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감시센터 사법감시紙 1996-04-01   1077

[04호] 사법권에 대해 무감각해져버린 법조인들

2-3분만에 '처리'되는 재판

사회부 기자 초기에 잠깐 법원과 검찰청을 출입한 적이 있다. 취재할 만한 뚜렷한 사건이 없는 어느날 경험 삼아 구경삼아 난생 처음 재판하는 모습을 보러갔다. 법정을 다룬 영화나 소설 속에 나오는 검사와 변호사의 치열한 공방, 피고인과 증인들의 진술, 그 속에서 진실을 가리기 위해 심각한 모습을 하고있는 판사, 뭐 그런 것들을 예상하면서.그러나 영화들은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날 재판부는 오후 잠시동안에도 10건 가까이를 심리해야 했고 '잡범' 정도로 불려지는 그날의 피해자들은 단 2∼3분 정도 재판이라는 것을 받았다.

8년 전의 일이지만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되는 한 장면이 있다. 10대의 한 소년. 몇 백원인지 몇 천원인지 아무튼 당시 생각에 아주 적은 액수의 돈을 훔친 혐의로 기소돼 있었다. 검사는 돈을 훔쳤냐의 여부만을 짧게 물었고 그는 그렇다고 했다. 소년이 어렸기 때문에 그나마 붙여진 젊은 국선변호사는 '죄는 인정되나 초범이고 죄를 깊이 뉘우치니 선처해달라'는 상투적 말만을 앵무새처럼 반복하였다. 그게 재판부가 한 심리의 전부였다.

이후 재판결과를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무죄판결이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 소년이 왜 돈을 훔치게 됐냐는 최소한의 질문조차 하지 않은 재판이었기 때문이다. 혹시나 선량했을지도 모를 그 소년은 그렇게 전과자가 됐을 것이다.

법조인은 시민의 운명을 바꾼다

몇몇의 크고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것을 제외하면 이런 재판 광경은 일반적인 모습이라는 것을 이후에 찾아간 재판정의 모습에서 확인하였다. '왜'라는 질문이, 죄를 일으키게 된 배경이나 동기 따위가 재판에는 불필요한 것인지 아닌지는 잘 모른다. 피고가 저지른게 법조항에 걸리면 처벌하고 아니면 풀어주고, 그 행위의 정도에 따라 처벌의 수준을 조정하고, 그게 재판의 전부일까. 여전히 남아 있는 의문이다. 피고인들에게 재판은 일생일대의 대사건이지만 판사나 검사 변호사에게는 그건 일상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일상에 매몰돼 자신이 행하는 사법권의 의미조차 제대로 파악하는지 자신들의 권리와 의무에 대해 일반 직장인과 다름없이 무감각해보였다. 사법부의 무감각이 이런 '사소한' 것에서 그친다면 그나마 다행일 것이다.

권력지향적 태도는 여전-장학로사건

우리는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삼권분립이라고 배우며 성장하였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나 논쟁이 있을 수 있으며 민주주의는 그 논쟁 속에서 확대되어 왔고 의견의 차이를 존중하면서도 견제할 수 있는 삼권분립은 한 사회가 지켜야 할 정신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지 이번 장학로 청와대 제1부속실장의 뇌물수수 사건은 잘 보여준다. 국민회의가 의혹을 제기한 이후 김영삼 대통령은 신속한 수사를 '지시'했고 검찰은 보기 드물게 빠른 수사를 진행시켰으며 재빨리 마무리 하려하고 있다. 대통령이 '지시'하지 않았으면 이 명백한 권력형 범죄에 대해 검찰은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 아마 대부분의 국민들은 수사가 시작되지 않았거나 그때 서석재 씨가 실수로(?) 말한 전직대통령비자금설처럼 무혐의 정도로 처리됐을지 모른다고 생각할 것이다.

법조인의 자긍심, 사법정의에서 찾아야

우리는 여기서 대통령의 단호한 의지를 대견하게 생각해야 할까? 이런 관행들, 대통령의 지시로 수사가 시작되고 검찰의 고위간부들이 사건의 처리방향을 놓고 정치권 혹은 청와대의 눈치를 본다는 따위의 상황에 우리는 너무나 익숙해있다. 그래서 원래 그렇게 하는 것인가 하고 헷갈리기조차 한다.

판사나 변호사 검사들은 종종 법학자들의 비판섞인 분석을 '사법시험에서 떨어진 자들이 열등감에서 하는 소리'라고 폄하하는 경우를 본다. 최고의 엘리트라는 자부심에서 나온 것이겠지만 사법인들의 자부심이 발휘될 곳은 그런 곳이 아니다. '권력의 시녀'라는 그 엄청난 비하에 그들은 반응해야 하고 부끄러워 할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삼권분립, 법치라는 우리 시대 최대의 과제를 바로 세워나가는데 그 자부심은 투입돼야 한다. 박사가 되는 것이 학문의 끝이 아니고 시작이듯이 고시합격이 국민들이 부여한 사법권을 지켜나가고 법에 대해 깊이 사색하는 길의 시작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고시에 합격하기 전 당신들은 법조문만 팠지 세상과 인생을 경험할 기회는 없지 않았는가 말이다.

이정숙 (부산매일신문 기자)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


참여연대 NOW

실시간 활동 SNS

텔레그램 채널에 가장 빠르게 게시되고,

더 많은 채널로 소통합니다. 지금 팔로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