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9년 02월 2009-02-01   995

참여마당_인터뷰: 변화와 연대를 꿈꾸는 정치학도




변화와 연대를 꿈꾸는 정치학도



김진욱 회원



이경휴
참여연대 회원

오늘 저녁의 일몰(日沒)에서 내일 아침의 일출(日出)을 읽는 마음이 지성(知性)입니다.
(신영복 ‘매일 펼쳐보는 마음 노트’ 중에서)


새로운 해의 시작을 의미하는 입춘(立春)이 문턱에 섰다.  바야흐로 절기는 봄날을 노래하지만 세상살이는 한겨울이다. 한뎃잠을 자는 사람들에게 그 자리마저 쫓아내려고 물대포를 쏘아댄다. 하늘에서는 시뻘건 불기둥이 떨어지고 공중은 순식간에 다비(茶毘)장이 되어버렸다. 천지간에 사람은 없고 오직 경제논리만 흉흉하게 춤을 춘다.

‘난쏘공’(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조세희 작)의 실제무대가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재현되었다. 30여 년 전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지만 여전히 모두가 남의 일로 본다. 사람보다는 경제를 살려야 하고, 정의의 보루인 20대는 취업만이 만사형통이라 눈을 질끈 감고 있는 듯하다. 투쟁의 주역이었던 20대. 그들 스스로가 내린 고해성사는 ‘비굴한 20대’라고 한다. 가슴 아프다, 누가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으랴.

햄릿형의 20대 김진욱(25세/정치학과) 회원을 만나던 날은 날씨조차 스산했다. ‘낙원구 행복동’을 꿈꾸는 참여연대 사무실 분위기도 침통하고 비장했다. 만나는 이들마다 ‘그 사람들 불쌍해서 어떻게 해’만 되뇌일 뿐 힘없음을 안타까워했다. 그도 허탈한 표정으로 찻잔만 응시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코코아 향내 앞에 적막만 흘렀다.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둔 그로서는 머리가 무거울 수밖에 없으리라. 쉽게 말문을 열 수가 없었다.

듬직한 체격에 보드랍고 하얀 손. 오른손 약지에 반짝이는 실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한 줄기 빛이었다. 커플링? 침묵을 깨트리는 단초가 되었으나 돌아온 답변은 의외였다. “외할머니께서 고등학교 졸업할 때 해주신 반지예요.” 경박한 발상에 낯이 뜨거웠다. 사랑의 시원인 외할머니- 손자의 손에 정표를 남겨주는 건 사랑으로 손을 잡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험한 세상에 든든한 지지자가 있기에 그는 분명 속이 깊고 따뜻한 사람이리라.



88만원 세대의 비애


88만원 세대- 이 시대의 20대에게 기성세대는 빚만 안겨주었다. 어찌 그들을 탓하고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위로하랴. 10대 땐 외환위기를 겪게 했고, 지금은 천정부지로 솟아오른 대학등록금과 ‘이태백’이라는 신조어로 위무하고 있다. 그러면서 ‘안정된 직장’으로 공무원을 권유한다.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린 20대들은 전공과 상관없이 광풍처럼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시류이다. 교육적 사회적 손실이 만만찮지만 취업문을 두드리기 위한 대안이 없다며 볼멘소리를 한다.

그는 광풍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느낌이 들었다. 취업 문제를 차치하고 어떤 일을 하고 싶으냐고 운을 뗐다.

“계속 책 읽고 공부를 하고 싶지만 현실적으론 어려우니 그런 기회를 잃지 않는 일을 하고 싶어요. 사회 전반적인 분야에 관심을 갖고 정치학의 뿌리인 가치 배분에 대하여 고민하고 모색하고 싶어요. 아직 말로 꺼내긴 망설이지만 시민사회단체의 활동가로서 내공을 쌓으며 길을 찾고자 합니다.”

밑그림이 다 그려진 답변이었다. 인턴 1기를 수료하고 틈틈이 자원활동가로 영역을 넓혀가는 중이다. ‘틈틈이’라는 말을 의아해하자,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싶지만 등록금 마련을 위해 알바도 해야 하고, 어머니 일도 도와드려야 하기에 시간이 나는 대로 자원활동을 할 수밖에 없어요.”

자연스레 오늘 인터뷰의 주제는 등록금과 취업 문제로 가닥이 잡혔다. ‘비굴한 20대’에 대한 변명 아닌 항변을 듣고 싶었다. 다소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차근차근 말을 이어갔다.

“등록금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한 쪽에서는 그렇게 인상 돼도 너희들은 왜 움직이지 않느냐고 질책을 하고, 다른 한 쪽의 사회 분위기는 딴 생각할 틈을 주지 않지요.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우리 안에 내재된 패배감인 것 같아요. 그래 봤자, 바뀌는 것 없더라. 그럴 시간에 공부해서 토익 점수 올리고 좋은 직장만 가지면 끝나는데 뭘 머리 싸매고 투쟁을 해. 이런 사고방식이지요.”

변명도 항변도 아닌 자조적인 열변이었다.

우울한 분위기 속에 얼마 전 들었던 강연의 내용이 떠올랐다. 이 시대의 참스승인 S선생님이 러시아 지하철 안에서 목격했던 가슴 뭉클한 이야기다. 지하철 내에서 노인이 서 있으면 누구라도 나서서 그를 자리에 앉게 했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그 모습을 보았기에 러시아 사람에게 이유를 물었다. ‘그 세대의 노인들이 놓은 지하철이니 그들이 앉아서 가야 하는 건 당연하다’고. S선생님은 우리 대학생들에게 그 감동을 전하자, ‘그 노인들 돈 받고 했을 텐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어디 있어요’라고 했단다.

이미 우리 대학생들에겐 삶의 1순위가 정해져 있는 셈이 아닌가. 사람보다 ‘자본의 논리’가 앞서가니 등록금 인상분이 터무니없이 많고, 학자금 대출 금리가 사채 수준이라도 취직해서 갚으면 된다. 오직 대기업에 취업만 되면 성공한 인생이 되는 거다? 오로지 경제만 살면 천지만물도 살릴 수 있다는 부박한 정치철학이 사람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학생들마저 용병으로 나서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 싶다.



사람들 눈높이에 맞춰 변화 가능성 제시했으면


신흥종교인 물신교의 창궐로 세상은 뒤죽박죽이다. 사람마저 물품과 동일시하여 ‘내 스팩(spec)’은 어느 정도라고 공공연하게 자기소개서를 쓴다. 각종 미디어 매체는 제품의 장점과 성능, 기능을 평가하는 의미로 사용하는 단어를 아무런 여과 없이 사람에게 쓴다. 학생들도 덩달아 자신의 스팩을 올리기 위하여 영어 학원 등록은 새벽부터 줄을 서지만, 인문학 수업은 철 지난 이념으로 해체해버린 지 오래다. 스팩을 올려 좋은 직장 갖고 돈 잘 벌면 어지간한 결핍쯤은 능히 견딜 수 있다는 환상에 가까운 믿음 때문에 대학이 취업학원으로 전락하고 있는 건 아닌지. 학생들이 그런 심리적 착시현상을 모를 리 없지만 사회 분위기는 취업 외에는 능사가 아닌 듯 몰고 간다. 물신교 교리의 핵심은 유전천국(有錢天國) 무전지옥(無錢地獄)이다.

고액의 등록금과 높은 학자금 대출 금리에 대한 불만은 봇물처럼 쏟아졌다. 물론 그 혼자만의 이의 제기만은 결코 아니지 싶었다.

“학교마다 재정 상태를 공개하지 않으면서 무슨 명분으로 해마다 등록금을 인상하는지 모르겠어요. 학교발전기금이라는 것이 건물 짓고 땅 사는 비용인지, 그 혜택이 누구에게 돌아가는지……. 교육을 하는지 사업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요. 사업이라면 학생들이 막강한 투자자인데 투자했으면 얻어가는 게 있어야 하잖아요. 학교의 서열구도가 무너지지 않는 한 재미 보는 투자자는 한정되어 있는 거죠.”

고개를 끄덕이며 테이블 위에 있는 물 한 잔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학자금 대출 금리가 7.5%인 곳이 우리나라예요. 아무런 담보가 없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사채놀이 하는 거죠. 말만 번드르르하지 학자금을 대출해준다고 은행 금리보다 더 높은 금리로 학생들의 고혈을 뽑아 먹는 짓입니다. 몇 번 대출을 받으면 졸업과 동시에 빚쟁이가 되어서 사회로 나옵니다. 그렇다고 취직자리가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고.”

이것이 현실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진학하는 학생들이 80%라고 하는데 그들이 원하는 직장을 갖는 건 2%에도 못 미친다고 하니 나머지 투자자들은 어디로 가는지. 알바, 비정규직, 인턴…88만원 세대의 비애를 이 시대는 얼마나 공감을 하는지. 시대적인 공감이 절대적으로 필요해야 학생들도 연대할 수 있다며 그는 쓸쓸히 웃었다.

대학생으로서 취업대란을 바라보는 시각과 대안이 있다면 시원스레 풀어보라고 기회(?)를 주었다.

“기업이 사회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어요. 고용의 기회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거죠. 한때 어느 기업에서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면서 직장인들의 모습을 보았는데 완전히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있었어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혹사를 당하며 조직의 나사처럼 움직이고 있더군요. 사회에 대한 책임과 환원보다는 어떻게 해서든 돈을 벌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왜곡된 자본주의, 기형적인 자본주의의 전형이죠. 그 모순과 부조리의 불길이 촛불집회 때 반짝 솟아올랐지만…결과는 열패감과 무력감만 남긴 셈이죠.”

하기야 촛불집회를 성공적으로 진압했다는 공로(?)로 승진하는 세력이 기업과 한통속이 되는 마당에 희망을 품을 수 있을까. 하지만 모든 것을 냉소적으로 보는 순간 희망은 사라진다는 ‘난쏘공’ 작가의 일성에 희망을 걸 수밖에.

“대안? 글~쎄요. 답답합니다. 직업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미디어에서 사회전반적인 문제를 경제 쪽으로만 몰아가지 않았으면 합니다. 말이 생각을 담아내는 그릇인데 사람과 물건을 구분해서 쓸 줄 아는 용어 선택, 삶의 명암을 고르게 분배하는 기재 같은 게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공허한 메아리이지요.”

기회밖에 줄 수 없는 처지가 안타까웠다. 하지만 어쩌랴, 일몰 뒤에는 어김없이 일출이 찾아오듯 우리의 삶도 그러하리라. 내일 아침의 일출을 읽는 마음으로 마무리 질문을 했다. 참여연대에 대한 애정 어린 비판을 부탁하자,

“참여연대, 존재 그 자체가 희망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가고, 그 사람들의 수준이나 눈높이에 맞춰 변화의 가능성을 제시해주었으면 합니다.”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窮則變 變則通 通則久,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라는 주역의 한 구절이 화두처럼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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