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9년 01월 2009-01-01   584

특집_원칙과 철학 없는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





원칙과 철학 없는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정말’ 다사다난했던 2008년이 저물고 새해가 밝았다. MB 정권 1년 사이에 경제는 10년 전 IMF 위기 때보다 더 어려워지고, 남북관계는 YS 정부 시절로, 민주주의는 전두환 정권시절로 후퇴했다는 분노어린 탄식이 이어지고 있다. 새해가 가져다주는 희망과 포부조차 딴나라 얘기로 들리는 까닭이다. 어느 것 하나 지난 1년간 역주행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남북관계 1년을 되돌아보면, 가히 격세지감이라는 말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당초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 명칭은 ‘비핵·개방·3000’이었다. “북한이 핵을 폐기하고 개방을 선택하면, 10년 이내에 북한의 1인당 국민소득 3천 달러까지 끌어올리겠다”는 것을 골자로 한다. 남북경협을 핵문제와 연계시키겠다는 것이 핵심인데, 이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간 이어져온 ‘정경분리 원칙’을 사실상 폐기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정부가 대북경협의 4대원칙으로 북핵 해결의 진전, 국민적 공감대 형성, 사업의 타당성, 재정적 부담 능력을 제시한 것도 ‘북핵-경협 연계전략’을 잘 보여준다. 발끈한 북한은 비핵·개방·3000을 “반동적인 실용주의”, “반통일 선언”, “대결론”이라고 맹공을 퍼부었다. 국내에서도 전략적 실효성에서부터 명칭의 타당성에 이르기까지 많은 논란을 야기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대북정책의 공식 명칭을 ‘상생과 공영의 정책’으로 바꿨고, 비핵·개방 3000은 그 하위 개념으로 재설정했다.

상생공영정책은 “북한의 변화와 함께 남북관계는 더욱 발전할 수 있고, 평화와 경제의 공동체 구축을 통해 선진 한반도와 평화통일 기반을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책 기조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간의 햇볕정책이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에는 실패했고 북한의 요구에 질질 끌려다녔으며 오히려 핵무기 개발을 도왔다’는 평가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함께 살고 함께 번영하는 상생·공영’이 아니라 ‘서로 싸우고 함께 망하는 상쟁(相爭)·공멸(共滅)’의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적어도 집권 1년간은 그랬다. 이에 따라 2007년 10월 2차 남북정상회담을 거치면서 최고조에 달했던 남북관계는 불과 1년 만에 최저점을 향해 치닫고 말았다. 2008년 1년간 남북관계의 짧은 역사는 이를 잘 보여준다.

북한은 2008년 1월 1일 신년 공동사설 “10·4선언 철저 관철”을 강조했다. 그리고 1월 중순 이명박 당선인측에게 회동을 제의했지만, “목적이 뚜렷하지 않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대통령직 인수위에서는 통일부 폐지가 검토되었고, ‘통일은 없다’는 저서를 내는 등 대북 초강경파인 남주홍을 통일부 장관으로 임명하려는 움직임도 보였다. 결국 통일부는 살아남았고,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외교안보수석과 주중대사를 지낸 김하중이 통일부 장관이 되었지만, 그 위상이 추락한 것만은 틀림없다. 또한 대통령직 인수위 고위 관계자들은 북한이 민감하게 반응해온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및 미사일방어체제(MD) 참가 문제도 거론해 큰 파문을 야기했다. 그러나 북한은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난을 자제했다. 신년 사설에서 10·4 선언의 철저한 관철을 대남정책의 목표로 삼은 만큼, 남측의 새로운 정부를 자극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키 리졸브’훈련과 유엔 인권회의 발언으로 갈등 시작

북한이 이명박 정부를 비난하고 나선 시점은 2월 25일 대통령 취임식 직후부터이다. 한미 양국이 북한의 강력한 반발을 ‘연례적인 비난’으로 일축하고 핵항공모함, 핵잠수함, 이지스함이 대거 동원된 ‘키 리졸브’ 훈련을 강행한 것에 따른 반응이었다. 그러자 북한은 한미합동군사훈련을 강력하게 비난하면서 “오랫동안 비싸게 마련해놓은 모든 수단을 총동원한 주동적 대응 타격”으로 맞서겠다고 말했다. 또한 3월 1~2일에는 서해상에서 300여 발의 해안포 발사 훈련을 했다. ‘키 리졸브’ 훈련 시작과 겹치는 시기이다.

여기에 인권 문제를 둘러싼 갈등도 표출되었다. 제네바 유엔인권이사회 회의에서 박인국 외교통상부 다자외교실장은 3월 초 제네바 유엔 인권회의에서 “한국 정부는 보편적 가치로서 인권의 중요성에 입각해 북한의 인권 상황이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국제사회의 우려에 대해 북한이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의 신중하고 조용한 대북 인권 외교 기조가 바뀔 것임을 국제외교무대에서 공개적으로 밝힌 것이다. 이에 대해 제네바 북한대표부 최명남 참사관은 “한국측은 남북관계에 부정적 결과를 초래할 이러한 무책임한 발언에 따른 모든 결과에 책임져야 할 것”이라고 비난했다. 군사와 인권 문제로 남북관계에 적신호가 켜질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한미합동군사훈련이 벌어질 때마다 남북관계는 홍역을 치렀었다. 노무현 정부가 유엔의 대북인권결의안에 찬성할 때에도 비방전은 벌어졌다. 이 정도를 두고 남북관계의 파국을 걱정할 단계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2008년 3월 하순을 거치면서 남북관계는 파국의 문턱에 도달하기 시작했다. 발단은 정부 최고위층의 부적절하고 비실용적인 발언들이었다. 김하중 통일부 장관은 3월 19일 “북핵 문제가 타결되지 않으면 개성공단 확대가 어렵다”며, 북핵과 남북경협을 연계하겠다는 방침을 분명히 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3월 26일 통일부 업무보고 자리에서 “남북기본합의서를 기본으로 삼겠다”면서, 북측이 합의 이행을 강조했던 6·15와 10·4 선언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가 대북정책의 대전제를 ‘북핵 폐기’로 설정했는데, “기본합의서에는 북핵 관련된 것도 들어가 있”기 때문이었다. 유명환 외교부 장관은 같은날 미국 워싱턴에서 “북핵 문제에 대해 시간과 인내심이 다해가고 있다”고 말했다. 과거 부시 행정부 발언을 그대로 옮겨놓은 발언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김태영 합참의장은 같은 날 국회에서 북한의 핵무기 보유 대책에 대한 질의에 대해, “중요한 것은 적(북한군)이 핵을 가지고 있을 만한 장소를 확인해 타격하는 것”이라며 ‘선제공격론’을 언급했다. 그런데 이는 ‘선제공격론’의 상징인 부시 행정부조차도 2007년 이후 공개적으로 입에 올리지 않은 발언이었다.

그러자 북한의 보복 조치가 잇따라 나왔다. 3월 24일에는 김하중 통일부 장관의 핵-개성공단 연계 발언을 문제삼으면서 개성공단 남측 당국 인원 전원철수를 요구했다. 3월 29일에는 김태영 합참의장의 선제타격론 발언을 강하게 비난하면서 북방한계선(NLL) 수역에서 남북한의 무력충돌 발생 가능성을 경고했다. 또한 서해상에서 단거리 함대함 미사일을 3차례 발사하는 무력시위도 벌였다. 급기야 노동신문 4월 1일자 논평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을 “역도”로 부르면서 ‘비핵·개방·3000’을 전면 거부하고 남북관계 악화에 따른 결과를 경고했다. 북한의 매체가 이 대통령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비난을 퍼부은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대북식량지원 중단, 금강산 사업 중단으로 남북갈등 최대 위기 맞아

이명박 정부가 대북식량지원을 중단한 것 역시 남북관계의 악재였다. 2007년 북한의 식량 수확량과 국제사회의 지원양이 줄면서 2008년에 또 다시 대기근 사태에 직면할 것이라는 경고가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왔다. 당연히 이명박 정부에게 대북지원에 나서라는 요구도 높아졌다.

그러나 정부는 북한이 먼저 요청하지 않았고, 국민적 동의도 이뤄지지 않았다며 지원 방침을 밝히지 않았다. “북한의 식량난이 그리 심각하지 않다”는 말도 흘렸다. 그러다가 미국의 부시 행정부가 4월 초에 50만 톤의 식량지원 방침을 발표했다. 당황한 이명박 정부는 5만톤의 옥수수를 줄 테니 대화를 하자고 북한에 제안했고, 북한은 이를 일축했다. 그리고 남북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은 12월 9일에는 북한의 요청도 없고 인도적 지원이 필요한 긴급한 상황도 아니라며, 대북지원 방침이 없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그러나 하루 전날 세계식량기구는 2009년 북한의 식량 부족분이 83만 6천 톤에 달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어쨌든 한국 정부가 북한에 직접 지원이든 국제기구를 통해서든 한 톨의 쌀도 보내지 않은 것은 2000년 이후 처음이었다.

3월과 4월을 거치면서 악화일로를 걷던 남북관계는 7월 들어 최악의 상황에 직면했다. 7월 11일 새벽 금강산 관광객이 북한의 군사보호구역에 들어갔다가 북한군의 총격으로 사망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 날 오전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국회개원 연설에서 “전면적인 남북대화”를 제안하기로 되어 있었고, 이 대통령은 금강산 피격 사건에도 불구하고 대화 제의를 했다. 그러나 오후 들어 정부의 기조는 확 바뀌었다. 금강산 관광사업을 중단하는 한편, 남한 조사단의 현장조사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북한은 이 사건에 대해 “유감”을 표했지만, 사건의 책임을 전적으로 남측에게 돌리면서 남측이 요구한 현장조사를 거부했다. 또한 8월 9일에는 “금강산 관광지구에 체류하는 불필요한 남측 인원을 추방하는 조치”를 취하겠다고 발표했고, 다음날부터 실행에 들어갔다. 이에 따라 ‘남북화해협력의 상징’인 금강산 사업은 남북갈등의 상징으로 추락했고, 관광 개시 10년 만에 최대 위기에 봉착하고 말았다.


북, 모든 육로 차단, 관광사업 중단 조치 대응

악재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9월 들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이상설’, ‘와병설’이 불거진 것이다. 이러한 소문은 김정일이 8월 14일 군부대 시찰 이후 공개활동을 하지 않다가, 9월 9일 북한 정권수립 60돌 행사에도 불참함으로써 더욱 증폭되었다. 그러자 국가정보원은 “김정일이 뇌졸중이나 뇌일혈로 쓰러져 수술을 받았고 현재는 회복 중”이라고 밝혔다. 특히 정부 관계자들은 “부축하면 걸어다닐 수 있을 정도로 상태가 호전되고 있다”거나, “양치질을 할 정도의 건강 상태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등 마치 김정일을 옆에서 보고 있는 것처럼, 상세한 언급들을 쏟아냈다. 그러면서 북한의 급변사태 발생에 대비해 개념계획인 5029를 작전계획으로 격상하는 것을 비롯해 대응책 마련에 나설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이에 따라 최고 지도자에 대한 모독과 군사적 위협을 받았다고 판단한 북한의 반발은 더욱 거세졌다.

파국의 문턱을 향해가던 남북관계는 11월 들어 그 문턱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북한은 이미 10월 2일 남북군사실무회담을 통해 남측 민간단체의 대북 전단 살포가 개성공단 사업 등 남북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초래할 것이라며 살포중단 요구했다. 그리고 10월 16일에는 노동신문 논평을 통해 이명박 정부의 “반북 대결정책 지속시 북남관계 전면 차단을 포함해 중대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11월 6일 국방위원회 소속 군부 조사단을 개성공단에 보내 남측 기업의 철수 가능성을 언급했다.

급기야 북한은 11월 12일부터 행동에 옮기기 시작했다. “12월 1일부터 1차적으로 군사분계선을 통한 모든 육로통행을 엄격히 제한, 차단”하겠다고 발표했고, 1971년 개통 이후 처음으로 판문점 남북적십자 채널도 끊었다. 이에 따라 개성공단 사업은 심각한 타격을 입기 시작했고, 남북 당국간 핫라인 역할도 해온 적십자 채널이 끊어짐에 따라, 남북 당국간 연락망은 군사직통전화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또한 육로통행 차단으로 금강산 관광사업에 이어 개성 관광도 중단되었다. 다만 북한은 개성공단 사업을 전면 중단하지 않고 남측 인력을 절반으로 줄여 속도조절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를 “1차적인 조치”라고 언급해 상황에 따라서는 개성공단 사업도 중단할 수 있다는 것을 내비친 상황이다.


북한 무시 발언 쏟아낸 이명박 대통령

11월 들어 남북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은 데에는 이명박 대통령의 부적절한 발언도 한몫 했다. 이 대통령은 북한이 남북관계 차단을 경고하고 나서자 “기다리는 것도 때로는 전략”이라며, 전향적인 정책 변화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오히려 남북관계를 하나씩 풀어가는 수순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에 남북이 생산성 있는 대화를 할 수 있는 단계가 올 때까지 기다릴 것”이라며 대통령의 방침을 거듭 확인했다. 더구나 이 대통령은 11월 15일 워싱턴 기자간담회에서 “자유 민주주의하에서 통일하는 것이 최후의 궁극목표다”라고 말했다.

사실상 북한 체제를 부정하고 흡수통일을 추진하겠다는 발언이었다. 그러자 북한은 22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대변인 담화를 통해 “전쟁에 의한 흡수통일 의도”로 규정하고, “북남관계, 통일문제를 논할 여지 없다”며 남북관계 차단을 강행할 방침을 분명히 했다.

북한의 이러한 강경기조의 배경에는 이명박 정부가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을 ‘무시’하는 정도가 아니라 정면으로 ‘위반’하고 있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북한이 11월 12일 “남조선 괴뢰 당국의 반공화국 대결 소동은 위험수위를 넘어서고 있다”며 “역사적인 두 선언에 대한 남조선 괴뢰당국의 구태의연한 입장과 태도가 최종적으로 확인되었다”고 비난한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두 선언의 핵심적인 기초는 상호 체제 인정과 내정 불간섭 및 상호 비방 중지, 그리고 국제무대에서 공동의 이익 실현 등이다. 선언의 이행은 이러한 정신을 전제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이상설’을 앞장서서 유포하면서 북한 급변 사태 발생시 군사적으로 대응하는 ‘작전계획 5029’의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언급해왔다. 내정 간섭과 비방 수준을 넘어 체제 전복 시도로 북한이 받아들일 만하다.


‘악의적 무시’와 ‘벼랑끝 전술’의 충돌

남한 민간단체들의 ‘삐라 살포’는 이러한 맥락에서 북한에게 상당한 불쾌감과 위협을 주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민간단체 활동을 제지할 법적 근거가 없다고 하지만, 북한은 ‘촛불집회는 강경 진압하면서 삐라 살포는 방조하고 있다’고 본다. 결과적으로 MB 정부의 ‘작전계획 5029’ 논의와 민간단체의 ‘삐라 살포’ 행위를 북한 체제를 전복하기 위한 ‘민관 합동작전’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11월 초순 처음으로 유엔의 북한인권결의안의 공동제안국으로 참여한 것 역시 북한은 6·15와 10·4 선언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라고 본다. 국제무대에서 민족의 이익을 우선한다는 두 선언의 합의 내용과 배치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2008년 남북관계는 남측의 ‘악의적인 무시’와 북측의 ‘벼랑끝 전술’의 충돌로 얼룩졌다. 이명박 정부는 북한의 대남공세를 “새 정부 길들이기”로 규정하고, “이 참에 북한의 버릇을 고쳐놓겠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이에 맞서 북한은 ‘벼랑끝 전술’을 통해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을 전면적으로 전환시켜보겠다고 나왔다. 북한이 남북관계 차단조치를 하나 둘씩 취하면서도 줄곧 6·15와 10·4 선언의 이행을 촉구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


참여연대 NOW

실시간 활동 SNS

텔레그램 채널에 가장 빠르게 게시되고,

더 많은 채널로 소통합니다. 지금 팔로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