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9년 09월 2009-09-01   1166

문강의 대중문화로 보는 세상_논다는 것의 의미




논다는 것의 의미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사랑스런 내 조카 하늘이는 초등학교 2학년이다. 하루는 “하늘아, 삼촌이랑 놀이터에서 그네타고 놀까?”하고 물었더니, “안 돼, 나 11시까지 방과후학습 가야 되고, 2시부터 영어선생님 오셔”라고 한다. “방과후학습이 뭐야?” “학교에서 방학 때 하는 건데, 나는 컴퓨터가 좋아서 컴퓨터반 신청했어.” “그래, 아쉽지만 다음에 놀자.” 이제 9살밖에 안 된 하늘이는 방학인데도 마음껏 놀지 못하는 것 같다. 하늘이에게 ‘방학’은 ‘학업을 쉰다’는 의미가 아니라, ‘방과후학습’의 줄임말이 아닐까 싶다. 물론 중고등학생은 말할 것도 없을 테고, 대학 도서관 역시 방학 중에도 갖가지 영어시험과 자격증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로 붐비는 것을 본다. 방학 때도 놀지 못하고 뭔가를 ‘해야’ 하는 우울한 현실이 이제 초등학생들에게까지 적용된다니 서글플 따름이다.

하늘이가 하는 ‘방과후학습’이나 중고등학생이 하는 ‘자율학습’, 대학생이 열심히 하는 ‘시험준비’ 등은 모두 ‘공부’라고 불리지만, 사실 이들이 하는 ‘공부’란 일종의 ‘학습노동’이다. 한국의 학생들이 ‘무조건’ 열심히 해야 한다고 믿는 ‘공부’는 이들의 창조적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는 행위라기보다는 학교와 부모에 의해 의무로 강제되어 주어진 성과를 달성하고 그에 따른 보상을 받는 행위다. 공식적 학교제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공부란 근대국가의 국민 만들기 프로젝트이면서, ‘자율’과 ‘창조’를 말하면서도 사실은 ‘훈육’과 ‘통제’를 통해 이들을 지배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한 사회 구성원으로 만드는 핵심과정이다. 이 제도 속에서 비판적 사유의 훈련 대신 주어진 국영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연마한 학생들은 이후 이미 ‘직업훈련소’가 된 대학교에서 열심히 노동자가 되는 훈련을 한다. 졸업 후에 절반 정도의 ‘행운아’들은 직장에 들어가 정규직 노동을 하며 살게 되고, 나머지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어 불안을 감내하며 산다.

학습노동에서 시작하여 육체노동, 정신노동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일생동안 일에 매달리는 노동자로 산다고 할 수도 있다. OECD 국가 중 노동시간에 있어서 언제나 수위권을 달리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노동은 하나의 정언명령에 가깝고, 우리는 그래서 이 사회를 노동이 최고의 가치를 가지는 ‘노동사회’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당연히, 노동사회에서 놀이는 더 나은 노동을 위한 재충전시간 정도의 의미밖에 지니지 못하게 된다. 코미디프로그램이나 드라마 등에서 그려지듯 ‘노는 사람’은 ‘백수’로 불리며 노골적인 눈총이나 동정어린 시선에 노출되고 제대로 된 ‘사람대접’을 받지 못한다. 자동화 기술이 발달하고 연산처리속도가 날로 높아지는 과정에서도 역설적으로 노동강도와 노동시간은 더욱 늘어난다. 그래도 ‘잘리지 않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들은 시간이 없기 때문에 놀 때도 짧은 시간 동안 극단적으로 놀아야 한다. 대학생들이 1박2일 MT를 가서 날새기로 술 마시며 놀고, 노동자들이 폭탄주를 마시며 빨리 취하거나 돈으로 쾌락을 사면서 노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놀이의 영역에 속하는 ‘문화’ 역시 노동사회에서는 산업이 된다. 그래서 대중문화는 창조적인 문화적 표현의 실험장이 아니라 노동으로 지친 이들에게 상상적인 대리만족을 선사하는 방식으로 배치된다. 공부하고 일하느라 쉴 틈이 없고, 쉴 틈이 없기 때문에 창조적으로 놀 줄 모르는 대중들에게 <1박2일>이나 <패밀리가 떴다>와 같은 인기 프로그램들은 가상적 대리만족을 준다. 우리 시대 연예인들은 ‘놀 시간이 없는 우리 대신 놀아주는 사람들’인 것이다. ‘대신 노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이 연예인들은 그래서 방송 촬영을 ‘일한다’고 표현한다. 인기 아이돌 그룹 ‘동방신기’의 최근 파문은 이 화려한 스타들 역시 노동사회 속에서 때론 힘겹게 때론 부당하게 일하고 있는 ‘연예노동자’에 불과함을 드러낸다.

노동사회의 속성을 지닌 자본주의 시스템은 이렇게 다수의 사람들을 노동자로 만들고, 이들에게서 진정한 놀이를 박탈함으로써만 유지된다. 다수가 강도 높은 노동 속에서 하루하루 지쳐가고, 그 노동의 기회마저도 누리지 못해 ‘우리에게 일자리를 달라’고 외쳐야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사회는 바람직한 사회라 할 수 없다. 노동시간이 늘어나고 노동조건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우리에게 사라지는 것은 뭘까? 애인과 사랑을 하고, 친구와 우정을 쌓고, 가족들과 친밀히 지내고,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활동에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기회들이다. 따라서 핵심적인 것은 ‘시간’이다. 노동윤리에 따라 우리가 효율적으로 ‘투자’해야 하는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자아를 실현하고 더욱 인간답고 따뜻하게 ‘살아가는’ 시간이다. 이는 곧 ‘잘 노는 시간’의 확보라고도 할 수 있다. 잘 놀기 위해서는 엄청난 능력이 필요하다. 건강해야 하고, 여유가 있어야 하고, 시간을 창조적으로 조직하고 배치할 능력이 있어야 하고, 여러 활동에 참여하고 실행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잘 놀 수 있는 시간과 능력이 늘어날 때라야만 우리는 그 사회에 자유로운 ‘문화’가 있고, ‘삶의 질’이 높다고 말할 수 있다.

맑스가 자본주의를 비판하며 바랐던 좋은 사회의 모습은 우리가 잘못 알고 있듯 전국민이 공장에서 같이 일하고 식량을 배급받는 그런 식의 통제사회가 아니었다. 그가 꿈꿨던 좋은 사회는 ‘열심히 일하고 집에 오면 화롯가에 앉아 셰익스피어를 읽는 사회’였다. 멋지지 않은가? 문제는 이런 사회가 절로 실현될 수 없다는 데 있다. 열심히 노동하고도 자유로운 문화를 만들어낼 시간이 영원히 없게 만드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벗어나려는 집단적 노력과 투쟁이 필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 투쟁은 ‘노는 것’에 대한 시각을 바꿔 자신의 시간을 확보하고, 창조적으로 노는 데 필요한 개인의 능력을 키우는 것, 즉 자신을 바꾸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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