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감시센터 검찰개혁 2005-06-30   1797

‘유죄 판례’ 보다 힘센 ‘재벌 항변’

[참여연대-한겨레 공동기획] 재벌 앞 작아지는 검찰 ②검찰은 재벌 변호인?

유일반도체 전 사장 장아무개씨는 2001년 8월 서울지법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신주인수권부사채(BW)를 적정가격인 7만원보다 훨씬 낮은 2만원에 발행해 부당이득을 챙긴 혐의로 기소된 장씨는 “비상장주식은 가격을 산정할 근거가 없어 어쩔 수 없었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법원은 “시장 가격보다 턱없이 낮게 값을 매겨 특정인이 집중매수하게 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장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 부산고법은 장외에서 1주당 2만~2만5천원에 거래되는 상황에서 주당 3천원에 전환사채(CB)를 발행해 인수한 벤처기업 맥소프트뱅크 대표이사 정아무개씨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정씨는 “증여 및 상속세법에 따라 주식가액을 산정했다”며, 이를 정당한 것으로 평가한 공인회계사의 의견서까지 냈다. 하지만 법원은 “상장되지 않은 주식도 객관적 교환가치가 적정하게 반영된 정상적인 거래가 있었을 경우에는 그 거래가격을 시가로 봐야 한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일반도체 변칙증여 “유죄” 처벌 이정표

이재용씨 똑같은 편법에 기소도 않고 두둔

공정위·금감원서 고발해도 면죄부 급급

당시 법원의 이런 판결은 전환사채나 신주인수권부사채를 변칙 재산증식과 증여의 수단으로 악용해온 기업들의 관행을 처벌할 근거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됐다. 물론 이런 판결은 법리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사안에 대해 검찰이 기소를 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대상이 중소기업에서 재벌로 바뀌자 검찰의 태도는 돌변했다.

삼성에스디에스는 1999년 2월 장외시장에서 5만4천~5만7천원에 거래되던 신주인수권부사채(BW) 321만여주를 이재용·이부진씨 등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4남매와 이학수 부회장, 김인주 구조조정본부 사장에게 주당 7150원에 넘겼다. 누가 봐도 유일반도체나 맥소프트뱅크 사건과 내용이 같은 사건이다. 더구나 삼성에스디에스의 이런 행위에 대해 국세청은 “실거래 가격인 5만5천원과 이재용씨가 인수한 가격인 7150원의 차익 만큼이 ‘변칙증여’됐다”고 판단하고 이씨에게 증여세 443억원을 부과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검찰의 결론은 ‘무혐의’였다. 검찰은 불기소 이유로 △장외시장에서 거래된 물량은 퇴사직원이 보유한 극소량이기 때문에 정상적인 거래가격으로 볼 수 없고 △당시 외자유치에 어려움을 겪어 신속한 자금유치를 위해 낮은 값에 신주인수권부사채를 발행할 수 밖에 없었다는 이유를 들었다. 참여연대가 유일반도체 등에 대한 판결 뒤 재고소했지만, 검찰은 법원 판결도 무시한 채 삼성 쪽 주장을 그대로 수용했다. 검찰이 ‘재벌의 변호인’임을 자임한 꼴이다.

계열사간 부당내부거래를 통해 몸집을 불리고 비상장주식 거래로 부의 세습을 이루며 지배구조 확립을 꾀하는 것은 재벌들의 고질적인 병폐다. 금감원이나 공정위 등이 간혹 이런 행태에 제동을 걸어보고 고발을 하지만, ‘사정의 중추’라는 검찰은 ‘면죄부’를 발급하기에 바쁘다. 검찰이 수사 과정에서 재벌의 주장은 그대로 수용하고, 국세청·공정위 등 다른 행정기관은 물론 법원의 판단도 무시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비상장주식을 이용한 헐값 지분인수 논란을 일으켰던 삼성생명의 이재용씨 관련 배임 혐의 고발 사건도 검찰이 삼성 쪽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해 무혐의 처분한 대표적 사례다. 삼성생명은 99년 한빛투신 주식 등 60만주를 액면가(주당 5천원)에 한빛은행에 넘기고, 한빛은행은 삼성투신 주식 60만주를 시가보다 싼 주당 5천원에 이씨에게 넘겼다. 삼성생명이 자사 소유의 한빛투신 주식을 실제보다 낮게 평가해 한빛은행에 넘긴 덕분에, 이씨는 한빛은행이 가진 삼성 계열사 주식을 싸게 인수했다.

이에 대해 금감위는 삼성생명 임원들에게 문책경고를 했다. 공정위도 “부당지원”이라며 2억1900만원의 과징금을 물렸다. 그러나 검찰은 이 역시 무시했다. “수익이 없는 자산을 처분하는 과정에서 맞교환 논의가 있었고, 그 뒤 삼성투신 주식의 매수자로 이재용씨가 결정됐다”는 것이었다. 검찰의 이런 논리는 “수익이 없어 지분을 빨리 처분해야 하는데 매수자를 찾다 보니 이재용씨가 사게 됐다”는 삼성 쪽의 허술한 논리를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재벌에 유리한 판례 ‘들러리’

논리상 오류 있어도 불기소 근거로 제시, 정반대 판례는 무시

검찰이 재벌과 관련한 사건을 무혐의 처분하면서 내놓는 공소부제기(불기소) 이유서에는 참고했다는 판례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법원의 판단을 인용해 불기소 결정의 신뢰성을 높이려는 게 목적이다. 하지만 사건과 관련한 다양한 판례 가운데 재벌기업에 유리한 것을 주로 선택한다는 게 문제다.

검찰은 삼성생명이 1999년 자본잠식이 진행 중이던 삼성자동차에 4200억원을 무담보로 대출한 사건에 대해 비슷한 사건의 판례를 주요 근거로 들어 무혐의 처분했다. 법원이 한보철강 사건에서 “ 적자상태에서 부채비율이 높다고 하더라도 설비투자가 완성돼 사업이 본격화되는 시점에서 이익 창출이 예견되는 경우에 신용공여를 제공한다면 배임으로 보기 어렵다”며 금융기관 대표에게 무죄를 선고한 판례다. 그러나 법원의 판례 가운데는 “채무변제 능력을 상실한 자에게 대출을 해주거나, 합리적인 채권회수 조처를 취하지 않으면 배임죄가 성립된다”는 내용도 있다. 진승현씨의 창업투자회사에 600억원을 제공한 금융기관 책임자가 유죄를 선고받은 사건의 판례다.

따라서 배임 여부를 제대로 판단하려면 삼성생명이 대출을 해줄 당시 삼성자동차가 장래에 이익을 창출할 수 있을 것으로 볼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지를 꼼꼼히 따져보는 것이 중요하다.

공정위가 2001년 발표한 조사결과를 보면, 삼성자동차는 △1998년 이미 724억원의 적자를 기록해 자본잠식 상태에 있었으며 △1998년도 감사보고서에서 자사의 경영여건이 불확실하다고 스스로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돼 있다. 대출이 이뤄질 당시 삼성자동차의 사업 전망이 극히 불투명했다는 증거다. 박근용 참여연대 간사는 “공정위 조사결과에 진승현씨 사건 판례를 조합하면 삼성자동차에 대한 무담보 대출은 딱 떨어지는 배임행위가 된다”고 말했다.

검찰이 4월 삼성생명의 이재용씨 관련 배임 사건을 무혐의 처분하면서 “이씨에 대한 부당 지원을 이유로 공정위가 부과한 과징금이 법원에서 취소된 점을 고려했다”고 밝힌 것도 법리적으로 잘못된 것이라는 비판이 많다.

법원은 삼성이 공정위의 과징금 부과에 불복해 낸 소송에서 삼성 쪽의 손을 들어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주된 이유는 “이재용씨가 삼성생명의 지원행위로 상당한 경제적 이익을 제공받았다 해도, 그것만으로 곧바로 ‘공정거래 저해성’이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과징금 부과를 취소한 것이 우회매매로 이씨에게 이득을 준 사실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검찰은 법원의 이런 결정을 ‘이씨에 대한 부당지원으로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는 배임 사건을 무혐의 처리하는 주요 근거로 삼았다.

삼성전자가 삼성종합화학 주식 2천여만주를 계열사에 헐값으로 넘긴 사건도 검찰이 법원의 판단을 외면한 사례로 꼽힌다. 서울고법은 이사들의 잘못을 인정하며 소액주주들에게 120억원을 배상하도록 판결했으나, 검찰은 “형사상 배임은 ‘고의’가 인정돼야 한다”며 무혐의 처분했다.

한겨레 김태규 기자
첨부파일: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


참여연대 NOW

실시간 활동 SNS

텔레그램 채널에 가장 빠르게 게시되고,

더 많은 채널로 소통합니다. 지금 팔로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