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9년 07월 2009-07-01   823

젊은 기자에게 언론의 길을 묻다_기자는 홀로 역사를 선도할 수 없다




기자는 홀로 역사를 선도할 수 없다



웰시코기 기자

생활인으로서의 기자 vs. ‘이상적’ 열혈 기자  나는 직업 화가나 피아니스트들이 예술적 성취감으로 충만한 삶을 살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그들이 나보다 멋있어 보일 수는 있지만, 일은 일일 뿐이다. 물론 단순히 돈 때문에 이를 악물고 싫은 일을 하는 사람들도 많긴 하지만, 어느 정도 자신의 ‘의지’로 직업을 선택한 사람이라면 비슷한 수준의 성취감을 느낄 것이다.

기자도 기사를 써서 돈을 번다. 기사 작성을 ‘일’로 받아들이며 산다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모든 기자들은 정의감에 불타오를 것처럼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그리고 이 사실을 본인이 직접 기자가 된 후에나 깨닫게 된다. 밀착 취재하는 분야가 있으며 기사를 위해 하루 24시간이라도 바칠 것 같은 열혈 기자는 영화 속에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기사가 사회적 약자들에게 어떤 상처가 될지 곰곰이 생각하며 느긋하게 기사를 쓸 환경도 못 된다.

지나치게 냉소적인 시각일 수도 있다. 소위 ‘언론고시생’ 때의 상상과 지금의 현실 사이에 괴리가 큰 탓이기도 하다. 사실 본인만 해도 언론사 입사 전에는 ‘열혈 기자상’을 품고 있었다. 모든 문제에 확고한 입장을 가지며, 본 적도 없는 사회적 약자의 이익을 무조건 대변해야 하는 걸로 알고 있었다. 이제는 온라인 언론고시 카페에서 이런 기자상을 주장하는 언론인 지망생들을 보면 ‘어휴, 저 꼬꼬마들….’ 그저 재미있을 뿐이다.
 
기자는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쓴다  이렇게 길게 ‘생활인으로서의 기자’에 대해 설명한 이유는, 기자에게 너무 큰 기대를 갖는 사회에도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물론 기자에게 새롭고 유용한 소식을 물어 나르라는 요구는 아무리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기자는 예수나 부처가 아니다. 기자가 언제나 이치에 맞고 100년이 지난 후에도 고개를 끄덕일 만한 이야기만 할 수는 없다. 그보다는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을 반영하고 어디까지나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할 만한 이야기를 쓰게 마련이다.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할 만한 이야기. 그게 바로 ‘서거 정국’에 언론이 전한 뉴스들이었다. 순수하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는 기사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남 탓하기에 바빴다. 검찰 탓, 이명박 탓, 노무현 못난 탓, 시위꾼 탓. 우리 사회는 한 놈을 ‘뿔 달린 도깨비’로 설정해 만악의 근원이라고 지정해줘야 속이 편한 사람들로 가득하다.

 대통령만 잘 뽑으면 경제 선진국으로 도약할 거란 헛된 기대를 품듯이 기자들에게 너무 대단한 걸 바라는 것도 좋을 건 없다는 이야기다. 언론사도 우리 사회의 한 부분이며, 홀로 역사를 선도할 수는 없다.

 그리고 언론사 조직 자체도 여타 한국 조직과 크게 다르지 않다. 누군가 군기를 세게 잡는 조직일수록 폭탄주가 성행한다고 지적했는데, 검찰과 언론사에서 폭탄주가 가장 흔하다. 입사 전에는 언론사가 어느 조직보다도 개인의 독립성을 가장 존중해줄 거라 생각했는데, ‘까라면 까야지’라는 말이 적잖이 들려 놀랐다.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기자 개개인의 생각은 천차만별이었지만, 각 언론사의 논조는 편집국장의 의견으로 통합됐다. 언론사 지망생 시절이었다면 이 같은 행태에 분노했겠지만, 어쨌든 내가 먹고 살아야 하는 조직에서 수없이 이런 일을 겪다 보면 둔해진다.
 
애정 어린 질책이 더 필요해  다만, 어떻게 기자가 그럴 수 있냐는 비판에까지 둔감한 것은 아니다. 정말 아닌 일에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기자들도 있고, 사주 및 국장의 논조를 따르는 조직 문화가 잘못됐다는 생각은 대부분의 기자들이 갖고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 기자들이 기사를 엉망으로 쓴다는 비판도 기자들이 겸허히 받아들이는 편이다. 미국의 뉴욕타임스 기자 수가 천 명 가량인데 우리나라는 기껏해야 2~4백 명이라는 이야기로 충분히 변명이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나는 아직 기자라는 호칭이 어색하다. 누군가에게 내 직업을 소개하게 되면 자격지심으로 ‘손발이 오그라든다’. 10년차가 넘는 MBC의 이상호 기자가 “나는 아직 기자가 되는 과정”이라고 했는데, 쓸데없이 겸허한 말로 비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 말이 맞는다고 본다. ‘언론의 권력을 자신의 권력인 양 착각하며 살지 말라’는 이야기를 제발 좀 실천하자, 생각하면서 하루하루 기사를 쓰고 있다.



탁알의 ‘뭐라고?


언론이 사회적 약자의 이익을 무조건 대변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근본적으로 기자들이 사회적 약자가 아니기 때문이죠. 대부분 고학력에 중산층이기 때문에 사회적 약자의 서러움을 잘 모른다고 봅니다. 게다가 기자라는 타이틀 덕에 어디서든 잘 대접받거든요. 그리고 언론사도 기업이니까 주 독자층을 생각해야 하는데, 신문을 열심히 보는 층이 ‘상위 10%’라는 인식이 큰 영향을 끼치죠. 특히 경제지의 경우, 경제활동에 적극적인, 소위 돈 있는 사람들이 주로 보기 때문에 논조가 보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상명하복의 구조에서 자신이 원하는 기사를 내기 위해 감수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면?

가장 어려운 부분은 시간이 없다는 거죠. 회사 차원에서 ‘기획취재팀’을 따로 꾸리는 경우 빼고는 임무로 주어진 기사 써가면서 관심 분야를 따로 다루기가 어렵습니다. 또 자신이 속한 언론사의 논조에 반하는 기사를 쓰려면 사내에 나쁜 평이 퍼질 각오를 하고 부장, 편집국장 등에게 대들어야겠죠. 윗사람 입장에선 ‘네가 진짜 기자’라는 생각보다 ‘다루기 어려운 놈’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기 마련이고요. 거듭 말씀 드리지만 언론사도 기업 조직입니다.

 
우리 언론사가 지닌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가장 먼저 바뀌어야 할 부분은?

일단 뉴욕타임스처럼 인원이 늘어야겠고, 연차가 아닌 능력에 따라 대우해줘야죠. 미국 지방지의 경우 서른도 안 된 사람이 데스크 자리에 앉기도 하지만 연차 승진 시스템은 우리나라 조직문화 전반의 문제라 쉽게 바뀌진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기업과 언론사의 관계가 변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광고 문제는 잘 아실 테니까 빼고요,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취재원에게 백화점상품권(30만 원 정도)을 받기 일쑤고, ‘술자리에서의 중요한 정보 확보’나 ‘취재원과의 친목도모’ 등을 이유로 접대도 받아요. 직접 겪어 보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만큼 구조화돼 있더군요. 미국 기자들은 취재원들과 같이 밥을 먹어도 자기 밥값은 따로 계산한다더군요.

 
원치 않는 기사를 쓴 죄책감이 들 때면 어떻게 하시나요?

제 신념과 어긋난 기사를 쓰게 되면 그 다음에는 비판적인 기사를 써야겠다 싶어요. 아직까지 제 생각과 다른 내용의 기사를 쓴 적은 별로 없네요. 그런 기사를 쓸 때는 뒷부분에라도 꼭 비판적인 내용을 집어넣는데, 그 부분이 데스킹 과정에서 잘리면 좀 슬프죠.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


참여연대 NOW

실시간 활동 SNS

텔레그램 채널에 가장 빠르게 게시되고,

더 많은 채널로 소통합니다. 지금 팔로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