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위원회 산업재해 2003-06-25   2048

“내가 왜 불법체류자로 살아야하는가?”

베트남노동자 치엔의 한국살이

오늘의 요일별 칼럼은 베트남출신 이주노동자 트린 앙 치엔 씨의 한국살이다. 이주노동자가 직접 매주 목요일 기명칼럼을 쓰는 건 시민운동진영 온라인미디어 중 최초다. 그는 매주 목요일 사이버참여연대 독자들과 만난다. 3년6개월여 기간동안 한국에서 살면서 느끼는 여러 문제들을 솔직히 털어놓을 것이다. 기대하시라.

트린 앙 치엔(Trinh Anh Chien) 베트남출신 이주노동자

– 이름 : 트린 앙 치엔(Trinh Anh Chien)

– 나이 : 27세(1976년 생)

– 국적 : 베트남

– 가족관계 : 공무원으로 은퇴하신 부모님과 본인

– 학력 : 대학 중퇴(영문과 2년)

– 한국 생활 3년 6개월째

– 한국행의 동기 : 공부보다 재미있는 일을 찾아서, 넘치는 호기심과 도전정신으로 다양한 문화를 체험해보고 싶었음.

– 현 직업 : 소각로 제조공장의 용접공(외모는 양아치지만 속은 진짜 노동자)

– 취미 : 노래부르기와 언어배우기(영어와 한국어는 수준급이고 인도네시아를 따라함)

– 특기 : 기타 치고 노래부르기(*평화음악회에서 최우수상 수상)

– 성격 : 너무 솔직함, 베트남 사람 같지 않게 깍쟁이 같지만 알고 보면 속이 상당히 깊음.

– 기타사항 : ‘외국인 노동자 인권을 위한 모임’에 2년 전에 상담 받으러왔다가 현재는 발목 잡혀서 베트남 통역 자원활동을 하고 있음. 부산 베트남 공동체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음.

나는 베트남에서 온 외국인 이주노동자이고 지금은 부산에 있는 작은 소각로 제조공장에서 용접공으로 일하고 있다. 물론 나도 “현대판 노예제도”라고 불리는 산업연수생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입국했고, 한국에 오기 위해서 약 600만 원을 송출업체에 주었다는 것도 부끄럽지만 고백한다. 베트남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온 지 거의 3년6개월이 된 나는 한때 소위 말해 불법체류자였고, 현재는 8월까지 한국정부로부터 한시적으로 체류를 허용 받은 상태다.

한국인들이 일하기 꺼리는 3D 사업장에서 일하고 있는 외국인 미등록 노동자로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겪는 고충이나 산재 사망사건들을 얘기해서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 여러분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는 않다. 한국의 맵고 짠 음식과 언어의 장벽, 그 밖의 많은 사건 사고(?)들이 새로운 문화적 충격으로 4년 가까운 세월동안 내게 익숙해진 것처럼 한국에서 외국인 노동자의 삶을, 그것도 날마다 듣는 피해사례들은 여러분들에게도 이미 너무나 익숙하고 또 너무 많이 알고 있어서 지겨울 것이다.

그럼에도 나 또한 한 사람의 이주노동자로 한국에서 일하고 있기에 나의 이야기 속에 이런 문제들이 완전히 배제될 수 없고 결국 독자 여러분을 울적하게 하는 얘기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

600만원을 빌려 한국으로

초등학교 때부터 난 책읽기를 무척 좋아했다. 그 중에서도 세계일주에 관한 책을 읽으며 세계여행을 꿈꾸곤 했었다. 학교가 끝나면 한달음에 달려와 책을 읽느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이런 나를 많이 혼냈지만, 어디 아이들이 말을 듣겠는가. 시험기간이 다가와도 시험공부 대신, 아니 공부하는 척 하면서 열심히 책을 읽곤 했다. 당연히 학교성적은 오르락내리락했고 아버지는 “한번만 책 읽는 것이 눈에 띄면 책들을 다 태워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별로 겁은 나지 않았다. 아마도 걸린다고 해도 다시 화만 내고 넘어가실 것이 뻔했기 때문에. 그런데 어느 날 드디어 책을 읽다가 아버지에게 걸리고 말았다.

나의 예상과는 달리 아버지는 책을 태우는 극단적인 방법을 쓰지는 않았지만 용돈을 주시지 않고, 도서관카드를 압수하셨다. 나는 그 당시 빨리 이 사춘기가 지나가고 빨리 어른이 되었음 좋겠다고 수없이 생각했다. 빨리 어른이 돼야 돈을 많이 벌어서 내가 읽고싶은 책도 많이 사보고 가고싶은 곳도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지 않겠는가. 어린 시절 나의 꿈은 세계를 둘러보는 것이고 새로운 문화를 많이 체험하는 것이었다.

열아홉 살, 나는 드디어 어른이 되었지만 모든 상황이 내가 생각한 것과는 아주 달랐다. 나는 성공을 위해 꿈을 위해 뭘 해야할 지는 모르고 방황하다가 결국은 대학을 진학하기로 했다. 공부하는 동안 좀더 생각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한국의 젊은이들처럼 우리 베트남 젊은이들도 미래의 유망직종을 직업으로 택하고 싶은 것이 사실이다.

국제화 세계화의 시대의 물결 속에 베트남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젠 필수품이 되어버린 정보통신과 컴퓨터와 영어공부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엄청난 비용으로 외국으로 연수를 갔다왔다. 물론 이런 분야의 직업들이 미래의 유망직업인 것만은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결국은 나도 대학의 영어영문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의 길을 찾기란 정말 어려웠다.

매일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일정한 코스로 학교에 다니고 아침에 변함 없이 같은 옷을 걸치고 오늘도 어제처럼 똑같은 얼굴을 마주하고 똑같은 일을 했던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때 내 삶은 불만족스럽고 그 고통 때문에 모든 것이 대해서 불평했다. 나는 학교까지 그만두고 몸이 상할 정도로 술을 마시며 방황하였다. 그런 절망에서 빠져나가고 싶은 나에게 부모님은 한국 돈으로 600만 원을 친척들과 이웃들에게 빌려 한국에 갈 준비를 해주셨다. 당시 나는 새로운 문화를 체험해보고 싶었고 왕성한 호기심을 가졌기에 도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국은 베트남보다 기술이 발달되어 한국에서 2∼3년간 기술연수를 하고 또 베트남보다 돈도 많이 벌 수 있으니, 한국에서 배운 기술과 돈으로 귀국해서 성공할 수 있다는 완벽한 시나리오를 가지고 나는 2000년 초 산업연수생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입국했다.

스물넷 청년의 자존심

한국에 있는 나와 친구들은 베트남에서 불법적인 일을 해 본적이 없다. 우리는 법을 잘 지키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고 교육받았다. 하지만 나와 많은 친구들이 왜 불법체류자가 되어야했는지 말하고 싶다. 우리에게는 꿈이 있지만,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항상 많은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는 것 정도는 나도 잘 알고 있다. 나는 한국에 와서 주간야간 12시간씩 일하고, 공장에선 늘 먼지가 많이 났으며, 한국음식도 잘 먹을 수 없어서 위장병이 생겨 늘 말썽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당장이라도 집에 돌아가고 싶었지만, 한국에 오기 위해 빌렸던 600만원 때문에, 그리고 내 꿈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꾹 참고 일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 오기 위해 빌렸던 600만원은 작은 돈이 아니다. 내가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1년 반이나 걸렸다. “1년 반 그렇게 짧은 시간 내에서 돈을 다 갚을 수 있는데, 왜 베트남으로 돌아가지 않고 불법체류가 되었느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24살의 청년이 자존심이라던가 아니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엄성도 상실한 채, 모든 대화가 욕으로 시작해서 욕으로 끝나는 한국인 반장의 작업지시를 알아듣지 못했다고 머리를 쥐여 박혀가며 하루 12시간 이상 주야 맞교대로 중노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부모님이 보고싶고 친구들이 그리워도 꾹 참고 견뎠다. 그렇게 서럽게, 자존심의 상처까지 받아서면서 일하고 빈손으로 베트남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꼭 성공하고 싶고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호강을 시켜 드리고 싶었다.

연수생으로 일년 반동안 일하고 나니 몸이 아파서 일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공장에서 일하는 대신, 거의 매일 병원에 가야 했다. 결국 한국인 관리자는 나에게 베트남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나는 너무 겁이 나 중소기업협동중앙회(중기협)에 전화해서 집에 가기 싫다고 했다. 그러나 중기협 사람은 아프면 집에 가라고 말했다.

나는 처음에는 도망갈 생각도 없었고 베트남에서 한번도 불법적인 일을 해본 적도 없었다. 단지 3년동안 연수생으로 있다가 기술도 배우고 돈도 모아서 베트남으로 돌아가 작은 사업이라도 해볼 계획이었다. 그러나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픈 나를 돌려보내려고만 하는 회사와 중기협의 결정에 동의할 수 없어서 결국 한밤중에 기숙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어디에도 나의 상황을 호소할 곳이 없으니, 내 스스로 나의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고, 이 땅의 40만 불법체류자 중 한사람이 되어버렸다. 지금 나는 고통이 사람을 성숙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많은 고통을 겪고 난 사람만이 그러한 고통을 겪는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 수 있는 것도 알게되었다.

프레스에 팔이 잘리고

아직도 수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산재를 당하고, 심지어 죽음에까지 이르고 있다. 프레스에 팔이 잘리고, 온몸에 화상을 입기도 하고, 시체가 되어 집에 보내지기도 한다. 우리 가족들은 한국에 자식을 보내놓고 걱정이 많고 무척이나 고통받고 있다.

이것은 한국정부의 책임이다. 또한 한국인들은 미국이나 유럽처럼 잘사는 나라에서 온 외국인들 앞에서는 친절하게 보이려고 하지만, 제3세계에서 온 우리들에게는 그렇지 않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다. 작년에 월드컵과 아시안게임 성공을 위해서 한국정부는 국제사회에 한국이 경제적으로 발전한 나라, 친절하고, 좋은 나라로 보여지기를 바라고 있지만, 실제로 한국정부는 한국 경제발전을 위해 일해온 아시아출신 노동자들을 무시하고 기만하고 있다.

미국, 일본과 같은 나라에서 불법체류자로 일하고 있는 한국인 노동자들을 생각해보자. 타국에서 더 나은 삶을 위해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치는 그들을 생각해보자. 한국정부는 눈을 크게 뜨고 법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우리가 더 이상 연수생도 아니고, 불법체류자도 아니고 한국인이 꺼리는 3D업체에서 성실히 일해 한국경제 발전에 기여하고 있는 우리도 “노동자”라는 것을 인정해야 할 때다. 한국정부는 합리적인 법을 제정해서 한국인노동자와 이주노동자 모두에게 이익이 되도록 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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