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위원회 칼럼(lb) 2008-10-14   1204

<통인동窓> 비정규직에게 희망의 출구는 없는가? 시민사회에 달렸다

이병훈
(참여연대 노동사회위원회 위원장/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유난히 더웠던 여름이 지나 서늘해지는 요즘에도 기륭전자, 이랜드, KTX, 코스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장기투쟁이 계속되고 있다. 수백일, 아니 1천여일 동안 일터에서 쫓겨나 한맺힌 사연을 호소하는 노동자들의 절규가 끊이지 않으나 좀처럼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기륭전자 노조위원장이 일터로 돌아가기 위해 온몸 던져 1백일 넘는 단식을 결행하고 있건만, 회사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하다. 급기야 얼마전 기륭전자의 한 조합원은 정규직 신분으로 출근하고픈 이승의 꿈을 접고 저승길로 떠났다는 가슴 아픈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다.
 
 차별 없는 일자리, 고용불안 없는 일터를 간절히 바라는 그들의 소망은 우리 사회에서 도저히 받아들여질 수 없는 요구인가? 정규직의 반쪽 월급과 하찮은 복지조건, 언제 닥칠지 모를 계약해지의 소모품 신세, 법도 비켜가는 인권 사각지대, 대한민국 헌법의 노동권을 행사할 엄두도 못 내는 무기력한 2등시민, 그리고 모멸과 비하로 가득한 작업장 인간관계 등등,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어그러진 일상을 방치하는 우리 사회는 과연 정상적이라 할 수 있을까? 부당한 차별과 정의롭지 못한 배제로 희생되어온 존재가 다름아닌 비정규직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온전한 인격을 되찾아주려는 변화는 왜 이리도 이뤄지기 어려운지 안타깝고 한탄스럽기 그지없다.
 
비정규직의 덫에 걸린 우리 사회
 
 비정규직 노동자의 문제는 지난 10년간 언론, 방송, 토론회 그리고 각종 집회를 통해 알려질 만큼 알려졌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그 심각성을 몰라서 해법 찾기를 게을리한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임금노동자의 절반이 넘는 860만의 비정규직, 세계 어느 나라에 견주어봐도 너무나 많은 수의 그들이 우리 주위에 널려 있으니 말이다. 공장, 사무실, 영업매장 그리고 학교, 병원 등의 공공기관에서 우리의 일과 중에 쉽사리 마주치는 노동자들의 다수가 비정규직이다. 또한 ’88만원 세대’의 청년부터 한참 일할 나이에 직장에서 떠밀려나온 사오정세대, 빈약한 노후복지 때문에 일터로 나서는 고령자 그리고 대다수의 여성 노동자들에 이르기까지 성별을 불문하고 모든 세대에 걸쳐 비정규직이 넘쳐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지금 비정규직의 덫에 갇혀 허덕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비정규직의 남용과 차별로 인해 빚어지는 사회경제적 폐해가 엄중하다는 사실은 귀가 따갑도록 지적되고 있다. 2008년 3월 경제활동인구 부가조사자료를 분석한 바에 따르면, 비정규직의 평균 월급여가 고작 124만원이고, 저임금계층에 속하는 비정규직이 무려 381만명에 달하며, 법정 최저임금에 못 미치는 비정규직이 193만명에 이른다. 임금불평등도로 따질 것 같으면 선진국 중 가장 심하다는 미국보다 훨씬 높아 사회적 위화감이 날로 심각해지고 있으며, 요즘처럼 물가가 치솟는 가운데 가계수지 적자에 시달리는 가구가 30%에 이르러 가족해체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비정규직을 중심으로 저임금 하위계층의 가계형편이 이렇듯 곤궁해지니 쓸 돈이 없어 민간의 내수기반이 위축되고 경제의 지속성장에도 치명적인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비정규직의 사회경제적 폐해가 심대함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은 그저 초연하기만 하다. 기업의 사용자들은 매번 정규직의 고용 경직성과 인건비 부담을 핑계삼아 그리고 골치 아픈 노조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공공연하게 비정규직 대체인력 활용이나 외주화에 의존하는 노무관리를 고집하고 있다. 심지어 아귀(餓鬼)처럼 돈벌이에만 치중하며 ‘파리 목숨’ 비정규직의 노동인권을 무시한 채 사회보험이나 근로기준법의 제도적 보호조차 탈법과 불법으로 방기하는 악덕 사용자들의 패악을 대기업과 중소기업 그리고 민간과 공공부문 가릴 것 없이 너무도 흔하게 접하게 된다.
 
 이처럼 비정규직에 대한 사용자들의 횡포가 극에 달하고 있는데, 이에 맞서는 노동조합의 대응은 무기력하기만 하다. 10%의 조직률로 추락한 노동조합운동이 왕년의 사회적 영향력을 잃으며 초라한 신세로 전락하기도 했지만,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정규직 조합원들이 기득권 지키기에 급급한 나머지 비정규직의 ‘보호부재’ 상태를 방치하여 스스로 ‘연대성의 위기’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정규직―비정규직의 노동양극화가 고착되는 사회 추세를 따져보면, 노동조합운동이 비정규직을 포함하는 노동계층 모두의 권익 대변을 위한 목소리(voice) 역할을 하기보다는 소수 정규직 조합원의 기득권 보호에 매몰되는 독점(monopoly)의 폐단을 자초하고 있다는 따가운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엉성한 비정규직 법안조차 개악하려는 이명박정부
 
 기업들의 단기수익 경영과 노동조합의 속수무책으로 비정규직 문제가 개선될 기미 없이 악화일로로 치닫는 상황에서 국민들의 민생을 보살펴야 할 정부는 과연 무얼 하고 있는가? 국민들의 표를 얻어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정부라면 860만명의 비정규직 국민들이 겪는 고통과 시름을 덜어주는 정책을 펼쳐야 마땅하다. 그런데 파탄지경에 이른 민생경제를 살리기를 바라는 국민의 기대를 안고 출범한 이명박정부는 아예 ‘비지니스 프렌들리’의 국정기조와 ‘강부자 내각’으로 본색을 드러내며 비정규직 문제를 외면한 채 기업들과 소수의 가진 자를 위한 경제정책에 매진하고 있다. 현정부는 목숨을 내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절박한 생존투쟁을 냉담하게 무시하면서도 기업들을 위한 탈규제와 부자들을 위한 감세 및 종부세 인하정책 등을 쏟아내며 사회의 양극화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한술 더 떠, 이명박정부는 최근 기간제의 사용기간을 연장하고 파견노동 활용이 가능한 업종을 확대하려는 움직임을 드러냄으로써 친기업적 정체성을 유감없이 과시하고 있다. 현정부의 구상대로 현행 비정규직 보호법이 ‘탈규제’되는 방향으로 개정될 경우 그 규제장치가 형해화되고, 이에 더하여 친기업 정부의 심리적인 후견을 등에 업고 법시행 이후 다소 주춤하던 기업들의 비정규직 인력 활용이 다시금 자유롭게 ‘권장’되면서, 비정규직 남용과 차별의 문제현실이 더욱 심각해질 것으로 우려된다.
 
 이처럼 우리 사회의 제도화된 권력주체라 할 수 있는 기업과 정부 그리고 노동조합에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을 기대하기 힘들며, 오히려 그들이 문제의 확대 재생산에 원인을 제공하고 있는 판국이니 그만큼 비정규직의 신세는 암울하기만 하다. 노·사·정이 눈앞의 이득에 사로잡혀, 또한 생뚱맞은 ‘친부자’ 국정기조에 몰두하여 비정규직의 비참한 처지에 등을 돌리는 작금의 현실을 마주하여 그나마 그 해결의 마지막 희망을 시민사회의 정의로운 성찰능력에서 찾게 된다.
 
노·사·정의 대오각성과 협조행동을 촉구한다
 
 지난 38년 전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산화(散華)를 계기로 산업현장의 노동문제를 깨달은 지식인과 종교인 그리고 젊은 학생들이 노동시민권의 쟁취를 위해 헌신적인 재야운동을 전개했듯이, 시민사회가 이 시대 우리 사회의 가장 고질적인 문제로 떠오른 비정규직들의 절박한 노동현실을 혁파하는 새로운 재야운동을 펼쳐나가기를 간절히 고대하게 된다. 다행히도 최근에는 지난 오뉴월 뜨겁게 타올랐던 촛불운동의 작은 불씨들이 비정규직 투쟁현장으로 옮겨 동참하기 시작했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의 1만인선언에 각계각층의 시민들이 발벗고 나섰으며, 성신여대 학생들이 비정규직 청소용역 아주머니의 복직을 헌신적으로 지원하여 결국 성사시켰다는 희망어린 소식들을 접하게 된다.
 
 물론 비정규직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노동조합의 사회연대적 운동 그리고 정부의 ‘성장―분배’ 선순환정책이 제대로 펼쳐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들 노·사·정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오늘날 사회정의의 위기를 낳고 있는 비정규직 문제를 그대로 방치·악화하려 할 경우 우리 시민사회가 정의로운 구원세력으로 나서서 문제의 해결을 위한 노·사·정 주체의 대오각성과 협조행동을 끊임없이 그리고 준엄하게 촉구해야 할 것이다. 바로 지금이 비정규직의 희망 출구를 찾아 시민사회가 결연히 나설 때이다.  
 
* 이글은 10/8 창비주간논평으로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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