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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년 09월
  • 2009.09.01
  • 881




소중한 김대중-노무현의 유산
민족화합 통일정신



글 사진 김재명 <프레시안> 국제분쟁전문기자, 성공회대겸임교수(정치학박사)

영국의 시인 T.S.엘리엇은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란 시를 읊었다고 한다. 누구에게나 ‘잔인한 달’의 아픈 기억이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와 다투고 헤어졌거나 영영 잃었을 경우가 그러하다. 한반도 평화통일과 민주화를 열망하는 사람들에게 2009년 봄과 여름은 ‘잔인한 계절’로 다가왔다. 지난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 8월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떠나보냈다. 가뜩이나 “한국엔 존경할 만한 원로가 많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는 한탄이 들리는 한국사회에서 두 인물의 죽음은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김대중과 노무현, 두 인물의 공통점은 이 땅의 억눌린 자들과 가난한 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특히 민족화해와 평화적 통일의 길을 닦기 위해 힘썼다는 점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손을 잡고 내놓은 두 개의 선언(2000년 6·15선언, 2007년 10·4선언)은 지구상의 유일분단국가로 60년 넘게 살아온 한국인들에게 큰 의미를 지닌다. 반통일 냉전수구세력들이 아무리 손가락질하면서 그 의미를 깎아내려 해도 어려운 일이다. 훗날 민족통일이 이뤄져 한반도에 단일국가가 들어서는 날, ‘한반도를 전쟁의 살얼음판에서 구해내고, 나아가 한반도 평화통일의 길을 열어젖힌 역사적인 선언’이란 평가를 받을 것이다.

극우보수들의 망발, 돌출행동… “저 아저씨들 왜 그래요?”  문제는 이 땅의 일부 극우보수들이 김대중-노무현을 보는 눈길이 너무나 싸늘하다는 점이다. 그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6·15와 10·4 남북공동성명을 ‘반역적인 선언’이라고 매도해왔고, 김대중-노무현 집권 10년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깎아내렸다. 두 정치지도자의 죽음을 맞아 많은 이들이 슬퍼하는 마당에, 일부 극우보수 인사들은 망발을 서슴지 않았다. 전직교수 A는 노무현의 죽음 뒤 김대중을 향해 “뒷산에 올라가 투신자살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언론인 B는 지난 5월엔 “왜 국민장으로 국민세금을 낭비하느냐”고 딴죽을 걸었고, 8월엔 “국장이 국가 분열의 촉발제”라는 주장을 폈다. 그는 국장이 치러지던 날도 조용히 넘어가질 않고 ‘역사의 심판을 기다리는 김대중 정권의 국가반역혐의 50개 항목’이란 글을 내놓았다.

또 있다. 자칭 군사평론가 C는 “두 빨갱이 수장首長이 3개월 차이로 운명했다”고 두 사람의 죽음을 규정하면서, “역적이자 빨갱이, 역적 간첩을 현충원에 보내면 그 순간부터 국가는 소용돌이 칠 것”이라고 목에 핏대를 세웠다. 이 땅의 극우보수들은 북한 조문단이 서울로 오는 것조차 반대했고, 김포공항과 여의도 국회로 몰려가 목청을 높였다. 이들의 돌출발언과 행동을 뉴스로 보면서 자라나는 세대들도 어리둥절해 하는 모습이다. 고교 1학년인 이웃집 학생은 골목길에서 나를 붙들고 “저 아저씨들 왜 저래요?”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생전에 미워하던 사람이라도 죽은 뒤엔 고인의 명복까진 빌지 않더라도 조용히 보내주는 것이 한국적인 미덕이자 인지상정이라 들었다. 그런 최소한의 인간적 예의를 갖추길 이 땅의 극우보수에게 바라기란 애당초 무리일까. 그저 “너 죽고 나 살자”는 강퍅함만이 남은 모습이 안타까울 뿐이다. 김대중과 노무현을 향한 극우보수들의 공격은 이 두 인물이 북한과의 대화를 통해 한반도 긴장을 평화롭게 풀어나가려 했다는 데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 밑바탕에는 ‘북한과의 대화=빨갱이 동조’라는 비뚤어진 인식이 깔려 있다. 극우보수파들의 왜곡되고 꽉 막힌 답답한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자신의 왼쪽에 서있는 사람은 모두 좌파일 뿐이다. 그래서 걸핏하면 색깔 공세다.
앞의 B씨가 한 보기다. 그는 올해 7월 박근혜 의원이 미디어법 강행처리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자, 그녀에게까지 색깔 공세를 폈다. “박 의원이 2002년 초 평양에서 김정일을 만나고 온 뒤로 북한정권의 만행에 대한 본질적 비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박 의원이) 김정일을 만난 뒤로 사람이 달라졌다’는 걱정을 하는 애국투사들이 지금도 많다”고 했다. 이쯤 되면 지난 1950년대 초 미국 정치판을 얼음장처럼 만들었던 ‘마녀 사냥꾼’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의 망령이 태평양을 넘어 60년 뒤 한반도에 출현한 게 아니냐는 생각마저 든다.

잘 알려진 바처럼, 매카시는 이렇다 할 증거도 없이 수 백 명의 사람들을 ‘공산주의자’ 또는 ‘동조자’로 몰아붙이면서 한껏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곧 정치판에서 왕따를 당했고, 술로 아픈 속을 달래다가 끝내는 알코올 중독으로 48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 뒤로 미국에선 매카시즘의 극우광풍은 가라앉았다. 그런데 한국에선 지금까지도 색깔공세가 힘을 쓴다. 김대중-노무현 두 사람도 대통령에 오르기 전부터 색깔공세로 마음고생들을 많이 했다. 대통령이 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남북화해정책은 극우보수 세력으로부터 “북한에 수천억 원을 퍼주었다”느니, “북한의 핵무기개발 자금을 대주었다”는 따위의 터무니없는 정치적 공세에 시달렸다.

진실을 알고 보면 ‘퍼주었다’는 그 금액은 비료와 식량을 비롯한 인도적 차원의 대북지원, 민간 기업이 북한과 정상적인 상거래, 남북경협의 안정적 추진을 위한 물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기반시설 건설비용이다. ‘퍼주었다’는 말보다는 ‘투자했다’는 말이 정확하다. 민족화해와 평화통일로 가려는 투자다. 지금 고인이 된 김대중-노무현 두 분의 생각도 그러했기에, ‘두 빨갱이 수장’ 운운하는 극우보수의 비난을 의연하게 흘려 넘겼을 것이다. 물론 투자는 손해를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피를 나눈 같은 민족이 어려울 때 조금 나누는 것을 퍼주었다고 비난하는 것은 떳떳하지 못한 행태다.

걸핏하면 “저놈, 빨갱이야!” 60년의 색깔공세  돌이켜 보면, “저놈, 빨갱이야!”라는 한마디는 좌우와 남북이 갈린 분단시대를 60년 넘게 살아온 우리 한국인에게 큰 힘을 발휘해왔다. 1945년 8·15 광복 뒤 좌우가 갈려 싸우던 해방정국(1945-48년)에서 민족분단을 막고 한반도에 통일정부를 세우려는 사람들을 가장 미워한 것은 남한의 극우 보수 세력이었다. 많은 경우 친일이라는 감추고 싶은 더러운 과거를 지녔던 그들은 ‘부자들(지주와 자산가)의 정당’ 소릴 들었던 한민당을 신변보호막 삼아 뭉쳤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추진’이라는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던 이승만과 손을 잡고는 좌파와 중도파(통합파)를 싸잡아 “저놈, 빨갱이야!”라고 공격했다.

역사는 늘 약삭빠른 현실주의자들에게 선점당하는 탓에 진통을 겪는 것일까. 1948년 5·10 총선거를 거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움직임이 한 보기다. 이미 동서냉전의 첨예한 실험장으로 떠오른 한반도의 남쪽 사람들에게 단정 수립은 하나의 ‘현실적인’ 노선으로까지 여겨졌다. 5·10 선거가 한반도의 항구적인 민족분단 상황을 가져올 것으로 걱정한 백범 김구가 유명한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란 피 끓는 성명을 발표한 것도 그 무렵의 일이다. 당시 한독당을 이끌던 김구와 민족자주연맹의 우사 김규식을 비롯 김성숙, 김창숙, 원세훈, 장건상, 조소앙, 조성환, 조완구 등 여러 지사들이 이른바 ‘남북협상’을 추진하며 평양으로 갔던 것은 그 시대의 당연한 민족사적 요구에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된다.

이를테면 우사 김규식을 보자. 1948년 4월 21일 아침 일찍 서울 서대문 무악재 고개를 넘어선 김규식은 임진강나루와 개성을 거쳐 11시50분쯤 38선에 이르렀다. 자동차에서 내린 그는 따라나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내가 짚고 있는 38선 푯말을 뽑아버려야만 하겠소. 그러나 그것은 나 혼자의 힘만으로는 되는 것이 아니요. 온 겨레가 합심만 한다면 곧 뽑아버릴 수가 있을 것이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납북협상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2년 뒤 한반도는 피를 나눈 같은 형제끼리 총을 겨누는 엄청난 전쟁을 겪어야 했다. 남북의 최고지도자가 얼굴을 맞대는 데 50년이란 긴 세월이 흐른 것도 전쟁으로 깊이 패인 갈등과 미움 탓이었다.

가난과 박해, 50년의 가시밭길  그 50년 동안 남쪽의 민족통일운동가들은 너무나 어려운 상황들과 부딪쳐야 했다.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에게 ‘빨갱이’로 몰려 옥고를 치러야 했고, 사형을 당하기도 했다. 요행히 살아남았다 해도 대부분 가난에 시달렸다. 일제시대에 의열단 고문으로 활동하다 잡혀 모진 옥고를 치른 탓에 하반신이 마비된 심산 김창숙(1879-1962)이 한 보기다. 그는 1948년 3월 이른바 ‘7거두 공동성명’(김구, 김규식, 김창숙, 조소앙, 조완구, 조성환, 홍명희)을 통해 남한만의 5·10 단독선거를 반대하며 남북협상을 지지했기에 이승만 정권의 박해를 받았다. 유족의 증언대로라면, 그는 말년에 ‘벼룩 한 마리 꿇어 앉을 땅도 없이’ 궁핍한 삶을 살았다.

중경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운암 김성숙(1898-1969)도 마찬가지였다. 1948년 평양의 남북협상을 다녀온 뒤로 줄곧 혁신정당운동에 몸담았던 그는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의 탄압으로 감옥에 갇혔고 풀려난 뒤엔 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로 살다 갔다. 김성숙과 같은 통일노선을 걸어온 소해 장건상(전 중경임시정부 국무위원, 제2대 국회의원, 1883-1974)도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 아래서 감옥을 여러 차례 드나들었다. 서울 정릉의 오두막집에서 눈을 감았을 때, 유가족들은 시신을 모실 관을 살 돈조차 마련 못한 채 눈물만 흘렸다.

이렇듯 민족화해와 평화통일을 정치신념으로 삼아온 이 땅의 양심적 지사들은 가시밭길을 걸어왔다. 정치인 김대중-노무현도 지난날 마찬가지로 극우 보수 세력으로부터 ‘빨갱이 공세’에 시달렸다. 김대중-노무현에 대한 평가는 보는 사람마다 다르고, 사안에 따라 비판받을 대목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들이 백범 김구와 우사 김규식을 비롯한 민족양심세력의 계보를 잇는 지도자들이란 점이다.

거시적으로 보면, 두 사람은 한국 평화통일운동의 큰 줄기를 이으면서, 한국전쟁 뒤 남북 사이를 흐르던 미움과 불신의 강물을 막고 평화와 화해의 댐을 세웠다. 6·15선언과 10·4선언이 그런 평가의 바탕이다. 김대중-노무현이 21세기에 일구어낸 민족화합 통일정신은 우리 모두가 앞으로 더욱 키워내야 할 한반도의 귀한 자산이다. 그들의 전해준 자산을 어찌 잘 살려야 하는가는 뒤에 남은 우리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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