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감시센터 사법감시紙 2000-10-01   1094

[15호] 현실은 과연 현실적인가?

영화 '공동경비구역(JSA)'

명필름의 이은씨를 따라 양수리에 있는 종합촬영소에 가서 실물 크기의 90%로 만들었다는 판문점 세트를 보았을 때 대단한 정성이라고 생각했다. 세트를 보고 나서 간 스튜디오 안에서는 촬영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스튜디오에 가보기는 처음이었는데 하필이면 끔찍이 싫어하는 검시장면이었다.

마네킹으로 만든 북한군 병사의 시체가 있었는데 맨눈으로는 실물과 구별이 안되었다. 얼마 후 이은씨에게서 시사회에 오지 않겠냐는 전화를 받았다. 최병모 변호사님께 동행을 청하였더니 역시 마음이 젊으신 분이라 흔쾌히 응하셨다.

무엇이 현실적인 것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이 마당에 주연 여배우의 모호한 역할, 충분하지 않은 미스테리 구조에 대한 불만은 접어두고, JSA의 미덕에 대하여 말하기로 하자. 잘 짜여진 시나리오, 좋은 연기, 관객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이 영화의 이례적인 성공의 원동력이 되었지만 역시 JSA의 장점은 인간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이다.

모든 인간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쉽지만 어떤 구체적인 인간을 받아들이려 할 때 마음에 걸리는 것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아름다운 여인에게 연모의 눈짓을 보내기란 얼마나 쉬운가. 영웅에게 흠모의 정을 드러내는 것은 얼마나 당연한가. 하지만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우리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적병에게, 그리고 그 적병과 용맹하게 싸우기를 바랐음에도 기껏 닭싸움을 하고 있는 아군 병사에게 따뜻한 눈길을 주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그리고 그들을 거부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도록 길들여진 관객들에게 그들을 따뜻하게 바라보아도 좋다는 것을 짧은 시간 안에 설득하기란 또한 얼마나 어려운가.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는 두 명의 북한군 병사는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는 적국의 군인일 뿐이고, 두 명의 남한군 병사는 군기 문란 행위를 한 군인들에 지나지 않는다. 현실의 법은 결코 이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고, 이들을 용서하는 행위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과연 현실적인가. 우리가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현실적이고, 이 영화가 비현실적이라면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받아들이는가.

자기 정당화의 편협함을 넘어선 인간애

군인의 태도를 규율하는 군형법, 적국에 대한 태도를 규율하는 간첩죄, 외환죄 그리고 현존하는 체제를 위협하는 세력에 대한 태도를 규정하는 국가보안법 같은 규범들은 법이 인간적인 것과는 얼마나 멀어질 수 있는가를 눈이 부시도록 명백히 보여준다. 우리는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라거나 '법은 정의의 규범'이라고 들어왔지만, 이러한 법들은 옳고 그름과 무관하게 어떤 집단의 맹목적 생존의지나 승리에 대한 강박관념이 표현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법이 도덕과 정의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그 법을 만든 사회나 조직이나 집단이 옳다는 것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서로 적대하면서 서로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두 군대와 두 나라와 두 체제 중에 어느 군대와 어느 나라와 어느 체제가 정당한가를 누가 감히 결정할 수 있는가. 히틀러를 추종한 국가사회주의자들은 마지막까지 자기 정당성에 대한 확신을 잃지 않았고, 미국의 전함을 향하여 날아간 일본 전투기들은 천황에 대한 충성심에 충만했었다. 자기가 속한 집단에 대한 확신에 찼던 그 많은 죽음들은 장렬한 것인가 아니면 개죽음인가. 그런데 불행하게도 현실은 자기가 딛고 있는 기반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회의조차 용인하지 않는다.

그 동안 남북관계를 다룬 많은 영화가 있었지만 자기 정당성에 대한 반성 없는 확신을 보이면서 차례로 실패하였다. 쉬리가 성공하였다고? 그 영화는 그저 액션영화였을 뿐이다. 자기가 속한 편의 정당성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다면 대단한 축복이다. 하지만 별로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그렇게 믿고 있다면 큰 문제다. 반대편 또한 마찬가지 방식으로 자신의 정당성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자신은 정말로 올바른데, 상대방은 어리석어서 또는 세뇌당하여 옳지 않은 것을 옳은 것으로 믿고 있다고 단정하면 서로 동의하거나 공감할 수 있는 공간은 실종된다.

낯설고 비인간적인 현실, 그리고 파멸

영화 JSA는 자신이 속한 군대와 국가와 체제를 뛰어넘어 그저 사람이 그리운 인간이기를 원했던 남과 북의 청년들이 적대하는 두 힘의 물결이 부딪혀 만들어내는 거센 소용돌이에 빠져 익사하는 이야기이다. 이 영화에서 두 군대와 두 국가와 두 이념의 어느 편도 선험적으로 정당하거나 부당한 것으로 가정되지 않는다. 단지 반대방향의 힘으로 서로 마주하고 있을 뿐이다.

공동경비구역이라는 기묘한 지점에 놓인 남과 북의 주인공들은 그들에게 강요된 이분법을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자유로이 경계를 넘는다. 그들은 인간으로 남아있어서는 안 되는 시간, 군대와 국가와 체제의 무장한 기계로 행동해야 하는 공간에서 인간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파멸하는 운명을 맛보게 된다. 그리고 그 파멸을 바라보는 우리는 한반도라는 시공간이 얼마나 낯설고 비인간적인가를 다시 한 번 경험하게 된다.

조광희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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