전자라면, 후자는 사건에 대해 어떤 죄형에 관한 법조항을 적용할 것인지 판단하는 것이다.

국민참여재판을 보기 전까지 배심원단이 하는 역할은 단지 사실관계 판단에 그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회 일반에 통용되는 상식을 기준으로 사실관계를 판단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며, 적용법조에 관한 판단은 축적된 경험이 없다면 곤란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배심원단은 형량을 정하는 역할까지도 겸하고 있었다. 해당범죄가 살인죄임이 명백하다보니, 죄형법조 적용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형량과 관련된 부분이었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대법원에서 제시하는 양형기준을 배심원단에게 자세히 설명하며 적절한 형량을 선택할 것을 권고했다. 그리고 배심원단이 상식에 기반을 두고, 다수결로 결정한 형량에 대해 재판부는 그대로 따랐다.

국민참여재판에서 상식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어쩌면 법이라는 것이 어려운 논리나 이론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일반인들의 상식과 상통하는 것은 아닐런지 모를 일이다.
 
2) 배심원단과 ‘법감정’

공판이 진행되는 동안, 피해자 유족들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서 법정모독으로 퇴정당하기도 하였고, 신고 있던 구두를 던지기도 했으며 피해자의 죽음과 관련한 진술과 증거가 제시될 때마다 구슬프게 울음을 터뜨렸다.

검사는 최종 변론에서 피고인에 대해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유명한 말까지 곁들이며 검사는 피해자와 유족의 입장에 철저히 감정이입한 듯 보였다.

평결 결과는 징역 23년이었다. 유족들의 법감정을 조금이나마 보듬어 안은 결과였을까. 판결 확정이 나지 않은 지금, 아직은 모를 일이다.

배심원단은 피해자 측의 법감정에 대해 어느 정도 공감하였을까. 법감정은 형량을 정하는 공식적인 기준은 아니지만, 암묵적으로 고려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공정하다고 느낄 수 없는 법은 더 이상 법으로서 기능하기 힘들다. 법은 사람들 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들의 참여로 이루어지는 배심원단이 얼마만큼 국민들의 법감정을 대변할 수 있을지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5.

법정을 빠져나오며, 차가운 새벽 공기를 크게 들이마셨다.

누군가에게는 후회와 회한의 나날이 결정된 하루의 시작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결정이 내려진 하루의 시작이다.

어느 쪽이든 새로운 시작인 것만은 모두에게 공통된 사실이다.
그리고 그 시작이 우리들, 국민들의 손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 마음을 설레게 한다.
  
  
# 못다한 이야기 1.

사실 공판을 끝까지 지켜보기로 한 것은 매우 즉흥적으로 결정했다.
피해자 유족이 던진 구두에 머리를 얻어 맞았는데, (옆에 앉은 동기도 맞았다는 걸로 봐서 1타 2피이거나 구두를 두 개 던지셨을 듯) 그 후 저녁에 지하철 역으로 내려가서 지하철을 기다리다가 희한하게 구두에 맞은 곳이 아련하게 아파오더라. 문득 끝까지 결과를 보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은 느낌이 가슴 속에 차올랐고 결국 새벽이 되어서야 법정을 빠져나왔다.

# 못다한 이야기 2.

언론에서는 피해자가 30여년간 피고인을 괴롭힌 악질로 묘사되었다고 한다. 피해자의 명예가 하루빨리 회복되기를 기원한다.

# 못다한 이야기 3.

추천할 만한 영화 하나와 책 하나.

[12명의 성난 사람들] : 흑백 영화인데 배심원제도의 합리적 이성 측면을 강조한다. 검사의 주장과 증거에 따르면 명백히 살인을 저지른 한 소년 피고인에 대해 12명의 배심원들이 평의를 거치면서 유죄에 대한 ‘합리적 의심’을 하게 되고 결국 피고인의 누명을 벗긴다는 내용이다.
 
[방황하는 칼날] : 히가시노 게이고가 쓴 미스터리 소설이다. ‘법감정’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납치, 마약 사용, 강간, 살인 등 종합적 흉악범죄를 딸에게 저지른 A가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현행 소년법의 보호를 받아 죄질에 비해 너무나도 가벼운 형을 살 것에 비관한 나머지, 피해자의 아버지가 A를 직접 죽이기 위해 돌아다니는 내용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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