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9년 06월 2009-06-01   1170

참여사회가 눈여겨본 일_경찰집무 집행법, 이대로 좋은가: 국민을 ‘잠재적 폭도’로 여기는 사이비 법치












국민을 ‘잠재적 폭도’로 여기는 사이비 법치





박주민
변호사, 참여연대 공익법센터




지난 5월 1일과 2일 양일간에 걸친 서울 도심에서의 경찰의 모습과 태도는 마치 계엄군의 그것과 다름없었다. 집회를 원천 봉쇄하기 위해서 집회 장소에 전의경들이 도열, 배치한 모습에서부터, 관변단체와 건물주들로 하여금 방어용 유령집회 신고를 내도록 부추겨 합법적인 집회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일까지 다양한 형태의 집회 방해를 감행했다. 뿐만 아니라, 집회장소로 가는 지하철 입구 전체를 셔터와 경찰병력으로 봉쇄해 집회 참가자뿐만 아니라 집회와 상관없이 지나다니는 일반 시민, 외국인 관광객의 발목을 붙잡기도 했다(5월 2일 오후 6시 30분경 시청역 구내). 집회가 끝난 이후 인도에 서 있는 노동자들을 연행(5월 1일)하거나 항의하는 시민(5월 2일)을 미행해 연행하고, 집회 참가여부가 확인되지 않는 상황에서 명동거리에서 쉬고 있는 시민을 연행(5월 2일)하는 등 다양한 반인권적 행태를 자행했다.




‘묻지마’식 연행! 여기가 민주국가인가?



양일간의 연행자중 다수는 경찰 폭력과 ‘묻지마’식 연행 등 반인권적 사례들을 호소했으며 이들 중에는 집회에 참가한 것이 아니라 집회 광경을 구경하다가 연행된 경우도 다수 있는 것으로 증언되었다. 심지어 연행자 중에는 미성년 여학생, 정신지체 2급 장애인과 외국인도 포함되어 있었고, 집회 참가자로 보기 어려운 시민악대들와 그를 구경하던 시민들도 대거 연행되었다. 이렇게 연행되었던 시민들 중 회사원 권00는 자신에 대한 연행이 부당했었음을 알리기 위해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연행과정에서 벌어진 경찰들의 폭행 역시 심각한 수준이었다. 폭언과 비인격적 발언은 물론이며, 폭행으로 다친 시민들의 병원 호송을 거부하거나 119 구급대를 부른 상태에서도 경찰 거부로 이송되지 못한 사례도 발견되었다.





그렇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경찰은 자신들의 불법 폭력 사례에 대한 겸허한 반성없이 집회 주동자들을 검거하겠다는 입장만을 발표하였을 뿐이다. 이러한 정부와 경찰의 태도는 그 이후에도 지속되어 서울 도심을 정해진 길을 따라 진행하려는 자전거 순례단이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구호가 적힌 옷을 입고 있다는 이유로 일정을 불허하였고,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던 민주노총 소속 조합원들이 휴식을 위하여 승합차에 모여 있는 것이 시위라면서 플랜카드 등을 압수해가는 일도 자행하였다. 대전에서는 민주노총의 한 집회에서 무려 5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체포, 연행되었으며, 그를 계기로 서울 등 도심에서의 집회를 원천적으로 금지하겠다는 초헌법적인 선언을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5월 23일과 24일에 있었던 노무현 전대통령의 추모제를 ‘집회로 번질 수 있다’는 추상적인 우려만으로 8000명이 넘는 전경을 동원, 차단하여 많은 국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



과연 무엇이 정부로 하여금 집회에 대해 이렇게 반응하도록 하였을까? 과연 이런 흐름을 멈추게 할 수는 있을까?





이명박 정부의 집회 공포증



최근 집회에 대한 정부의 폭압적 대응은 정부의 정책적 방향과 국민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집시법이나 경찰관직무집행법이 가지고 있는 구조적 문제 등을 원인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는 친시장적이며 친기업적인 정책은 국민 대다수의 이익보다는 소수의 경제 엘리트들을 위한 것으로, 국민 대다수의 이해관계와 상충하며 그 희생을 전제로 한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작년부터 계속해서 문제제기 되어왔던 소위 MB악법들의 면면을 보면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폴크루그먼이 공화당의 정책들을 비판하면서 ‘거대한 이권의 체계적 나누어먹기 그리고 그를 통한 정권에 대한 막대한 경제적 후원 등의 확보’ 등으로 표현한 것과 일맥상통한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이런 이명박 정부는 당연하게도 정치과정을 통하여 자신들의 정책에 대해 국민들을 이해시키고 설득하는 것보다는 애초부터 일방적인 강요로 일관하고 있다. 왜냐하면 경제 엘리트들의 이익과 국민 전반의 이익을 조화시키는 것은 처음부터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뿐 아니라 굳이 국민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경제 엘리트들과 긴장관계를 조성할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즉, 역시 폴크루그먼의 또 다른 지적대로 ‘공화당의 경제적 불평등 정책이 사회적 불평등으로 귀결되어 더 이상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눈가림이 가능하지 않을 때까지는 정권을 유지할 수 있을 것’ 아니 보다 적극적으로 ‘사회적 시스템(언론 등)을 장악하면 영원히 정권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집회에 대한 강경한 태도는 이명박 정부가 가지고 있는 국민관에도 기초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바로 ‘폭민관’인데, 서울대 최갑수 교수(사학)가 경향신문 칼럼에 기고한 것처럼 국민을 ‘잠재적인 폭도’로 보는 것으로, 국민을 대화의 상대라기보다는 자칫 ‘폭민’이 될 수 있는 존재로 여겨 대화하기보다는 조기에 진압하는 것을 우선시하는 태도라 할 것이다. 아마도 이런 이명박 정부의 태도는 작년에 있었던 촛불집회에 대한 공포에 가까운 체험에서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최근 집회에서 체포된 사람들의 구속영장실질심사과정에 직접 참석한 공안검사들은 ‘작년과 같은 시위가 일어난다면 정권이 흔들릴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만큼 작년 촛불집회에서 이명박 정부는 국민의 자발적 반대에 의해 정권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며, 이를 위해서는 무슨 수든 사용하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이명박 정부의 국민에 대한 태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또 다른 것이 바로 ‘법치주의 확립’ 또는 ‘법과 원칙’이라는 수사이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자주 언급되었던 것이 바로 ‘법치’라는 것인데, 실제 그 내용을 보면 법에 따라 권력을 행사하여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하겠다는 원래적 의미의 법치가 아니라 법의 이름으로 국민을 통치, 지배하겠다는 형식적 법치에 가까웠다. 이는 올해 4월 21일 법률신문에서 변호사와 법학교수들을 상대로 한 설문에서 전체 응답자들 중에 60%에 가까운 사람이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후 법치주의가 오히려 후퇴하였다고 응답하였고1), 80%가 넘는 사람이 권력이 재판이나 수사에 영향을 미친다고 답을 했다는 것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이명박의 법치는 경찰력을 동원한 반대세력 특히 힘없는 국민들에 대한 탄압과 있는 자들에 대한 비호의 다른 이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집회를 금지하는 법, 집시법



다음으로 최근 집회에 대한 강경하고, 폭력적인 대응이 가능한 것은 바로 집회를 규율하는 집시법이 가지고 있는 구조적 미비점에 기인한 바가 크다. 아래에서는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피도록 하겠다.



우선 집시법은 그 규율대상이 되는 ‘집회’의 개념규정조차 없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2006고단2956판결에서 집시법 제2조 제1호 ‘옥외집회’의 ‘집회’ 개념을 “일정한 공동 목적을 위한 다수인의 일시적 회합”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 반면에 다른 사건에 대한 서울지방법원 2003. 8. 28. 선고 2003고단2100 판결은 “집시법 제6조 소정의 신고 의무 있는 옥외집회는 다수인이 공동 목적을 가지고 천장이 없거나 사방이 폐쇄되지 않은 장소에 모여 불특정 다수인의 의견에 영향을 주거나 제압을 가하는 행위“로 해석하고 있는바, 이는 집회의 개념이 다른 법률조항과의 연계 속에서도 명확하게 유추되지 못함을 반증하는 것이라 할 것이며, 특히 법관에 있어서도 ‘집회’ 개념의 의미가 명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최근에 경찰은 ‘정치적 구호, 플래카드, 피켓’의 존재라는 법에서도 규율하고 있지 아니한 기준을 가지고 기자회견이나 문화제 등 각종 회합을 모두 집회로 규정하여 집시법의 규율대상으로 삼으려고 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집회의 개념은 집시법에서 규정하고 있고 많은 학자들이 움직이는 집회로 규정하고 있는 시위, 즉 ‘여러 사람이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도로, 광장, 공원 등 일반인이 자유로이 통행할 수 있는 장소를 행진하거나 위력 또는 기세를 보여, 불특정한 여러 사람의 의견에 영향을 주거나 제압을 가하는 행위’와 비슷한 수준의 제한적인 것으로 새겨서 적어도 위력 또는 위세가 집회여부의 핵심적인 판단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점에서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추모의식은 집회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집시법의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헌법 제21조 제2항에 의하여 집회에 대한 허가제는 허용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는 허가제로 운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헌법이 집회에 대한 허가제를 금지하고 있기에 집시법은 집회에 대한 신고제를 표방하고 있다. 통상적으로 신고제도는 행정질서의 확립을 위하여 운용되는 제도로, 일반의 공중질서유지를 위하여 경찰행정청이 언제 어디서 어떤 규모의 집회가 행하여지는 지에 관한 정보를 획득하기 위하여 집회의 주최자로 하여금 미리 그 사실을 알려주도록 강제하는 것에 불과하며, 이러한 신고는 주최자가 행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고, 일단 신고한 이상 신고에 대해 실질적인 요건을 가지고 심사, 승인하는 절차를 밟아야 되는 것은 아니라 할 것이다. 그리고 신고를 해태한 경우에는 그에 상응한 행정질서벌(과태료)로 제재하는 것으로 충분하며, 신고하지 않는 집회에 대하여는 도로교통법과 같은 질서법을 적용함으로써 신고된 집회에 대한 보호 장치의 작동을 거부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행 집시법은 집회신고를 한 경우 신고수리의 주체인 경찰이 해당 신고에 대해 추상적이며, 불분명한 규정들을 근거로 심사, 승인하여 금지할 수 있게 규정되어 있다. 즉, 경찰이 해당 집회가 교통소통의 불편을 줄 우려가 있다거나 공공의 안녕질서에 직접적인 위협을 가할 것이라고 판단한 경우에는 언제든지 신고된 집회에 대하여 금지통고할 수 있게 하고 있는데, 여기서 교통소통의 불편이나 공공의 안녕질서에 직접적인 위협이라는 것은 모두 추상적인 규정이어서 경찰의 자의적인 판단에 의해 집회가 금지될 수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집시법은 신고를 하지 않은 미신고집회를 형벌로 다스리고 있는데, 이는 대한민국에서 집회주최자가 집회를 벌이는 과정에서 사회질서나 타인의 권리 등에 대해 어떠한 침해행위를 벌이지 않더라도 단지 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형사 처벌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는 것이며, 사실상 허가제로 집회를 관리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집시법과 그 시행령은 집회 신고사항으로 22가지 항목을 제시하면서, 이를 근거로 경찰은 사소한 신고사항까지도 보완하라는 요구를 하고 있으며, 이를 거부하면 금지통고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집회가 벌어지는 과정에서 신고사항과 다르다는 이유로 진행되고 있는 집회를 불법집회로 규정해 진행되고 있는 집회에 개입하는 경우도 다반사이다. 결국 현행 집시법은 신고제의 취지에 전혀 부합하지 않게 규정되어 있다. 허가제의 실질을 가진 집시법이 더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집회에 대한 실질적인 허가권한을 전적으로 경찰에게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경찰은 행정기관으로서 집권정치세력의 통제 하에 있는바, 집권정치세력을 비판하거나 기존 체제에 반하여 소수의 목소리를 내려는 집회나 시위에 대해 결코 중립적인 입장을 가질 수 없다. 따라서 집회신고에 관한 권한은 관할 경찰서장이 아닌 보다 큰 민주적 정당성을 가지고 중립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지방자치단제장에게 부여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할 것이며, 경찰은 위와 같은 지방자치단체나 혹은 집회주최자가 질서유지를 위해 협조를 요청하는 경우 질서유지 등을 위해서만 사후적으로 집회에 개입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이 이외에도 집시법은 야간집회에 대한 전면적인 금지, 지나친 소음규제, 집회장소에 대한 통제, 집회에 대한 금지통고에 대해 다툴 수 있는 실효적 수단의 미비 등 수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집회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법이 아니라 집회를 통제하고 금지하는 법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사이비 법치주의만으로 민주주의는 없다



(금융)자본·자산가들에게는 ‘규제 대신 법’을 선사하면서, 동시에 하층 계급의 사소한 실정법 위반, 반 질서행위, 그리고 본질적으로는 기본권 행사행위인 집회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공적 폭력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는 사이비 ‘법치주의자들’은 결국 기본권을 양극화시킨다. 이러한 사이비 법치주의자들은 일단 집시법을 지키라고만 한다. 그러나 진정한 법치주의, 즉 기본권을 법으로써 지키는 것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과연 현행법을 지키라는 것만으로 충분한지 의아함이 든다. 진정한 민주주의, 법치주의가 꽃피기 위해서 조금씩 더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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