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9년 07월 2009-07-01   1327

그 때 그 노래_”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



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



최양현진


20세기 초반의 혁명은 유럽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시작해 아시아와 남미로 전이되었다. 자본주의의 강국으로 등장한 미국은 사회주의 국가에 반하는 자신들의 블록을 만들어 제3세계 국가들로부터 식량과 자원을 착취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미국에 맞선 쿠바와 베트남의 혁명은 성공을 거뒀다. 칠레에서는 1970년, 20세기 역사상 최초로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 이상을 실현할 대통령을 뽑았다. 그러나 이 축제와 같은 혁명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옌데가 미국이 장악한 구리광산을 국유화하기 시작하자 미국은 칠레산 구리 수입을 금지해 물가 상승이라는 고통을 주었다. 그리고 피노체트를 도와 반혁명을 모의하였다. 결국 반혁명으로 인해 아옌데 대통령은 임기 3년 만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칠레는 아옌데 대통령과 함께 또 다른 이의 죽음을 겪어야 했는데, 바로 남미에 ‘누에바 깐시온(새노래 운동)’을 일으킨 ‘빅토르 하라’였다.

하라는 1932년에 산티아고 인근의 로꾸엔이란 마을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연기와 연출을 공부한 그는 남미와 유럽을 순회하며 연극 활동을 하던 중, 남미의 전통음악에 눈을 뜨게 되어 여행 방향을 민요 채집으로 선회한다. 당시 하라는 비올레따 빠라와의 만남을 통해 민중 음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1966년, 첫 솔로음반을 내고 연극 활동과 음악 활동을 병행하던 그는 1969년에 칠레 산티아고에서 개최한 1회 누에바 깐시온 페스티벌에서 자작곡 ‘La plegaria a un labrador(농부의 기도)’를 불러 우승한다. 이를 계기로 빠라, 잉띠 일리마미, 뀔라빠윤 등의 가수들과 함께 아옌데 대통령의 인민연합 문화선전대로서 활동하게 되었고, 함께 ‘누에바 깐시온새로운 운동’을 벌였다.

1970년, 이들은 노래로 선거운동을 해 아옌데가 이끄는 인민연합 승리에 크게 기여한다. 선거 이후에도 하라는 남미 전역을 순회하며 칠레 민중들의 삶과 고난의 역사를 노래했다. ‘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이라는 누에바 깐시온의 구호처럼 하라의 노래는 파시스트의 폭력에 저항하는 무기였다.

그의 노래는 칠레와 전 세계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칠레 EMI는 그의 노래를 보급했다. 그러나 그는 반혁명으로 인해 온갖 고문 끝에 죽고 만다. 당시 반혁명이 성공하자 칠레 EMI는 그의 음반을 모두 폐기했으나 하라의 부인이 몰래 영국으로 가져간 음원으로 다시 세상에 나온다. 하라의 노래는 그렇게 전 세계 민중들의 노래로 추앙받게 되었다.

빅토르 하라의 대표곡으로 고향 로꾸엔과 칠레 민중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는 El lazo(올가미), 칠레 민중의 훌륭한 재능을 담요 짜는 여성의 모습을 통해 노래한 Angelita Huenuman(앙헬리따 우에누만), 마약으로 사망한 한 소녀의 죽음을 애도하며 칠레에 침투하는 천민자본주의와 무분별한 소비주의를 경계한 Quien mato a Carmencita?(누가 카르멘시타를 죽였나?), 어머니와 딸의 이름인 아만다를 소재로 노동자의 삶을 표현한 Te recuerdo Amanda(아만다, 너를 기억해), 경찰의 폭력으로 사망한 인민연합의 친구이자 당원이었던 로베르또 아우마다를 기리는 Cuando voy al trabajo(일하러 가는 길), 정권과 자본을 풍자하는 Menifesto(성명서), 자유를 염원하는 Canto Libre(자유의 노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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