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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년 12월
  • 2009.12.01
  • 1041



극단으로 치닫는 승자독식 사회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사람들은 솔직한 게 최고라고 말하곤 하지만, 실제로 정말 솔직하게 말하면 논란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미녀들의 수다’에 출연한 한 여대생의 ‘루저’ 발언이 가장 최근의 예다. 기준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키가 작은 남자들을 매력적으로 느끼지 않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여성들에게 공통적인 현상이다. 진화생물학의 관점에서 보면 키가 작고 몸집이 왜소한 수컷은 키가 크고 몸집이 장대한 수컷들에게 생존경쟁에서 밀려났을 확률이 높고, 물리적 힘이 약한 암컷의 성 선택은 키와 몸집이 큰 수컷을 향했을 것이다. 반대로 수컷의 경우도 자손의 번식을 위하여 가슴과 엉덩이가 크고 건강한 암컷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는 것은 오랜 진화과정의 결과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오늘날처럼 돈이나 직업이 생존경쟁의 핵심수단이 된 세상에서도 남녀 모두에게 신체적 매력은 여전히 일차적인 성 선택의 기준이고, 그런 점에서 키가 큰 남자나 가슴이 큰 여자에 대한 선호는 개인별 차이는 있다 해도 사라지지 않는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남성들의 공분은 정당한가?

그런데 왜 ‘180이 안 되는 남자는 루저’라는 여대생의 발언이 논란거리가 되고, 수많은 남자들이 그녀를 향해 십자포화를 퍼붓는가? 그것은 우리들의 삶이 진화생물학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동물’이지만 다른 동물과는 차원이 다른 정교한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살아간다. 동물의 세상에서는 여전히 생존경쟁이 거의 유일한 삶의 법칙이지만, 인간의 세상에서는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여러 ‘가치’들이 문화 속에 녹아들어 우리의 삶을 규정한다. 힘이 약하다고 해서 무시하지 않는다거나, 죄를 지었다고 해서 무조건 죽이지 않는다거나, 가난하다고 해서 투표권을 빼앗지 않는 게 옳다는 식의 인식은 오랜 세월을 통해 한 사회의 가치로 자리를 잡고 문화가 된다. 인간의 세상에서는 ‘힘’도 중요하지만 ‘정의’나 ‘평등’ 등의 가치도 소중하게 인식되는 것이다. ‘미수다’ 여대생과 제작진에 대한 질타가 정당성을 가진다면 그것이 ‘실패자’에 대한 옹호라는 고유한 인간적 가치에 기반을 둔 것일 때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루저’ 발언에 대한 남성들의 집단적 풍자와 비판의 목소리는 내게 그렇게 정당성을 가진 것으로 들리지는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껏 사적·공적영역에서 여성들의 외모를 평가하고 점수를 매기고 농담거리로 삼는 일들을 마음껏 행했던 주범들이 남자들이기 때문이다. ‘쭉쭉빵빵’, ‘절벽’, ‘껌’, ‘꿀벅지’ 등은 남자들이 오늘도 방송에서 질리도록 써먹는 단어들이고, 여자들이 불쾌감을 표시할 때면 이들을 모두 ‘페미’로 몰면서 역시 ‘못생긴 것들이 공격적’이라며 매도했던 일들은 얼마나 많았던가. 여성의 외모가 연애에서부터 취직에 이르기까지 가장 중요한 성공의 기준이 된 사회이기 때문에 ‘성형수술의 왕국’이 된 것인데도, 또 성형수술을 하는 여자들에게 가장 크게 조롱과 비판을 퍼붓는 이들 역시 한국의 남자들이다. ‘미수다’ 여대생의 ‘루저’ 발언 하나를 가지고 달려드는 남자들은 흥분하기 전에 먼저 균형감각을 키워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전근대적 비합리성으로 후퇴하는 첨단 세상

남녀의 문제를 떠나, 이번의 ‘루저’ 발언은 한국사회의 어떤 실재를 드러내는 징후로 볼 수 있다. 발언의 주인공은 ‘키는 경쟁력이고, 키 작은 남자는 경쟁력이 없다. 고로 키 작은 남자는 루저’라는 논리를 펼쳤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루저’라는 표현의 선정성이 아니라, ‘경쟁력’이라는 단어다. ‘경쟁력’이라는 단어는 오늘날 모든 남녀노소의 성공과 실패를 나누는 시금석으로 작동하는 핵심어휘가 된 것이다. 이 ‘경쟁력’을 통해 키 작은 남자는, 못 생긴 여자는, 늙은 사람은, 비정규직은, 3류 대학을 나온 사람은, 병든 사람은, 스펙을 못 갖춘 취업준비생은 일순간 ‘루저’로 전락하는 사회가 바로 우리 사회다. 경쟁력을 못 갖춘 사람에게는 어떠한 재기의 기회도 허락하지 않는 승자독식의 사회 말이다. 이러한 한국사회의 모습은 오늘날 갑자기 부각된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정점에 달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점에 달한 이 ‘경쟁력’의 힘은 급기야 ‘180 미만’에까지 이른 것이다. 최근 유행하는 ‘유전자가 달라’라는 체념 투의 말이 보여주듯, 처절한 승자독식의 사회는 ‘실력’이라는 어떤 합리성을 뛰어넘어 이제 키, 얼굴, 유전자까지도 중시되는 진화생물학의 영역에 도달했다.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근대적 합리성이 극한에 다다르자, 이제는 타고난 신체적 성질이 중시되는 중세적 비합리성으로 후퇴하는 아이러니가 생기는 것이다. ‘아버지는 뭐하시는지’가 다시금 중요한 질문이 되고 있는 것 역시 같은 계열에 놓인 문화적 현상이다. ‘경쟁력’ 없이는 무조건 ‘루저’가 될 수밖에 없는 이 첨단의 세상은 반대로 가장 동물적인 생존경쟁이 기승을 부리는, 전근대적인 비합리성이 다시 중요해진 세상이기도 하다. <매드맥스>에서부터 <칠드런 오브 맨>에 이르기까지 사이언스 픽션에 등장하는 미래의 모습이 대개 원초적 폭력이 만개하고 생물학적 성질이 차별과 분리로 이어진 공간으로 그려진다는 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대중문화를 통해 표현되는 ‘감각’은 아무리 ‘해프닝’처럼 보이는 일이라 해도 언제나 사회와 역사의 근본적인 본질을 무의식적으로 드러내는 징후인 것이다.


루저를 만드는 시스템에 저항하자

발언의 당사자를 ‘무개념’으로 만든다고 해서 ‘루저’들의 살림살이는 나아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징후를 읽어내고 그 과정을 통해 본질을 성찰함으로써 결국에는 보편성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루저’라는 표현에 분개하는 일은 ‘찌질’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우리 대부분을 어떤 방식으로든 ‘루저’로 만들고 있는 시스템의 문제를 짚어내고 이에 대해 저항하게 될 때 그 순간 ‘댓글질’은 ‘정치’로 탈바꿈한다. 랑시에르의 말처럼 정치란 기존에 틀 지워진 어떤 새로운 틀로 재구성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감각의 장치인 문화야말로 가장 근본적인 정치가 시작되는 공간이다. ‘루저’ 논란이 그저 ‘논란’에 그치지 않도록 하는 일, 이를 ‘보편적인 노래’로 다시 문제화하는 일, 이것이 대중문화의 정치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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