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9년 11월 2009-11-01   1351

아주 특별한 만남_백승덕 회원



나와 우리 모두의
모두스 디벤디Modus Vivendi를 찾아서


이경휴 수필가, 참여연대 자원활동가


구름은 바람과 함께라야 자유롭고
비는 떨어질 때라야 자유롭고,
물은 서로 모여 낮은 곳으로 흐를 때라야 비로소 자유롭다.
웬들베리Wendell Berry 1934- 미국/ 생태학자


벌써 11월이다. 시인 오세영은 ‘벌써’ 라는 말이 2월처럼 잘 어울리는 달이 없다고 읊었다. 하지만 11월 또한 그 못지않다. 계절은 가을에서 겨울로 치달으며 한해의 끝자락을 펼쳐낸다. 안타까움·반성·후회·회한·성찰… 이런 어휘들을 나열하며 비감하리만큼 아름다운 가을의 잔영에 넋을 잃는다. 벌써 또 한해가 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달이 미틈달- 11월이다. 자연 현상에 시작과 끝이 어디 있으랴 만은 2월이 시작이라면 11월은 끝이다.

이 가을날, 시작과 끝이 함께 만났다. 참여연대 근방의 한 밥집에서 ‘상식화 된 삶’에 저항을 시작한 한 청년을 마주했다. 지난 9월,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언한 백승덕(26세)회원. 맑은 피부에 영민한 눈빛, 부처님 귀를 닮은 귓밥이 부드러운 인상을 자아냈다. 게다가 동안童顔이기까지 하니 풋풋한 향내가 설렘으로 이어졌다. 맛깔스런 음식을 앞두고도 사람에 대한 호감이 식욕을 밀쳐냈다. 공식화된 인터뷰의 첫 질문인 회원 가입 동기보다도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소신 발언으로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우리는 쓰고 버리는 일회용품이 아니다”

이미 여러 매체를 통해 자신의 신념을 밝힌 바가 있지만 병역거부의 길로 들어선 이유와 배경을 물었다.

“한국의 국가 권력은 가진 자들의 이익에만 봉사하는 편협한 권력입니다. 저는 이미 상식화된 국가 권력의 횡포와 탄압에 저항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병역거부를 택했습니다. 물론 앞으로의 길이 평탄치만은 않겠지만 제 신념대로 살려고 합니다. 부모님을 설득하고 이해시키기가 조금 어려웠지만 이젠 지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제 생각을 인정해주십니다. 이런 저항에 힘을 실어준 이가 여자친구입니다. 참여연대 회원이고 평화운동을 하는 친구라 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지금도 ‘병역거부자 곰곰 후원회(http://club.cyworld.com/gomgoem)’를 만들어 제 활동을 돕고 있습니다.”

가시밭길을 비단길로 인도하는 사랑의 힘, 그것이 세상을 움직이는 동력이 아닐까. 그 사랑이란 연대를 밑절미로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는 이들의 믿음이지 싶다.

그는 입영일(2009년 9월 7일)에 맞춰 병무청에 병역거부의사를 밝혔고, 9일에는 병역거부선언 기자회견을 했다. 소견서의 내용 일부를 옮겨보면 그의 신념을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의 국가권력은 탄압하며 늘 이렇게 변명합니다. 우리는 전시상황이다. 전시상황이라면 위기라면 응당 대치와 경쟁을 완화해가려는 노력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현 국가권력은 대치와 경쟁을 더욱 부추기고만 있다는 것이 통탄할 일입니다(중략)…언제나 위기를 변명삼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를 탄압하는 데에만 열심인 국가권력의 모순을 고발하고자 병역거부를 선택했습니다. 이 저항을 통해 의무와 순응 그리고 동원을 당연시하는 국가의 성찰을 요구하고자 합니다(중략)… 우리는 쓰고 버리는 일회용이 아니다! 라고 외치고자 합니다…”

그의 인생은 법원 판결이 나기 전까지 유보된 상태이다. 그러나 짐작컨대 10월 말쯤 1년 6개월의 실형을 살게 된다. 그 후에는 전과자라는 낙인이 찍힌 채 세상과 맞서야 한다.

종교적 신념이나 평화운동을 하는 이들의 요구로 한때는 대체복무제에 대한 논의가 활발했다. 때문에 2007년 9월 국방부에서는 2009년부터 대체복무제를 시행할 방침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국민의 정서에 맞지 않다는 표면적 이유를 내세워 전면 백지화해버렸다. 역주행하는 정책이 어디 하나 둘이랴 만은 이 또한 마찬가지이다. 어떤 신념을 가졌기에 꿈쩍도 않는 거대한 권력에 맞서 “우리는 일회용이 아니”라고 외칠 수 있었을까, 궁금했다.


‘예수의 눈’에 대해 공부하며 세상에 눈 떠

“중 2때 아버지 사업이 부도나서 삶이 뿌리째 뽑혀버렸어요. 우리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연대보증으로 묶인 친척들의 삶도 풍비박산이 났죠. 국가는 고통분담을 외치며 대기업들의 손만 잡아주었고, 해고된 노동자나 영세자영업자들에겐 희생만을 강요했습니다. 그때는 개인적인 성공만이 이 수렁을 벗어나는 길이고, 대학 입학이 그 지름길이라 여겼죠. 그런데 대학에서 가톨릭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예수의 눈’에 대해 공부하고 토론하며 세상을 보는 눈을 뜨게 되었죠. 그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억압, 모순, 횡포, 탄압뿐이었습니다. 믿음이 강했던 어머니 또한 종교로 위로 받지 못하고 성당 밖으로 나와 버렸죠. 종교란 힘의 불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그래도 용산참사 현장 같은 곳에는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그 역할을 충실히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제가 존경하는 나승구 신부님 같은 분들이시죠.”



밝았던 얼굴에 어느새 깊은 그늘이 드리웠다.

“라틴어로 모두스 디벤디Modus Vivendi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을 의미하지요. 자신의 삶을 오롯이 예수에 맞춰 살아가는 게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라고 배웠어요. 그런데 자본주의는 소비만을, 국가는 동원과 의무만을 국민의 정체성으로 요구합니다. 이런 때 과연 모두스 디벤디란 무엇인가? 깊이 성찰하며 그것을 알아가는 과정이 신념을 지키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아무리 혼탁한 세상이라 해도 묵묵히 그 자리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내는 이들이 있다. 높은 관을 쓰고 자신을 드러내기 좋아하는 종교지도자들도 있지만, 낮은 곳에서 함께 비를 맞고 서있는 성직자들도 많다. 지금도 용산참사 현장에서는 ‘저 위에 계시는 예수님’이 아닌 ‘내 안의 예수님’을 따르며, ‘교리’보다는 ‘깨달음’을 중심에 두고 어두운 현실을 고발하는 예언자적 성직자가 정의를 위해 싸우고 있다.

미국의 시인, 웬들 베리가 현대산업문명을 철거문명이라고 비판한 것은 새겨봄직하다. 무자비한 자본주의에 맞설 가장 급진적인 저항이 바로 자기 집을 떠나지 않는 것이니 어찌 그들의 저항에 냉담할 수 있으랴. 저항은 살아있음을 알리는 생명체의 몸짓이다. 용산참사의 유가족이 바로 내 이웃이요, 내가 될 수도 있다. 모두스 디벤디는 종교를 초월한 이 시대 우리 모두의 화두가 아닐까.



현실 정치에 참여하는 20대로서 다양한 활동 펼쳐

 드디어 참여연대 회원 자리로 화제가 돌아왔다. 회원 가입 동기부터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참여연대 인턴 2기로 발을 들여놓았지요. 2기는 시민운동현장체험이 주요 과제였어요. 그 당시 저는 가톨릭대학생연합회 활동을 하면서 내부적인 갈등으로 힘이 빠져있었어요. 슬럼프랄까? 의욕이 나지 않았죠. 그런데 여자친구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인턴참가를 권했어요. 시민단체라는 더 넓은 세상을 체험하자며 팔을 끌었어요,”

그늘졌던 얼굴에 청명한 가을 햇살이 한 줌 내려앉았다. 지기지우知己之友(자기의 속마음을 참되게 알아주는 친구)란 이를 두고 하는 옛말이리라. 교육기간 내내 새로운 상상력과 활기가 솟았고, 캠퍼스를 넘어선 딴 세상을 경험했다고 한다. 당연히 교육이 끝나고는 회원 가입을 했다며 활짝 웃었다.
 
의미 있고 인상에 남는 교육활동이 있었다면 무엇인지를 질문하자 단숨에

“입법 청원이었죠. 우리 팀에서는 흡연규제에 관한 법안을 만들어 노회찬 의원실을 방문했어요. 그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서울시에서는 이제는 버스정류장에서도 흡연을 규제 하고 있잖아요. 이걸 보면서 입법과정이 책임감 있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걸 실감했어요.”

자랑스럽게 말하는 어투가 동심원 다섯 개를 받은 초등학생이다. 짓궂은 마음이 들어 20대의 약점을 찔러보았다. 그럼 어째서 현실 정치에 무관심 하느냐고. 즉답이 나왔다.

“우리 20대에게 제 몫도, 책임 있는 자리도 주지 않으면서 투표율이 낮다고 탓할 수만은 없죠.”

찬물 한바가지를 뒤집어 쓴 꼴이 되어버렸지만 책임 있는 그 답변이 호기로웠다.

올해 초, 전경련은 대졸 신입사원의 임금을 삭감하여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해괴한 발표를 했다. 공공기관과 공기업의 고용을 보장하고 장려하여 민간기업의 구조조정 충격을 완충해야 하는 게 정부의 역할이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구조조정의 압박으로 기업은 ‘꿩 먹고 알 먹는’ 방안을 내놓았다.

신입사원의 임금을 삭감해 우수한 인력을 싼 값에 부리고, 정규직 채용보다는 잠재적 실업자인 인턴사원만 뽑아 구색만 갖췄다. 정부와 기업의 합작 꼼수로 일자리 쪼개기가 일자리 창출로 둔갑했다. 최대의 피해자인 20대들에겐 결집된 자리도 조직도 없으니 88만 원 세대가 될 수밖에 없다. 현실의 벽을 넘기 위해선 참여와 연대의 길 밖에 없다는 걸 그들이 모를 리 없건만 취업이라는 ‘발등에 떨어진 불끄기’가 일순위라서 그런가, 사회 참여율은 여전히 저조해 보인다. 인터뷰 분위기가 잔뜩 흐려지자 그가 나서서 반대 경우를 얘기한다.

“학교에서 청소용역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려고 하는데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저희들을 찾아왔어요. 우리가 함께 머리를 맞대어 조직을 만들었죠. 덕분에 체불임금도 돌려받고,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노동자도 노조에 가입을 할 수 있었답니다.”

머리에만 있었던 지식이 가슴과 발로 이어진 대장정이었다. 그 순간을 함께했던 양 뜨거운 박수를 쳤다.


이미 상식화된 문제들을 공부하고 싶어

마무리로 접어들면서 참여연대에 대한 애정 어린 비판을 부탁했다.

“참여연대는 한국에서 대표적인 시민단체이고 회원도 적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곳이 시민운동의 허브로 작동해 많은 시민운동에 희망을 주었으면 합니다. 작은 시민운동까지도 아울러 큰 모자이크 그림을 완성해가면서 다른 시민단체들에게 계속 영향을 주는 시민운동의 버팀목이 되었으면 합니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 더 많은 시민운동과 시민이 함께 갈 수 있는 참여연대가 되었으면 합니다. 너무 원론적인 이야기인가요?”

모범답안을 꿰뚫고 있는 듯한 답변에 반문까지 하니 웃음이 새어 나온다. 보충 설명이 이어진다.

“‘교회 밖의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요? 참여연대 활동가처럼 아는 바를 실천하고 끊임없이 약자와 연대하는 이가 곧 교회 밖의 그리스도인이죠.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곳이 시민단체라 생각합니다.”

저잣거리에서 부처가 난다는 진리를 그는 일찌감치 깨닫고 있었다. 자리를 정리하며 출소 후 순탄하지 않을 그의 진로가 염려되어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공부를 계속 하고 싶어요. 영리 기업이나 공기업 취업은 어려울 것이고 또한 그런 곳엔 뜻도 없어요. 정치철학, 민주주의 이론에 대한 책을 읽으며 우리 사회에서 상식화된 문제에 대해 공부하며, ‘상식 지도’ 같은 걸 만들고 싶어요. 그러려면 개화기 이전부터 파고들어야 하니 일거리는 엄청 많은 셈이죠.”

희망을 ‘오늘을 힘겨워 하는 사람들이 그 앞에 다가서는 창’이라고 얘기했던 글이 언뜻 떠올랐다. 그는 창에 다가서서는 이내 그 창을 활짝 열어 젖혔다. 이미 공고해져버린 사회제도를 작은 몸짓으로 밀어 본다. 별 다른 반응이 없더라도 그는 그 몸짓을 멈추지 않은 채 사회로 한 발씩 나아갈 것이다. 자기自己의 이유理由로 걸어가는 자유自由를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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