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9년 09월 2009-09-01   1638

삶의 길목에서_꿈의 직업, 간호사



꿈의 직업, 간호사



고진하 참여사회 편집위원

I는 올해 스물일곱의 필리핀 여성이다. 그녀는 한국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살아간다.
필리핀 최고 명문대 생물학과를 졸업했고
지난해에는 다른 대학에서 간호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지만,
간호사 취업 대기자가 너무 많은 까닭에 아직까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있다.
자신처럼 간호사가 되려고 대학교에 다시 입학하는 사람들도, 무직의 석사 간호사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필리핀에는 간호사들이 정말로 많다. 병원이 특별히 많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내가 다녔던 영어 학원은 강사들의 과반수가 간호사였다. 이곳은 다음 주 금요일에 강사들의 4분의 3이 신임 간호사 선서식 참석 때문에 결근을 할 예정이라 부득이하게 수업 대신 시험으로 하루를 때워야 한다는 소문이다.
머리 좀 좋다는 사람들, 의욕적으로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는 젊은이들은
대개 간호사 자격을 가지고 있다.
말 그대로 성별 불문, 전공 불문이다. 돈을 좀 모으면 득달같이 실습을 하러 병원으로 달려가고, 시험 준비에 여가가 없다.
심지어 의사들 중에도 간호사 자격증을 따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간호사가 이처럼 인기인 이유는 원한다면 외국 병원에 취업하여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필리핀은 굵직한 산업체도 많지 않고 인구에 비해 일자리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그래서 임금 수준이 낮다.
가정에서 요리, 청소, 세탁 따위를 도와주는 가사 도우미의 월급이 10만 원이 되지 않는다.
그보다 더 전문성을 요하는 운전기사의 월급도 20만 원을 넘지 않는다. 큰 백화점에 가보면 점원 반, 손님 반이다.
임금이 적다 보니 본업만으로 충분한 생활비를 벌 수 없는 까닭에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기회와 여건만 되면 부업에 뛰어든다.
학원 강사들 중에도 전화나 인터넷을 이용한 외국인 영어강습, 물리치료, 홈쇼핑, 부동산 소개 등 부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교사로 취직을 하려 해도 학교에서 1년 이상 자원봉사를 하며 차례를 기다려야 한다.
간호사도 마찬가지로 병원에 취직하려면 오랫동안 월급 한 푼 없이 자원봉사를 해야 한다.
자원봉사를 하면 경험이라도 쌓을 수 있기 때문에 마다하지 않는다.
최근 경기침체의 여파로 미국 진출은 막혔지만
매년 약 10만 명의 필리핀 간호사들이 사우디아라비아,
두바이,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으로
진출해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다.
그래서 간호사는 꿈의 직업이다.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식민지 경험

우리의 경우 35년의 일제 강점기를 치욕스런
역사로 여기고 지금도 일본에 대해 편치 않은
국민감정을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련되지
못한 방법으로 표출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필리핀 사람들은 자신들을 300년 이상 동안
통치한 스페인이나 반세기 가량 통치한 미국에 대해
적대감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우리와 다르다. 스페인의
식민통치 기간이 워낙 길었던 탓도 있겠지만 그들은 스페인을 자신들
역사의 일부분으로 자연스럽게 인정하고 있다.
성질이 급하고 거친 사람을 가리켜 “스페인 피가 흐르는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데서 희미한 적대감을 간신히 읽어낼 수 있을 정도다.
미국에 대해서는 필리핀의 존재를 세계에 알려주고
나라를 발전시켜준 일종의 후견인으로 여기고 있는 듯하다.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 된 나라의 일부였다는 점을
은근히 든든하게 여기는 듯한 분위기마저 느껴진다.
더욱이 영어가 세계 공용어로 군림하고 있는 상황에서
영어권 국가의 통치를 받음으로써 영어를 어렵지 않게 배워 사용할 수 있는 점은 유용한 자산으로 여겨질 수 있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인구로 보면 필리핀은 이미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영어 상용 국가이다.
필리핀 출신 간호사들의 해외 진출이 활발한 이유도 첫째는 그들이 영어를 구사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필리핀은 더욱이 서양의 통치를 오래 받은 영향 때문인지 하얀 피부에 대한 지향이 더 강한 것 같다.
가무잡잡한 피부를 하얗게 바꿔준다는 미백화장품의 인기는 하늘을 찌른다.
몰라보게 하얘진 피부로 남자친구의 선망어린 시선을 의기양양하게 즐기는 여성 모델이 등장하는 텔레비전 광고나 미백 기능을 요란스럽게 강조하는 화장품 선전물이 도처에 널려있다.
미백화장품의 구매와 사용에서는 남성들도 예외가 아니다.


느긋하고 낙천적인 기질

필리핀 사람들은 대체로 느긋하고 낙천적인 기질을 가졌다.
예를 들어 갑자기 정전이 되어 찜통이나 마찬가지인 교실에서
수업을 하게 되더라도 조급하게 부채질을 해대는 한국 학생들과 달리 필리핀 교사들은 태평스럽기 짝이 없다.
우기에 홍수가 나고 집이 침수되는 일은 다반사여서 집에 물이 찼다고 해도 도무지 걱정스런 표정을 찾아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급한 상황에서도 서두르는 모습을 좀처럼 보기 힘들다.
직업 탓에 많은 한국인을 경험한 I는 한국인들은 걱정하기가 소일거리, 국민적인 취미활동으로 보인다고 웃으며 말한다.
든든한 직장도 없고, 그렇다고 벌어놓은 돈도 없고, 남자친구도 없는 한 한국 미혼여성이 귀국할 일이 겁난다고 하더라며
자신도 같은 처지지만 “나는 지금 좋아.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라고 생각하면서 즐겁게 살아간다고 한다.
열악한 조건에서 이런 낙천성은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지 궁금하다.
하기야 이 더운 날씨에, 한국인들처럼 날마다 발을 동동거리고, 조바심을 내고, 애를 태우고, 열 내며 살아간다면 제 명대로 살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니 느긋한 성정은 신토불이 국민성이라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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