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9년 08월 2009-08-01   1638

뜨거운 강좌_칼 폴리니 <거대한 전환>: “시장경제는 영혼을 장식한다”




“시장경제는 영혼을 장식한다”



이비함 회사원, 성공회대 NGO 대학원생

『거대한 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 우리 시대의 정치 경제적 기원)』칼 폴라니 지음
홍기빈 옮김 | 길
강사 홍기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왜 폴라니를 들으러 오셨습니까?” 강사 홍기빈 박사의 첫 질문이었다. 그러게, 왜 들으러 갔을까. 몇 주 전 <한겨레21>에서 본 폴라니 특집 때문인가, 나의 떨어진 펀드 이익률을 걱정해서였을까. 경제적 위기는 느티나무 홀에 이런 저런 궁금함을 가득 안은 청중으로 꽉 차 있는 모습으로도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심지어 수강대기자 중에서도 7명만이 수강하는 행운을 누렸다는 소문이 있다). 홍 박사도 궁금해 하고 있는 듯 했다. 본인이 15년 전 처음 칼 폴라니를 접했을 때만 해도 후에 이렇게 주목받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왜, 이 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해 알고자 하는 것일까. 우리는 이 시점에서 왜 폴라니를 필요로 하는가. 솔직히 나의 첫 질문은 건방지게도 ‘지금 자본주의·시장경제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은 뭡니까’였으나 3번째 강의를 듣고서야 내가 왜 폴라니를 들으러 왔는지, 이 질문이 폴라니에게는 얼마나 빈약한 것인지를 어렴풋이 느꼈다.


“시장경제는 유토피아다”

장장 2년 여에 걸쳐 새로 번역된 좬거대한 전환좭의 주장은 매우 뜨겁다. 한 마디로‘시장경제란 유토피아에 불과하다’라는 것이다. 유토피아라니, 우리가 지금 날마다 살아내고 있는 이 체제가 왜 이상향이라는 건지, 그가 감히 시장경제란 존재한 적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도대체 이 시장경제란 무엇인가. 시장경제란 모든 인간의 경제활동이 가격 메커니즘으로 결정된다는 의미이며, 그렇다면 완전한 의미에서의 시장경제란 존재할 수도 없고 실은 찾아보니 존재한 적도 없더라는 것이 폴라니의 요지다. 그렇다. 전통 경제학에서 보는 행위의 주체인 인간은 ‘이기적이며 합리적인 결정’을 하는 존재다. 호모 이코노미쿠스다.

그러나, 과연 우리 인간들은 정녕 이런 존재에 국한되는가. 우리의 상상력, 이타심, 협동 같은 것들은 경제행위에서 존재하지 말아야 될 속성들인가. 시장 외에 우리의 행위를 가능하게 해주는 ‘장’은 없는 것인가.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은 ‘자기이익’밖에 없는가. 폴라니는 그리하여 우리에게 사실(로고스)이어야만 하는, 그러나 지금은 신화(미토스)가 되어버린 시장경제에 대해 명징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죽비를 내려친다. 마술과도 같이 경제가 좋아질 때도 나빠질 때도 언젠가는 시장이 스스로를 조정하여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키리라는 이 신화는 틀렸다. 사회는 이런 신화나 진리들도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마저 상품화 되는 시장경제의 폐해

폴라니는 인간의 사회 속에는 다양한 활동과 분야가 있는데 경제도 그 한 부분에 불과하나, 최근의 약 200년이 채 못 되는 기간 동안 이 시장경제라는 신화가 어떻게 모든 사람들의 뇌리를 휩쓸어 버리고 급기야 사람 스스로마저 상품화 해버림으로써 사회를 얼마나 파괴해왔는지 풍성한 사료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시장경제 속에서 모든 것은 팔릴 수 있는 상품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믿어지지만, 생각해보라. 사람, 자연, 화폐가 어떻게 온전하게 시장에서 상품으로 ‘팔릴’ 수 있는가. 아마 폴라니에 소위 ‘꽂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이 대목을 가장 크게 꼽을 것이고, 나 역시 이 대목에서 내가 당연하게 여겨온 시장경제에 대한 소위 상식이 박살나는 경험을 했다. 그리하여 폴라니는 이 세 가지 상품을 ‘허위상품’이라 부른다.

이 허위상품들은 본질적으로 내다팔라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는 인간‘사회’를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이며 더군다나 이 세 가지를 각각의 독립적인 변수로 볼 수도 없다. 이 세 가지 요소는 각각 임금, 지대, 자본·이윤으로 상품화를 시도할 경우 사회가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자기보호운동’이 필연적으로 일어나고, 홍 박사가 자주 인용하는 스미든과 골룸의 자가당착과도 같이 시장경제론자들이 말하는 자기조정능력에 대항하여 움직인다. 가령 시장경제(만능)주의자들이 말하는 대로 시장이 자기 조정을 한다 치자. 수많은 주류경제학자들이 계산하는 대로 그래프의 수요공급 곡선을 이리저리 옮겨보면 사람이든 자연이든 화폐든 즉석에서 조정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실제로의 사회를 생각해보라. 일자리에 비해 사람이 많다고 노동자의 임금이 당장 1초 만에 뚝 떨어질 수 있는가. 또 그렇게 떨어져서 인간이 생활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떨어질 수 있는가. 경제학의 그래프는 실제 생활의 변화에 따르는 시간을 계산하지 않고 항상 ‘언젠가는’ 그 곳에 도달한다고 말한다. 물론 그래서 케인즈도 명언을 남겼다, ‘종국에 우리는 결국 다 죽는다’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사람은 살아야 하고, 자연은 인간이 팔려고 들기 이전부터 그저 존재했고, 화폐는 실질적인 가치가 아니라 교환가치를 상징하는 종잇장에 지나지 않는다.


“시장경제란, 없다”

물론 여기에서 빼놓고 지나갈 수 없는 문제는 ‘자유’다. 인간에게 모든 것을 허락할 듯한 이 미명의 자유라는 이슈는 절대로 정치적 자유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치적 자유와 사회적 자유, 이것은 경제적 자유도 포함해야 하고, 그렇기에 시장경제주의자들이 부르짖는 시장경제는 떼를 쓰는 것이 아니라 무시무시한 역사철학적 명제에 근거하게 된다. 이리하여 앞서 말했듯 사회가 스스로의 파괴에 대항하여 일으키는 이 이중적 모순 운동은 한 때 극단적인 파시즘과 양차대전으로 나타나게 되었다고 폴라니는 주장한다.

“시장경제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홍 박사를 십수년간 상처입힌(!) 그 질문, “그래서, 폴라니의 대안은 뭡니까”라는 질문은 여기서 궤를 이탈해버린다. 아니, 이탈해버린다는 말은 적절하지 않다. 폴라니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하고 있고, 우리가 상상하는 ‘대안’은 단지 시장경제를 극복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장경제를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냐”라는 질문에 폴라니는 “시장경제란 없다”라고 말함으로써 질문자에게 허탈함의 첫 향과, 그러나 힘있는 통찰력의 강렬한 마지막 향을 제공한다.


인간의 근본을 생각하다

강의가 끝나도 열기는 식지 않는다. 매번 많은 사람들이 다시 묻게 된다. 폴라니가 말하는 사회란 무엇인가, 맑스와는 어떤 대척점을 지니는지, 폴라니의 시대는 그러했지만 지금 이렇게 금융공학이 판을 치고 자본과 노동이 국가 간의 경계없이 넘나드는 시대에 우리는 어떤 장밋빛 미래를 볼 수 있느냐고. 폴라니가 말하는 ‘문화적 진공상태’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 것이냐고. 정보화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폴라니는 국가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아나키즘과도 비슷한 것인지. 팔리지 않아야 하는 당위는 있더라도 실제로는 다 팔리고 있지 않는가. 질문은 끝나지 않지만 우리는 다시 물을 수 있다. 이 미친 시장의 광풍 속에서도 말이다.

폴라니는 묻는다. ‘인간은 어떤 존재냐’고. 인간은 영혼을 가진 총체적 존재이지 않냐고. 이 질문을 다시금 하는 나는 지금 너무나 가슴이 아려온다. 그래, 인간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먹고 살만 하면 만사형통인 것이 아니지 않느냔 말이다. 배부른 돼지와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들먹이는 철학적 명제 이전에, 우리는 어떤 영혼들이며, 어떤 영혼이어야 하는가. 철들었다고 생각한 이후 순진하게만 들렸던 ‘영혼’이라는 단어가 오늘은 나에게 울컥하는 느낌과 함께 다가왔다. 이 느낌을 오롯이 간직하면서 어느 경제학자가 말한 대로 ‘경제학자들에게 속지 않기 위해서라도’ 경제 공부를 더 열심히 하고 싶어졌다. 경제 배우러 가서 영혼에 대해 생각하게 될 줄은 몰랐다. 새삼스럽지 않은가, 결국 경제도 인간의 한 영역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이.


칼 폴라니는 누구인가
1886년 철도산업으로 부를 쌓은 부르주아지의 아들로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수도 비엔나에서 태어나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았으며, 부다페스트의 행동하는 지식인 집단과 예술 방면에 깊이 몰두했다고 한다. 1908년에는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12년에는 법학 대학원을 졸업해서 변호사로 활동했다. 1914년에는 헝가리 급진당의 창당을 도왔으며 당 비서를 맡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기병대 장교로 복무했고 1924년부터 1933년까지 <오스트리아 대중경제>에서 경제와 정치 논평 기자로 일했다. 이후 파시즘의 영향이 증대되기 시작한 1933년에 오스트리아를 떠나 런던으로 이주하였고 미국의 콜럼비아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부인의 공산주의 전력 때문에 캐나다로 이주하여 1964년 온타리오에서 숨을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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