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감시센터 칼럼(jw) 2004-12-01   1208

<안국동窓> 누구에게도 비밀은 없다

지난 월요일 오랜만에 경찰이 크게 ‘한건’ 했다. 대학수학능력시험 당일 시험시간대의 문자메시지 2억여 건 중 숫자로만 구성된 24만8천건의 내역을 이동통신사들로부터 제출받아 수능 정답과 일치하거나 유사한 550건을 추려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신문과 방송들은 수능 부정행위가 전국적으로 이루어진 결정적 단서가 나왔다며 앞 다투어 이 사실을 보도했다. 압수수색영장까지 발부받아 조용히 진행된 수사였으니, 과학수사의 개가로 받아들인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우선 문자메시지의 내역을 경찰로 넘겨주기에 앞서, 이동통신사들이 2억여 문자메시지 중 숫자로만 구성된 24만8천건을 가려낸 과정을 생각해 보자. 문자 메시지를 추려내려면 그 내용을 살펴보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수능 시험시간대에 발신된 2억여 문자메시지의 주인 가운데 나를 포함해 어느 누구도, 이동통신사들에게 “내 문자 내용을 마음대로 열어 봐도 좋다”고 동의해준 적이 없다. 아무리 법원의 영장에 의한 수사기관의 요구가 있었다 하더라도, 사기업에 불과한 이동통신사가 가입자들에게 아무런 통보도 하지 않고 문자메시지를 직접 열어볼 권한을 갖고 있었는지 의문이다. 글자를 제외했다고 해서 당연히 면책되는 것도 아니다. 단순한 숫자의 조합에 글자보다 더 많은 의미가 담길 수 있음을 이 사건 자체가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까닭이다. 거기다가 대부분의 이동통신 가입자들은 자신들의 문자메시지가 일주일 또는 한달 단위로 보관되어 왔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우리들의 통화 내용이 그대로 녹음되었다가 언제든지 수사기관에 의해 활용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조지 오웰이 그린 ‘1984년’의 현장이다. 문자메시지라고 해서 전화통화보다 덜 보호받아도 된다는 법적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더 나아가 법원에 의해 발부된 ‘투망식’ 압수수색영장도 문제다. 강제수사를 하려면 범죄혐의와 이를 뒷받침할 구체적인 사실이 필요하다. 사생활의 비밀, 통신의 자유 등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을 정면으로 침해한 이번 수사에서 그런 최소한의 특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2억여건 또는 24만8천건의 문자메시지 주인들을 모두 용의자 또는 피의자로 본 것인지, 압수수색의 대상은 어떻게 한정했는지, 문자메시지와 범죄와의 관련성은 어떻게 입증했는지, 의문 나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휴대전화 번호들을 특정하지 않은 채 발부된 이번 압수수색영장의 경우, 단일 영장으로는 기네스북에 오르고도 남을 엽기적인 규모였다. 이런 압수수색영장이 일상화된다면 앞으로 ‘김정일’이 들어간 편지 전체, ‘공산당’이 들어간 전자우편 전체에 대해서 영장이 발부될 날도 멀지 않다. 시민 전체를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투망식 수사가 첨단기술의 도움을 받아 법원의 영장에 의해 이루어지는 현실이 그저 믿어지지 않을 뿐이다.

생각해 보면, 권위주의 정권하의 지난 수십년 동안 병영화된 이 나라에 ‘개인’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개인이 존재하지 않으니 ‘사생활’이 존재할 리 없었다. 민주화 이후에도 우리들의 이런 ‘사생활 불감증’은 치유되지 못하고 있다. 예컨대 대학마다 교수 임용절차가 끝나면, 누가 최종 경합자였는지, 누가 어떤 교수의 ‘라인’이었는지, 현장 생중계 같은 소문들이 학계에 울려 퍼진다. 심지어 나는 학생상담실적을 투명하게 만들기 위해 상담내용을 전산화하여 공동 관리하자는 교수도 만나본 적이 있다. 이런 사회이니 수사기관과 법원이 공모하여 벌인 이번 ‘한건’ 앞에서 유난히 흥분하는 내가 오히려 이상한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영장 없이 행해진 압수수색에 항의하는 민주노동당 의원들을 향해 행정자치부 장관은 “내가 형사소송법도 알아야 하냐”고 반문했다. 그런 행자부 장관이 존재하는 사생활 불감증의 나라에서 놀라운 기술발전까지 이루어지게 되면, ‘개인’은 숨을 쉴 수가 없다.

영화에서와는 달리, 이 땅 누구에게도 비밀은 없다.

* 이 칼럼은 <한겨레신문> 12월 1일자에 실린 글입니다.

김두식(한동대 교수, 사법감시센터 실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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