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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년 12월
  • 2009.12.01
  • 970



일상을 깨뜨리는 휴식, 새로운 시작


고진하
「참여사회」편집위원

엄마. 빵에 개미 있다!”
주말 오후, 늦은 아침을 먹고 살살 출출해질 즈음 먹다둔 빵을 꺼내 무심코 한 입 베어 문 순간 빵을 나눠받은
큰애가 외친다. 깜짝 놀라 들여다보니 개미들이 제 딴엔 황급히 줄행랑을 치는 장면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면 방금 내 입에 들어간 빵 조각에도? 아니라고 누가 단언할 수 있으랴.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평소보다 시큼한 맛이
혀끝에서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퉤퉤’ 뱉어버릴까 하다가 어차피 이미 입에 들어간 것 눈 딱 감고 삼켜버린다.
“여기선 다이어트가 저절로 되겠어요. 개미를 살펴가며 먹어야 하니까 빨리 먹을 수가 없잖아요.
꼭 물에 나뭇잎 띄워서 주는 것 같아요.”
안 그래도 평소에 동작이 느린 아이. 음식 접시가 앞에 놓이는 순간 허겁지겁 정신없이 입에 밀어 넣는 먹성 좋은
둘째와 달리 특히 먹는 일에서 느긋한 큰애, 좋은 핑계거리 생겼다. 어려서부터 밥 먹을 땐 딴 짓 하지 말고
딴 생각 하지 말고 음식에 집중하면서 천천히 꼭꼭 씹어 먹으라고 가르쳤더니, 그게 몸 건강 정신 건강에 다 좋다고
가르쳤더니 밥상머리 교육이 제대로 몸에 뱄다. 점심시간 학교 식당에서 친구들 다 먹고 떠나도 혼자 남아 꿋꿋하게
식사를 마친다고 들었다. 지각을 앞둔 바쁜 등교 시간에도 지금 출발하지 않으면 차 놓친다고 옆에서 재촉하는
엄마를 단 한마디로 침묵시킨다.
“나는 지금 내 식으로 아침 식사를 즐기고 있는 중이라고요.”
‘기집애, 느긋하게 즐기려면 좀 일찍 일어나든가…하기야 먹을 때는 개도 건드리지 않는단 말이 있지…다 먹고 살려고
하는 짓인데…잘 먹은 귀신은 때깔도 곱다는 말도 있잖아…누굴 닮아서 저렇게 느긋한지…하긴 그것도 중요한 능력이다.
나는 하고 싶어도 그렇게 못하는데….’ 하고 그저 눈을 흘기고 만다. 아이는 어른들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고 있을
뿐이다. 융통성 없다고 답답하게 여기는 건 어른들의 편의주의 탓이지, 아이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사실 나 자신 그렇게 느긋한 성격이 못되어서 겉으로는
여유 있게 보여도 속으론 동동거리고 있는 자신을 자주
발견하곤 한다. 다른 사람들처럼 날마다 출근을 하나.
살림을 본격적으로 하나, 이렇게 한가로운 필리핀
생활에서도 서너 시간 쉬지 않고 집안 일을 하고는
파김치가 되는 날들이 있다. 반찬 만들다 보면 간식거리
생각나고, 간식 만들고 있으면 빨래감 떠오르고,
머릿속에서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일거리가 숨을
돌리지 못하게 만든다. 잠깐이라도 쉬어가며 하면 될 것을,
자신을 미련스럽게 몰아붙이고 나서는 힘들다고 짜증 낸다.
그런 내 꼴을 보면 누가 시키기라도 했나
어이없고 우습다.
오늘 이런 저런 일들을 해야 한다는 것은
내게는 개인적인 의견이 아니라 최소한 사실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내가 읽고 있는 심리학 책에선 그게 아니란다. 그것도 생각일 뿐이란다. 그 생각이 진실이라고 믿으면 그것이 그 사람의 현실이 되는 것이란다.
그것을 하나의 생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여유가 생겨나서 무리하지 않고 즐겁게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게 정말로 내 생각일 뿐인 것일까? 하기야 보편타당한 진리라면 모든 사람이 다 나같은 상황에서 나처럼 행동해야 하는데
과연 그럴까? 적어도 여기 필리핀 사람들이라면 그러지 않을 것 같다. 여기 사람들 정말 쉬엄쉬엄, 느릿느릿, 살살 일한다.
우리 옆 건물 옥상 공사를 한 달 가까이 하는 것을 보았다. 한국 사람들에게 맡겼으면 일주일이면 손 털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 사람들처럼 모든 일을 전쟁하듯, 사생결단하듯 덤빈다면 더운 나라 사람들 심장마비 걸려 죽을지 모를 일이다.
여기 사람들 게을러 보여도 가만히 보면 놀 것 다 놀고, 할 것 다 해가며 산다. 기념일, 휴일, 축제 같은 것도 빠뜨리지 않고
챙겨먹는다. 알차게 산다. 그러니 경제적으로는 더 잘 사는 한국 사람들보다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적고 행복감도 높은 것 같다.
가난해도 마음은 여유가 있다. 그러니까 ‘난, 왜 이렇게 늘 바쁘지?’ 했던 나의 현실은 나의 생각의 창조물인 것이다.
바로 그런 나의 생각이 가장 한가로울 수 있는 때에도 한가하지 못한 나의 현실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렇지만 느리게 사는 것, 아무리 마음속으로 염불을 해도 억지로는 안 되는 것 같다. 한 걸음 양보하여 ‘느리게’가 아니라
‘느긋하게’라고 자기최면을 걸어보아도 잘 안 된다. 사람마다 타고난 기질이 다르고, 살아온 방식과 처한 여건이 다른데,
마음먹는다고 갑자기 그렇게 살아지겠는가. 그렇지만 이런 성찰이 있다면 변화가 조금은 수월해질 것이다.
사실 전에는 어떤 일에 집중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들이 싫었지만, 지금은 고정된 자세와 기분을 바꿔주는 휴식시간으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
‘잠깐의 휴식시간’을 뜻하는 영어 단어 ‘break’는 그 첫 번째 뜻이 ‘깨뜨리다’이다. 휴식은 깨뜨림을 전제로 한다.
멈출 줄 아는 여유와 깨뜨리는 결단이 요구된다. 그러나 break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왜 휴식을 break라고 했을까’ 하는
호기심에 사전을 찾아보니 ‘(계획, 활동, 운동 따위를) 시작하다’라는 뜻도 있다. 파괴와 창조의 신 시바처럼 중단과
시작을 한 팔에 끌어안고 있는 것이 break인 것이다. 적절한 때에, 잘 깨뜨릴 수 있어야 좋은 새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12월은 그러기에 좋은 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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