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9년 05월 2019-05-01   2057

[역사] 어느 순교자의 분신, 이정순 카타리나

어느 순교자의 분신,
이정순 카타리나

 

1991년 5월 18일, 신군부 정권의 폭력으로 숨진 강경대의 노제 행렬이 광주 북구 망월동 5.18 묘역을 향해 연세대 정문을 나서던 순간이었다. 정문 맞은편 굴다리 위 철길에서 짧은 구호 소리가 들렸고, 한 여인이 불이 붙은 채 8m 아래 도로에 떨어졌다. 그녀는 바로 옆 세브란스 응급실로 옮겨졌으나 도착하자마자 숨을 거뒀다. 철길 옆 풀밭에 남겨진 체크무늬 여행 가방 속에서 유서와 가톨릭 기도문이 발견되었고, 그녀의 이름이 이정순이라는 것도 알려졌다.

 

월간 참여사회 2019년 5월호 (통권 265호)

이정순 카타리나의 생전 모습

 

네가 박승희고, 박승희가 너다

이정순의 동생 이옥자는 언니의 분신 소식을 듣고 서울로 급히 올라갔다. 그로부터 며칠 전, 서울 살던 언니 이정순이 불현듯 고향 순천을 찾았었다. 언니는 강경대 죽음에 항의하며 분신한 뒤 병상에 누워 있던 전남대 박승희를 보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리고 순천 동천이 보이는 죽도봉의 나무 아래에서 언니는 동생 옥자에게 너무 많은 젊은이들의 희생을 안타까워하며 이렇게 말했다. 

 

“박승희의 세례명도 아가다고, 너도 아가다야. 네가 박승희고, 박승희가 너다.” 

그때 동생 옥자는 아무리 그래도 분신은 이해할 수 없다고 언니에게 답했다. 그런데 언니가 몸에 불을 붙였다니, 아무리 그래도 믿을 수 없는 소식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정신없는 상경길, 잠시 들른 휴게소 화장실에서 누군가 이옥자의 남편에게 접근했다. 그는 다짜고짜 “정신이 좀 문제가 있다던데, 어때요?”라고 물었다. 남편은 그런 일 없다고 화를 내고는 아내 옥자에게 이 일을 전했다. 이옥자는 질문을 한 이가 형사였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실제로 이후 ‘운동권 학생도 노동운동을 하던 사람도 아니었는데 분신을 하다니 온전한 정신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떠돌았다. 

 

투쟁할 학교 동기도 없고, 노동조합도 있을 리 없는 그저 작은 중국집에서 평범한 요리사로 일하던 이정순은 주부 혹은 이혼녀 신분으로 강경대의 장례 소식과 함께 짤막하게 언론에 소개됐고, 빈소를 찾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고 동생 이옥자는 증언한다. 멈추지 않는 국가 폭력과 이를 꾸짖고자 했던 반복된 죽음 속에서 한 여인이 모든 것을 던졌던 그 순간은 이내 뿌리도 없이 시작된 혐오의 언어들에 파묻히고 잊혔다.

 

분노와 환난을 멈추게 하소서

순교자의 마음을 품고 동생을 마지막으로 만났던 이정순의 세례명은 ‘카타리나’였다. 맑음으로 정화를 이룬다는 뜻의 이름이었다. 1991년은 그녀가 한국 나이로 불혹이 되던 해였다. 일곱 남매 중 장녀였던 고 이정순은 순천남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버스 안내양, 가발공장 공원 등으로 일했다.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도 학원에 나가 한식, 중식, 일식 자격증까지 딴 그녀는 임진년 용띠, 그러니까 1952년 전쟁 참화 속에서 태어나 가난한 누이의 삶을 기꺼이 짊어진 사람이었다.

 

그녀의 모습은 계양구 작전동 한독산업에서 노동자 생활을 했을 당시 동료들과 함께 찍은 사진에 남아 있다. 이정순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노동을 하면서도 시 쓰기를 놓지 않았던 고귀한 마음의 소유자였다. 1991년 당시에는 서울 가락동에서 요리사 일을 했었는데, 그녀의 방에는 노트 세 권이 놓여 있었다. 그 안에는 그녀의 기도문과 시들이 빼곡했다.

 

이 땅에 사랑과 광명과 빛을 내려 주소서. 분노와 환난을 멈추게 하소서. 화해의 길로 인도하소서. 이 땅을 한마음 한뜻으로 이루어 뜻을 펼치게 하옵소서. 아멘.

 

한국 천주교에서는 매년 그녀와 그녀가 안타까이 여기던 박승희를 기리는 시간을 갖는다. 천주교 전례력으로 위령성월인 작년 11월 15일 서울 정동 작은형제회 수도원성당에서 이정순 카타리나와 박승희 아가다, 그리고 백남기 임마누엘을 포함한 스물아홉 명의 천주교 열사와 활동가를 기리는 합동추모미사가 있었다. 1996년부터 봉헌된 이 추모미사는 작년까지 23년째 이어지고 있다.

 

이옥자 아가다는 언니에 대해서는 감정의 소요 없이 이야기하다가도, 언니의 추모 사업들을 꿋꿋이 해오던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는 흐느낌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늦은 나이에 대학에 들어가 문학을 공부했다. 언니를 따라 그녀도 시를 쓴다. 누군가 언니의 묘지 앞에 가져다 놓은 천 마리의 종이학을 보고 그녀가 쓴 시는 이렇다. 

 

언니가 고귀하고 도도한 학을 

좋아하신 줄 어찌 아셨을까  고마운 사람

나는 슬픔에 젖어 울고 있었는데 

몇 날 며칠 밤 새워 접었을 어여쁜 종이학

내 마음 부끄럽고 너무 고마웠네 

언니는 어쩜 학이 되었는지 몰라

아니 어쩌면 학을 타고 다닐지 몰라

 

필자는 지난 4월 13일, 순천 성당에서 이옥자의 딸, 그러니까 이정순 조카딸의 혼배미사에 참석할 수 있었다. 그녀의 베필은 광주 시민군 출신으로 1985년 광복절에 금남로에서 분신했던 홍기일의 장조카라 했다. 그곳에 하객으로 오신 강경대의 아버지 강민조 씨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의 인연을 맺는 데 한몫했다고 말하고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안개로 유명한 순천이지만 화창한 햇볕이 두 사람의 연을 따뜻하게 비추고 있었다. 

 

월간 참여사회 2019년 5월호 (통권 265호)

2019년 4월 13일, 순천에서 열린 이정순 조카딸의 혼배미사

 


글. 권경원 다큐멘터리 <1991, 봄> 감독

<1991, 봄>은 국가의 불의에 저항한 11명의 청춘들과 유서대필, 자살방조라는 사법사상 유일무이의 죄명으로 낙인찍힌 스물일곱 청년 강기훈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


참여연대 NOW

실시간 활동 SNS

텔레그램 채널에 가장 빠르게 게시되고,

더 많은 채널로 소통합니다. 지금 팔로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