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9년 10월 2009-10-01   1412

이제훈이 만난 사람_박래군 ‘용산 철거민 참사 범국민대책회의’ 공동집행위원장


“미안하다고 하지 말고,
이제라도 용산현장으로 와주세요”


박래군 ‘용산 철거민 참사 범국민대책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


이제훈 <한겨레> 통일외교팀장    사진 김영광 사진가


9월 16일 이른 아침 여러 인권활동가들에게 메일이 한통 배달됐다. 보낸 사람은 박래군. ‘용산 참사 범국민대책위원회’(이하 용산 범대위) 공동집행위원장이다.

“… 어느새 9월도 중순, 추석이 20여 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설날 직전에 터진 용산참사, 아니 용산 철거민 살인진압 사건은 아직도 해결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든 해결을 보자는 것이 아니고, 장례를 지낼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 즉 정부의 사과, 용산 4구역에서 철거민들의 생계대책, 유가족들과 부상자들에 대한 보상 등을 정부로부터 받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9월 26일이면 250일이고, 11월 13일이면 300일인데, 겨울에 시작한 투쟁이 봄과 여름을 지나 가을도 지나가도록 해결을 보지 못할 것 같아서 두렵습니다.…”

박래군 용산 범대위 공동집행위원장을 만나러, 9월 18일 명동성당으로 갔다. 경찰의 수배를 받고 있는 그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는 메일에 이렇게 썼다. “9월 4일 밤 8시30분 이전에 명동성당에 들어왔습니다. 설마 신부님이 수배자들을 내쫓지는 않겠지 하는 일말의 기대와 희망대로 우리는 성당 측의 허가를 받아서 영안실에서 기거하게 되었습니다. 순천향병원에서 언제, 어떻게, 어떤 경로로 나와서 명동성당으로 오게 되었는지는 지금은 말할 수 없습니다. 이곳에 들어왔던 첫날밤은 편안한 잠을 이루었습니다. 순천향병원 장례식장에서도 잠은 잘 잤다고 생각했는데, 늘 불안했고, 긴장했던 모양입니다. 언제고 경찰이 쳐들어올 수 있다는 긴장감이 제게 있었던 모양입니다.”

짐작하셨겠지만, 이번엔 ‘용산’이 주제다. 한가위, 고단한 일상을 뒤로 하고, 흩어져 지내던 피붙이들과 살가운 정을 나누려던 독자들께 ‘난감한 이야기’를 들이밀게 돼 미안하다는 말씀 덧붙이며 시작한다. 누군가 말했듯이, 진실은 일쑤로 고통스러운 법 아니겠는가?

이번 인터뷰는 9월 18일 박 위원장을 만나 나눈 이야기와, 박 위원장이 인권활동가들한테 보낸 메일의 내용을 뒤섞어 정리할 계획이다. 메일에 적힌 내용들은 인권활동가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박 위원장이 하고 싶었던 말일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메일 내용 인용에 대해선 박 위원장한테 양해를 구했다. (‘용산참사’는 지난 1월 20일 새벽 재개발계획이 집행되고 있는 용산 4구역에서 망루를 설치해 농성 중이던 세입자들을 경찰이 강제 진압하는 과정에서 망루 농성 중이던 세입자 5명과 진압경찰 1명이 화재로 숨진 사건을 일컫는다. 또 세입자 등 9명이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다.)



“100만 원, 200만 원 내놓고 이름도 알리지 않는 시민들 숱해”

현재 상황은 어떤가?

“돌아가신 분들은 아직도 순천향병원 시체안치실에 계신다. 지금까지 쌓인 장례식장 사용비용이 6억 원인 데, 1억 원은 모금한 돈으로 지급했고, 나머지 5억 원은 빚으로 남아 있다. 유가족들은 얼마 전 돌아가신 양회성 열사가 운영하던 가게 터에 생활공간을 마련했다. 순천향병원에선 다섯 가족이 모두 함께 지내 어려운 점이 많았다. 방 다섯 개를 마련해 가족별로 생활하실 수 있도록 했다. 재판은 계속되고 있다. 정부에 5대 요구를 제기한 바 있는데, 우선은 시급한 과제 3가지를 풀라고 요구하고 있다. 용산참사와 관련한 정부의 책임을 인정하고 대통령 또는 총리가 사과하라, 재개발정책을 전환하고 세입자들에게 임대상가 등을 보장하라, 유가족들의 생계대책을 마련하고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을 하라는 것 등이다(여기에 참사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미공개 수사기록 3000쪽 공개 등을 더한 게 ‘5대 요구’다). 그런데 정부 등과의 협상은, 이명박 대통령이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을 총리 후보로 지명한 직후 중단된 상태다. 현재 협상이 진행되고 있지 않다.”


재판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돌아가신 이상림 열사의 아들인 이충연 용산4구역 철거대책위원장 등 아홉 분이 특수공무집행방해치사 등의 혐의로 검찰에 의해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다. 검찰의 수사기록 3000쪽 미공개 문제로 공방이 벌어져 한때 재판이 중단되고 변호인단이 이에 항의해 사퇴하기도 했으나, 9월 15일부터 다시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 김형태 변호사 등 새 변호인단이 새로 재판을 진행하고 있다. 재판에선 적어도 특수공무집행방해 치사 치상 등의 혐의에 대해선 무죄를 끌어내야 한다는 자세로 집요하게 대응할 것이다. 검찰은 망루 4층에서 화염병을 던져 화재가 났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농성하던 분들은 1차 화재가 나자마자 시너를 망루 밖으로 내던지고 물을 뿌리는 등 나름대로 화재 방지 조처에 열심이었다. 불이 나면 자기가 죽는데 왜 불을 내겠나? 더욱이 당시 현장 상황을 보면 화재 발생 원인으로 추정되는 요인이 많은데, 검찰은 유독 화염병만 문제 삼고 있다. 1차 화재 발생 뒤 경찰은 최소한의 안전대책도 취하지 않은 채 강제진압에만 몰두했다. 

솔직히 완전 무죄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화염병 제조나 농성을 문제 삼는다면, 그건 사실이니까…. 농성 등도 헌법상 긴급피난에 해당하고, 경찰 등이 정당한 공무집행을 한 것은 아니므로, 원칙적으로 그 또한 논박의 대상이긴 하다. 하지만 지금의 형사법정에서 그것까지 기대하지는 않는다. 1심 재판은 10월 29일까지 선고가 이뤄지는 등 종료돼야 한다.“


유가족들 생계는 어떻게 되고 있나?

“범대위가 모금한 것에서 일부 생활비를 지원하고 있지만 고통스러운 문제다.”


도와주는 분들은?

“참사가 일어난 지 8개월이 다 되어 가는데, 잊지 않고 도와주는 분들이 많다. 성금과 물품이 끊임없이 들어온다. 1만 원, 2만 원씩 하는 소액 성금이 꾸준히 들어오고 있다. 100만 원, 200만  원을 내놓고 이름과 연락처도 알리지 않는 시민들도 숱하다. 없는 사람들 처지는 없는 사람들이 더 잘 안다고, ‘개미군단’의 지원이 큰 힘이 되고 있다. 그 힘으로 범대위가 운영되고 유가족들이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명진 스님처럼 1억 원이라는 큰돈을 내놓으신 분도 있다. 종교계에선 천주교 쪽이 적극 나서고 있다. 문정현 신부님이 지난 3월 말부터 참사 현장에서 미사를 집전하시는 등 정의구현사제단 분들이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계신다. 또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빈민사목위원장을 맡고 계신 이강서 신부님도 적극적이시다. 빈민사목위원회는 서울대교구의 공식 조직이라는 점에서, 천주교가 공식적으로 이 문제에 관여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불교 쪽에선 상대적으로 관심이 낮다.”



이명박 정부는 유난히 폭력적이다”

박래군 위원장은 ‘용산참사’가 드러낸 한국사회의 치부로 ‘국가폭력’과 ‘재개발사업’ 문제를 제기했다.



“이명박 정부는 유난히 폭력적이다. 하지만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에도 민중생존권 투쟁은 잔인하게 짓밟았다.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라는 게 사회적 약자를 배제하는 민주주의다. 사회경제적 민주주의가 빈곤하다. 지금 임대주택은 보편화했다. 하지만 이것도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랜 세월 세입자들이 힘겨운 싸움을 벌여 얻어낸 것이다. 지금 재개발지역 상가 세입자들의 권리금이나 인테리어 비용을 비롯한 각종 투자비용은 보상 대상에서 제외 돼 있다. 석 달 치 영업 손실보상금을 주는 게 전부다. 세입자들한테 무일푼으로 나가라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재개발사업은 애초 가난한 사람들을 약탈해왔는데, 이제는 용산 참사가 보여주듯이 영세한 자영업자, 중산층 하층까지 약탈하고 있다. 지금 서울지역에만 재개발사업이 200여 곳이 넘는데, 현장에 가보면 ‘제2 용산참사 난다’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그게 그저 말로만 하는 협박이 아니다. 요즘은 조폭들이 철거용역업체를 차려 재개발사업을 새로운 돈벌이 수단으로 삼고 있다. 재개발사업지역 세입자들은 일상적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 한마디로 무법천지다. 재개발이 끝나더라도 땅값이 너무 올라 세입자들은 그곳으로 다시 돌아올 수 없다. 생계 터전을 잃고 외곽으로 외곽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이런 식으로 서울에 서민이 살 수 있는 공간이 급속히 줄고 있다. 남의 일이 아니다. 재개발사업의 전면적인 정책 전환과 재검토가 절실하다.”


“민주와 인권 세우는 일, 포기할 수 없는 투쟁”

박 위원장은 인권활동가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적어 놨다.

“… 용산투쟁은 인권투쟁입니다. 잔인한 범죄를 저지른 국가가 할 수 있는 모든 짓을 하는 게 용산입니다. 사람을 죽여 놓고, 오히려 피해자들에게 범죄를 뒤집어씌워 법정에 세웠습니다. 생존권 투쟁을 했던 동지들을 죽인 범인이 된 그들 생존자들, 그리고 심지어는 아버지를 죽였다는 혐의를 뒤집어쓴 아들도 있습니다. 그런 뒤에 이에 항의하는 모든 추모행사와 투쟁을 원천적으로 봉쇄했고, 3월 11일부터는 참사현장인 용산4구역에서 강제철거가 재개되었습니다.

용산을 지키겠다며 달려와 천막기도중인 신부조차 폭행을 당하는 상황이었으니 다른 이들은 오죽했겠습니까. 용산투쟁은 계급투쟁입니다. 철저하게 짓밟아도 되는 민중들에게 경찰이나 검찰, 법원은 너무도 가혹합니다. 늘 건설자본과 폭력을 일삼는 용역깡패들을 비호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주거권과 생존권을 위해 망루를 짓고 오를 수밖에 없었던 그들을 그토록 잔인하게 짓밟을 수 있는 것, 그것이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 용산입니다. ‘비非국민’에 대한 법과 원칙의 집행, 그 과정에서 사람이 몇 명 죽는 것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그런 정권과 맞서고 있는 곳이 용산입니다. 용산투쟁은 이명박 정권 하에서는, 아니 신자유주의 경찰국가에서는 계급투쟁과 인권투쟁이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임을 웅변하는 실체입니다.… 용산을 해결한다는 것은 우리가 빼앗긴 민주와 인권을 되찾아 오는 일이고, 아니 우리의 민주와 인권을 세우는 일이기에 질 수 없는 투쟁이고, 포기할 수 없는 투쟁입니다.”


박 위원장은 “솔직히 저는 빨리 감옥에 가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왜?

“영안실을 전전하는 수배생활을 끝내고 감옥에 가는 길은 협상을 잘 마무리 짓고, 장례를 지내는 일입니다. 냉동고에 누운 열사들의 시신을 모란공원 볕드는 자리로 보내드리는 일, 이제 유가족들이 상복을 벗고 일상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일, 그래서 일상에서 고인들이 밟혀서 다시 눈물짓는 나날을 겪을지라도 유가족들은 이제 상복을 벗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용산 4구역의 철거민들이 임대상가, 임시시장의 순환식 재개발의 첫 사례를 만들어 부족하지만 생계대책을 만드는 일, 그래서 철거민들이 무권리 상태로 공포와 폭력에 의해서 쫓겨나는 일에 종지부를 찍는 일입니다. …”



“10월 18일 국민법정에 더많이 힘을 모아주세요”

하여 그는 당부했다. “그래서 부탁드립니다. … 10월 18일에 열릴 ‘용산 철거민 사망사건 국민법정’에 좀 더 깊게 결합해주시기 바랍니다. 기소인을 모집하는 일에도, 배심원 모집에도, 그리고 국민법정을 널리널리 알리는 일에도 지금보다 더 많이 힘을 모아주시기 바랍니다.  재판 모니터도 누가 책임지고 해주시기 바랍니다. 재판에 새 변호인단이 투입되어 재판과정에서 진실의 일단이라도 밝혀내려고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

이 호소는 메일의 수신자로 지정된 인권활동가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용산, 진실의 꽃으로 살아나라” “진실을 감추려는 이들에 맞서 국민이 기소한다”는 모토 아래 추진되고 있는 국민법정에 기소인이나 배심원으로 참여하려면 국민법정 누리집(mbout.jinbo.net/court)이나 전자우편(court@jinbo.net)을 이용해 신청하면 된다.


박 위원장은 참여연대 회원들과 『참여사회』 독자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너무 늦었다고 말씀하지 마세요. 미안하다고도 하지 마세요. 이제라도 용산 현장으로 와주세요. 망루도 그대로 있고, 예술가들이 그린 그림도 있고 공연도 있어요. 신부님들이 집전하는 미사도 있어요. 철거지역의 현실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느낀 만큼 할 수 있는 일이 생길 겁니다. 약하고 없는 사람들은 ‘연대’가 힘입니다. 참여연대 회원답게 ‘참여’하고 ‘연대’해주세요.”



박래군은 1961년 3월 17일 경기도 화성의 서신에서 가난한 농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전두환이 대통령 노릇을 하던 1981년 대학에 들어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했다. 1988년 6월 4일 오후 4시께 숭실대 학생회관 옥상에서 “광주는 살아 있다, 끝까지 투쟁하라! 군부파쇼 타도하자!”고 외치며 몸을 불살랐다가 이틀 뒤 숨진, 당시 숭실대 인문대 학생회장이던 박래전(당시 25살)씨가 그의 하나뿐인 동생이다. 그는 동생의 분신 뒤 유가족활동을 하다 한국의 대표적인 인권운동가로 거듭났다. 조그마한 글쓰기 학원을 운영하는 아내와 “수배자 아버지를 자랑스레 여기는” 두 딸이 그의 삶의 버팀목이다. 지금도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시는 아버지는 얼마 전 술 한 잔 하시곤 그에게 전화해 이러셨다. “래군아. 언제 집에 오냐?”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


참여연대 NOW

실시간 활동 SNS

텔레그램 채널에 가장 빠르게 게시되고,

더 많은 채널로 소통합니다. 지금 팔로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