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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2004.03.29
  • 1342
우리가 윤리적인 문제라고 생각하는 많은 문제들이 실제로는 사실의 문제이다. 사형제도를 폐지할 것인가의 문제는 ‘사형제도를 폐지하면 흉악범죄가 더욱 늘어날 것인가’라는 사실적인 논쟁을 통해 판가름날 수도 있다. 매매춘의 현장에서 체포된 윤락녀와 손님도 오랫동안 사귀어 왔던 ‘사회통념상 연인’ 관계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무죄판결을 받는다(그 정당성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때문에 윤리적인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사실의 발견이 매우 중요해진다.

이러한 사실의 발견은 법률의 해석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며 법률가의 일이라기 보다는 구태여 전문가들을 꼽으라면 사회과학자, 자연과학자 및 역사학자들의 몫이다. 또, 사실의 다툼이 ‘피고의 차량이 횡단보도를 교통신호등이 빨간 불에 지났는가 파란 불에 지났는가’를 두 명의 상반된 증인들의 증언을 청취하여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면 법률가도 과학자도 아닌 일반인들도 그 문제의 해결을 감당해낼 수 있다. 또, 윤리적인 판단이 ‘사회통념’‘일반인의 상식’‘사회윤리’ 또는 ‘건전한 상식’‘상관행’‘일반인의 통상적인 법감정’ 등의 기준에 따라 내려진다면 이 기준들의 적용은 특정 직업군의 사람들이 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일반인들이 하는 것이 마땅하다.

배심제는 이처럼 일반인들이 할 수 있는 사실판단이나 가치판단은 일반인들에게 맡겨두자는 취지에서 출발한다. (성균관대 김성돈 교수의 표현에 따르면, “일반시민들에게 돌려주어야 할” 영역이다.) 국가주의에서 성장해 온 우리들에게는 생소한 일이지만, 자연인을 정치적 사고의 출발점으로 두는 영미계에서는 일반인들이 할 수 있는 사실판단을 특별한 사유 없이 국가가 또는 국가가 고용한 법관이 독점하는 것이 오히려 인권침해인 것이다. 배심제는 주권재민(主權在民)의 이상인 직접민주주의의 발현이면서, 사실판단 및 가치판단의 권한을 사법권력으로부터 일부 이양받아 무작위 선출된 일반인들로 분산시킴으로써 사법부 내에서의 작은 ‘견제와 균형’을 실현하고 있다. 전관예우나 유전무죄 등과 같은 사법권력 독점으로 야기된 문제들은 사라지게 된다. 배심제는 사법부 내의 ‘작은 민주주의’이다.

배심제는 12세기경 영국의 헨리2세 왕조가 주민들간의 분쟁을 주민들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 평화롭게 해결한다는 취지(참으로 기특한)에서 시작되었다. 영국에서 자리를 잡은 배심제는 몇 세기 후 부패한 왕정에 도전하였던 나폴레옹의 사상가들에 의해 개혁적인 제도로 채택되어 나폴레옹의 정복로를 따라 유럽 전역에 널리 퍼졌다. 18~9세기에는 스페인, 독일, 이탈리아, 포르투갈, 러시아를 포함하는 유럽의 대다수 국가들이 배심제를 시행하였다. 배심제는 다시 영국의 정복로를 따라 홍콩,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의 아시아 국가들 및 나이지리아, 케냐, 시에라리온 등 아프리카 국가들로 전파되었고 다시 스페인의 정복로를 따라 남미 등지에 전파되었다. 특히, 브라질은 1822년에 배심제를 시작하여 아직도 시행하고 있다. 배심제는 현재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브라질, 오스트리아, 덴마크를 포함한 세계 52개국에서 시행되고 있다(World Jury Systems,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역사 속에서 배심제는 여러 가지 도전에 처할 때마다 축소 또는 폐지 위협에 시달려왔다. 첫째는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판사 검사 변호사 등의 직업법률가들이 자신들의 시장보호를 위해‘일반인들은 공정한 판단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라는 이유로 계속해서 배심제를 폐지하거나 축소시켜왔다. 민사배심을 잃은 영국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둘째, 사회주의가 발전하면서 국가에 대한 신뢰에 바탕을 둔 사법제도에 의해 배심제의 필요성이 간과된 경우이다. 러시아의 경우 1990년대가 되어서야 다시 배심제가 시행되기 시작하였다. 셋째, 독재정권이 집권하면서 폐지되는 경우이다. 포르투갈의 경우가 그렇고 프랑스의 경우 나치(Nazi)에 의해 폐지되었다. 일반적으로 유럽에서 민주주의의 몰락은 배심제와 궤를 같이 하였다(J. Kendall Few, Trial by Jury 18, 1993).

배심제는 어느 정파로부터도 보호를 받지 못해 격동기를 거칠 때마다 시련을 겪어 왔지만 세계 곳곳에 정착하여 조용히 사법부 내의 ‘작은 민주주의’를 지켜왔다. 그 배심제 논의가 우리나라에서도 시작되고 있다. 이제 누군가 배심제를 지켜줄 때다.

<관련기사1> 시민의 사법참여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적·사회적 요구


박경신(미국변호사, 사법감시센터 실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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