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9년 10월 2009-10-01   3108

헌법새로읽기_노동 3권과 헌법에 대한 ‘오해’

1985.4.10 노동3권 쟁취를 요구하며 가두행진하는 시위대의 모습, 박용수 flickr.com

노동 3권과 헌법에 대한 ‘오해’


김진 변호사


아닌 밤중에 헌법과 노동3권 소동이다. 노사관계를 연구하는 국책연구기관의 장이라는 사람이 어딜 가나 밝히고 다닌다는 소신 때문이라는데, 말인즉슨 “노동3권을 헌법에서 빼야 한다는 것이 소신이고, 개헌을 하면 (노동3권을 빼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다른 나라는 노동3권이 법률로 보장되면서 견제와 균형이 이뤄질 수 있는데, 우리는 헌법적 권리여서 현실하고 어긋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동안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은 연구위원을 징계했다거나 그동안 노동연구원이 “좌파의 해방구”였기 때문에 달라져야 한다고 하는 말들을 들어오기는 하였지만, 다름 아닌 국회에서, 이런 말을 했다 하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오죽하면 여당 의원들도 “이 사람 안 되겠네…”를 연발했겠는가). 사실 이 분이 다른 공식석상에서 하였다는 “모든 근로자를 비정규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나 아예 본인의 저서에 적었다는 “노사정위원회 같은 사회적 합의주의를 배격해야 한다”는 말 따위에 비추어 보면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니긴 하다.


우리나라만 과격한 노동운동을 헌법으로 보장한다?

놀란 가슴이 진정되니, 이번에는 궁금해졌다. 도대체 왜 이 분이 그런 말을 하였는지 궁금해졌다. 아, 물론 국회에서야 국회의원이 물어서 한 말이지만, 그 전에 어느 자리에서나 그 말을 하고 다녔다니 말이다. 상상의 나래를 펴 본다. 외국에서 공부하고 오신 양반들이 그렇듯, 이 분도 “미국처럼 잘 사는 나라도 노동권을 이 정도만 보호하는데 왜 우리나라에서?” 류의 말을 하셨을 것이고, 법 공부나 했다는 사람이(라면 으레 그랬겠지만) 우리 헌법을 들먹이면서 “우리는 미국과는 달리 헌법에 노동3권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면 안 된다”고 덤볐던 거다. 이 양반 머리 속에는 “(세상에서 제일 잘 나가는) 선진국에도 없는 헌법상 노동3권이 우리나라 헌법에 있어? 그게 말이 돼? 미친 거 아냐?” 이런 생각이 자리 잡은 것이다. 한국 경제를 좀먹는 과격한 노동운동이 헌법에 의해 정당화된다고 생각하니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실제 나 자신도 이런 대화를 심심치 않게 해온지라 연상이 어렵지 않다.

우리 헌법에 노동3권을 헌법적 권리로 보장하는 조항은 33조 1항인데, 그 문장은 매우 간략하다 : 근로자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하여 자주적인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

노동3권 조항은 제헌헌법에서부터 있었는데(제헌헌법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에 있어서는 근로자는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이익의 분배에 균점할 권리가 있다”라는「이익균점권」조항까지 있었다) 1963년 헌법부터는 아예 온전히 지금이 문언을 갖추어 그 자리에 계속 있다. 그동안 험한 시기에, 황당한 대통령들이, 되도 않는 방법으로 헌법을 주물렀지만 이 조항을 건드린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노동자의 권리 주장은 ‘보편적 인권’

우리나라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 (헌법에는 창조적이고 독창적인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부분을 외국 헌법에서 ‘계수’한 것이다) 수많은 나라가 그렇게 하고 있다. 아예 헌법 전문에서 파업권을 보장하여 유명한 프랑스 헌법은 물론, 노동은 없고 노무관리만 있다는 일본 역시 “근로자는 단결하는 권리 및 단체교섭 기타의 단체행동을 할 권리를 보장한다(28조)”는 명문의 규정을 둔다. 스페인, 이탈리아 등과 그리스, 폴란드, 스위스, 벨기에, 스웨덴 등 서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3권을 명시적으로 정하고, 문언에는 ‘단결체를 결성할 권리’라고만 하고 있는 독일에서도 연방헌법재판소가 그 속에 교섭과 쟁의의 권리가 포함된다고 확인하였다. 결국 미국과 성문헌법이라는 것이 아예 없는 영국 정도만을 제외하고 노동3권은 어디에서나 헌법적 권리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근대 입헌민주주의가 성립되는 시기에 서구 국가들의 자본주의 경험의 산물이다. 노동조건이 사용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고, 노동자는 생존을 위해 사용자가 일방적으로 정한 노동조건에 따를 수밖에 없는 본질적으로 불평등한 관계에 있음을 인정하고, 개별 노동자로서는 사용자와의 관계에서 그 지위를 스스로 개선·향상시킨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이 권리를 ‘보편적인 인권’으로 만들었다. 헌법재판소는 “헌법이 근로자의 근로3권을 보장하는 취지는…노동관계당사자가 상반된 이해관계로 말미암아 계급적 대립·적대의 관계로 나아가지 않고 활동과정에서 서로 기능을 나누어 가진 대등한 교섭주체의 관계로 발전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때로는 대립·항쟁하고 때로는 교섭·타협의 조정과정을 거쳐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게 함으로써, 근로자의 이익과 지위의 향상을 도모하는 사회복지국가 건설의 과제를 달성하고자 함에 있다”(헌법재판소 1993. 3. 11. 선고 92헌바33 결정)고 밝히고 있다.

별별 사람들이 다 많은 세상이니 노동법이나 노동권 자체를 혐오하는 사람도 당연 있을 수 있다. 근로자들을 함부로 해고하는 것은 효력이 없다고 했더니 “그 법이 언제 생겼어요? 노무현이 대통령이 된 다음에 생겼지요?”라는 사람과 상담해 봤는데 뭐. 하지만 내가 분하고 억울한 것은, 그런 ‘소신’을 가진 사람이 얼굴을 들고 ‘노동’을 연구하는 기관의 책임자로 뻔뻔하게 앉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일하는 사람들이 희생과 투쟁을 통해 쟁취한 노동권의 역사를 모욕하는 일이다. 왜 이렇게 당연한 것을 지키기 어려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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