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8년 03월 2018-03-01   3268

[역사] 혁명했던 동학언니, 스물두 살 이소사

혁명했던 동학언니, 
스물두 살 이소사

 

글. 권경원 다큐멘터리 감독

독립장편 다큐멘터리 <국가에 대한 예의>를 만들었다.

 

 

혁명을 새겨 넣은 기념탑

영화 <국가에 대한 예의>의 마지막 인터뷰 촬영 장소는 정읍의 이팝나무 숲이었다.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심은 이팝나무 숲이 두르고 있던 곳은 동학농민군이 관군을 처음으로 격퇴했던 황토현 전적지로, 그 숲길을 따라 비스듬히 난 오르막길을 돌아 걸으면 동학혁명기념탑이 버티고 있는 언덕 꼭대기에 닿을 수 있었다. 1991년 강경대 공권력 타살 사건에 맞서 최초 분신한 박승희의 병상을 지켰던 선배이자 시인인 인터뷰이는 탑의 주위를 함께 돌며 그 유래를 일러주었다.

 

1963년, 이 탑이 세워지던 날 대선을 앞두고 남부의 지지를 기반 삼으며 호남의 지지가 간절했던 유력 후보가 이 자리에 섰다. 자신의 아버지가 동학접주였다는 사실을 환기하며, 동학란이라 불리던 갑오년의 일들을 동학혁명이라 고쳐 새겼다 했다. 덕분인지 그는 대선에서 1.5%의 간발의 차이로 당선되었다. 그는 그로부터 2년 전 장교 250여 명과 사병 3,500명을 몰고 한강을 건넜던 군사혁명위원장 박정희였다. 

 

역사란 기억을 새기는 동시에, 또 다른 기억을 누락하는 기록 과정이기도 하다. 동학교도와 함께 갑오혁명의 또 다른 주체인 농민의 이름은 들어가지도 못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엉망인 나라를 고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의미인 보국안민(輔國安民)의 ‘덧댈 보(輔)’가 기념탑에는 ‘지킬 보(保)’로 바뀌어 새겨졌다는 이야기가 뒤를 따랐다. 

 

동학기념탑

정읍 황토현 전적지에 세워진 동학혁명기념탑. 동학농민혁명의 구호였던 ‘제폭구민’과 ‘보국안민’이 새겨져 있다. 

 

거괴와 천녀로 불린 동학농민혁명가, 이소사

당도해야 할 시대가 오지 않았던 조선 말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은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백성을 수탈하는 부패한 관료에 맞서 ‘제폭구민’의 기치를 들었던 1차 봉기와는 달리, 자신들을 토벌하기 위해 빌린 외세를 척결하고자 ‘보국안민’의 기치를 들고 일어섰던 2차 봉기 때엔 조선의 조정이 휴전 협정을 어기고, 일본군만이 아니라 청나라까지 연합하여 동학농민군을 공격했다.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한 동학군은 한반도의 남서쪽으로 밀려 장흥의 동학군과 합류하여 3만이 넘는 대오를 이뤘다. 패배가 자명한 전투의 끝자락에 장흥 일대를 점령하고, 장흥부사 박헌양 등 장졸 96명을 전사케 한 장녕성에서 마지막 승리를 거둔다. 일본군 대대장 남소사랑(南小四郞)이 쓴 토벌기록인 ‘동학당정토약기’ 중에는 이 전투에서 “부사의 목을 내친 사람이 여인이라는 소문이 있다”는 대목이 있다. 

 

이소사라는 그녀의 이름이 최초로 발견된 것은 정부 토벌군이었던 이두황의 ‘우선봉일기’였다. 이두황이 1895년 1월 남소사랑에게 보낸 편지에는 거괴(巨魁) 체포자 이소사가 소모관에게 허벅지 살을 베이는 문초를 당해 살이 썩어 문드러지고 숨을 헐떡이는 지경에 이르러 위태하므로 나주로 호송이 불가하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녀는 다음 해 나주에 있는 일본군 감옥에서 심문 직전 옥사한 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에 관한 당시의 모든 기록은 그녀를 죽이는데 가담한 사람들에 의해 남겨졌다. 당시 일제의 신문이었던 <국민신문> 1895년 3월 5일 자에는 “동학당에 여장부가 있다. 동학당의 무리 중 한 명의 미인이 있는데 나이는 꽃다운 22세로 용모는 빼어나기가 경성지색(傾城之色)이라 하고 이름은 이소사라 한다. 오랫동안 동학도로 활동하였으며 장흥부가 불타고 함락될 때 그녀는 말 위에서 지휘를 했다고 한다.”라고 적혀있다. 

이소사

동학농민군은 집강소를 설치하고 민회를 소집하여 오지 않았던 다른 세상을 꿈꿨었지만 장흥 석대들 전투에서 보름이 넘도록 최후의 항전을 한 뒤 무참한 살육 끝에 혁명의 막을 내렸다. 최근 발견된 일본병사 쿠스노키의 『종군일지』의 기록에 의하면 장흥의 건산이라는 산등성이를 눈처럼 하얗게 가득 채운 동학농민군들에 대한 묘사가 있다. 무명옷으로 겨울 추위를 버텨가며 지는 싸움에 임하고자 했던 그들과 이소사가 지키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조일신문> 1895년 4월 7일 자에는 이소사에 대한 보다 자세한 정보가 있다. “장흥 부근의 동학도 무리에는 한 명의 여자가 있는데 추천으로 수령이 됐다. 우리 병사가 잡아서 심문을 했는데 완전히 미치광이가 됐다. 동학도가 귀신을 이야기하고 신을 말하는 것을 이용하여 천사 혹은 천녀라 칭하여 어리석은 백성을 선동했다” 이소사가 죽기 직전까지 했던 말을 동학의 21자 주문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녀가 무엇을 말했는지는 정확히 알기 힘들다. 소사라는 호명조차도 이름이 아니라 남편이 있는 여인을 높여 일컫는 호칭으로 해석될 뿐이다. 그러나 봉건질서를 베어버리고 동학농민군의 마지막 순간을 버티고 있었던 여인의 존재는 동학농민혁명 124년, 임시정부수립 99년째를 마주하는 지금 우리 역사에 대한 더 집요한 기억과 기록을 꿈꾸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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