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9년 11월 2009-11-01   1117

삶의 길목에서_자연재해로 신음하는 아시아



자연재해로 신음하는 아시아


고진하참여사회」편집위원


올 가을 필리핀, 베트남,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들이 줄줄이 태풍, 홍수, 지진 쓰나미 등 자연재해로 심한 홍역을 치르고 있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 잇따른 자연재해, 7백만 재난 피해자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보내주세요’ 우리 가족이 다달이 소액을 후원하고 있는 국제구호단체 월드비전에서도 아시아 재난 긴급구호 모금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보내왔다.

  이에 따르면 9월 26일 이후 태풍 켓사나와 파르마의 영향으로 필리핀에서는 288명이 사망하고 약 300만 명이 피해를 보았다. 필리핀을 강타한 태풍 켓사나는 연이어 베트남을 강타해 9월 29일 사망자 163명, 이재민 150여 만 명이 발생했다. 같은 날 태평양의 사모아제도에서는 지진 쓰나미로 170명이 숨지고 1만 5,000명이 피해를 보았다. 연이어 9월 30일과 10월 1일 인도네시아 서 수마트라에서는 지진으로 약 500명이 숨지고 약 60만 명이 피해를 보았다. 또 남인도에서는 10월 1~4일 약 250명이 사망하고 310만 명이 피해를 입는 큰 물난리가 났다.

  월드비전은 이와 같은 각국의 피해현황과 함께 식량과 텐트, 가족구호키트, 아동위생키트 등의 구호물자를 트럭에 싣고 현장으로 달려가 전달하고 아동쉼터를 설치하는 등의 긴급구호활동을 벌이고 있다고 긴박한 활동상을 전했다. 강진이 휩쓸고 간 서 수마트라의 파당, 파당 파리아만, 아감에서는 2개월간 정수 서비스를 제공하고 이동 화장실을 설치하며 학생들을 대상으로 긴급 재난 교육도 실시하게 된다고 밝혔다.

  내가 머물고 있는 필리핀 중부의 일로일로는 다행히 태풍이 비껴갔지만 켓사나가 위력을 떨치던 날 밤의 비바람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내 방은 4층에 테라스가 달려있으며 큰 유리문과 창문이 있다. 창호가 튼튼한 이중이 아니어서 방음이 시원치 않다. 그날 밤의 바람소리는 마치 바람의 여신이 원한과 노여움에 사무쳐 머리를 풀어헤치고 울부짖는 것처럼 들렸다. 무시무시한 바람 소리와 요란한 창문의 덜컹거림 때문에 잠을 깬 나는 바람이 부실한 유리문을 날려버리고 안온한 우리의 잠자리까지 쳐들어오지 않을까 하는 불안에 떨며 눈을 뜬 채 밤을 새웠다.  

  필리핀에서 태풍의 주요 피해 지역은 이번에도 수도 마닐라와 북부의 루손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태풍이 지나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어 상습 피해지역에 속한다. 이 지역에서는 집과 논밭이 물에 잠기고 떠내려갔으며 길과 다리가 끊어지고 무너졌다. 산사태가 나고 축대가 무너지고 전봇대가 넘어지면서 비탈길에 엎드려있던 오막살이들을 덮쳤다. 교통은 두절되고 학교와 상점들은 문을 닫았다. 학교는 피난민 대피소로 둔갑했다. 지금은 거의 대부분 지역에서 범람했던 물이 빠져나가고 거리는 외관상 평온한 정상을 되찾아가고 있다. 그러나 태풍 피해자들에 대한 지원을 호소하는 광고 방송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수마가 할퀴고 간 상처가 아물려면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이 절실함을 짐작할 수 있다.  

  큰 쇼핑몰에 수재민 의연금 접수처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성금과 입던 옷가지를 정리해 싸들고 접수처를 찾았을 때 덩그런 모금함에는 바닥조차 가리지 못할 정도의 푼돈 만이 떨어져 있어서 더 멋쩍게 보였다. 쌀독에서 인심난다는 옛말처럼 초라한 모금함은 메마른 인정이 아니라 팍팍한 살림살이의 증좌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접수처를 맡아보던 무척 선해 보이던 키 큰 남자는 외국인인 우리가 여러 장의 지폐를 모금함에 넣고 챙겨 간 물품을 건넬  때 의례적인 말 대신 진심이 담긴 눈빛으로 고마운 마음을 표현했다.      

  집중호우로 저지대가 침수되고 집에 물이 드는 일은 다반사이기 때문에 사실 이곳 사람들은 홍수를 그다지 특별한 일로 여겨지지 않고 있는 것 같다. 나 같으면 집이 물에 잠기고 옷가지며 살림살이가 흙탕물에 젖어 못 쓰게 되는 지경이 되면 주저앉아 땅바닥이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 될 것 같은데 이곳 사람들은 곤경에 워낙 단련이 된 것인지 그저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아무리 세찬 비바람이 몰아쳐 와도 언제 그랬냐 싶게 금세 해가 나와 온 세상을 말려주고 밝혀주는 남국의 기후가 형성시켜준 명랑성과 낙천성 덕분인지, 400년의 식민지 경험으로 어지간한 일에는 눈도 깜짝 하지 않는 내공이 쌓인 것인지, 자연 앞에 겸손하게 순응하는 자세가 몸에 배어 있다. 세 끼 밥 먹을 수 있고 따뜻한 잠자리가 있으면 행복할 줄 아는 소박한 사람들인지라 뉴스에 나오는 이재민들에게서도 절망의 표정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올가을 유난히 풍성한 자연재해 소식을 접하면서 자연도 불공평하게 가난한 자를 차별하는 게 아닌가 하는 엉뚱한 혐의를 품게 된다. 가난한 집 제사 돌아오듯  야속하게도 가난한 나라들만 치고 가니 말이다. 자연현상이야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이라 해도 날로 강도와 빈도가 높아가는 자연재해의 양상은 인간이 그동안 자연에 가한 해코지와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지구촌 사람들이 너나없이 다 같이 저지른 자연 파괴, 굳이 따지면 그 중에서도 잘 사는 사람들이 더 많이 쓰고 버리고 파헤친 업보를 가난한 사람들이 옴팡 뒤집어쓰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어쨌거나 가까이 있는 어려운 이웃은 물론 먼 이웃에까지 지구촌 사람들의 관심과 온정이 이어져 어려움은 나누고 고통은 줄이는 풍요로운 가을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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