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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년 09월
  • 2009.09.01
  • 810




내가 치른 국장(國葬)



최성각 작가, 풀꽃평화연구소장

2009년 8월 23일, 처서라지만 여전히 햇살 따갑고 무덥다. 김대중 대통령이 우리 곁을 아주 떠나시는 국장 끝날, 그러니까 영결식 날이다. 밀린 원고 때문에 시골로 가기 위해 집에서 나오기 전 내가 사는 아파트를 전과 다르게 유심히 바라보았다. 태극기가 안 보인다. 내가 살고 있는 동에서는 우리 집밖에 태극기를 단 집이 없다. 다른 동에도 일부러 가보았다. 평수가 작은 동에도 가 보았고, 평수가 넓은 아파트 단지에도 가보았다. 이 무슨 우스꽝스러운 호기심일까? 모두 네 집이 달았는데, 평수가 넓은 동에는 한 집이 태극기를 달았다. 30년만의 국장일, 태극기를 달았고 안 달았고 때문에 그 집 구성원들의 생각까지 읽어버렸다고 간주하는 것은 난폭한 일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시골에 오는 내내 많은 생각들이 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우리 시대, 그에게 혜택을 받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여유가 없는 사람들도 혜택을 받았지만, 여유가 있는 사람들도 받았다. 그가 집권하기 전까지 그가 기울인 노력으로 인해 이 나라가 조금이라도 민주화가 되었다면, 그리고 그의 집권 동안 마지막 냉전지대인 한반도에 얼마간이라도 전쟁공포 없이 경제행위에 전념할 수 있었다면, 그의 집권 이전이나 이후에도 여유가 있었던 이들이 더 큰 혜택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도 그가 마지막 가는 날에 태극기 하나 다는 일이 그토록 내키지 않았는가보다. 내 입술에서 나도 모르게 ‘무임승차자들’라는 차가운 말이 떠오른다. 그 말을 하면서 마음이 어두워진다.

논어(論語) 자로편(子路篇)에 나오는 장면이다.

자공(子貢)이 물었다. “한 고을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면 어떻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안된다”. “한 고을 사람들이 모두 미워하면 어떻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안된다. 한 고을 사람들 중에서 선한 자는 좋아하고 선하지 아니한 자는 미워하는 것만 못하다.”(이기동역, 성균관대출판부.)

공자님 말씀이 특별한 시기에 기묘한 느낌으로 가슴을 친다.

나는 내가 무임승차자들이라고 불렀던 이들이 바로 ‘불량한 사람들’이라는, 놀라울 것도 없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들하고 살아가야 한다. 그보다 고통스러운 일은 없다. ‘김대중’은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데다, 여러 이유들로 그를 싫어하는 이들이 대개 불량한 사람들이기 일쑤였기 때문에, 결국 김대중은 어떤 사람이었던가,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렇다고 어질고 착한 사람들이라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그렇지만, 그를 박해했던 이들은 있어도 그에게 박해받은 사람은 별로 없었다는 사후평가는 그가 남다른 지도자였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정치가는 다 지도자인가? 아니다. 누가 함부로 우리를 지도할 수 있단 말인가. 김대중 정도가 되었을 때 ‘정치 지도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용서와 화해’가 오늘 가장 중요한 말이다. 동교동을 떠난 뒤 서울광장에 잠깐 들르셨던 이희호 여사도 “용서와 화해, 그것이 내 남편의 유지입니다.”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용서와 화해는 발음하기는 쉽지만, 참으로 실천하기 어려운 경지가 아닐 수 없다. 그가 일찍부터 자신의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던 너무나 유명한 말, ‘행동하는 양심’도 마찬가지다. 인류 역사상 그 말을 온 생으로 순결한 마음으로 실천한 이들이 그리 흔했던가. 용서와 화해는 너무 높이 설정한 목표다. 용서와 화해는 그 소망의 실현보다도 그 꿈으로서 아름답고 숭고하다.

그의 서거 소식을 듣고, 나는 참으로 오랜 시간 동안 ‘김대중’이라는 주제 때문에 벌였던 수많은 이들과의 격론과 불화가 먼저 떠올랐다. 지난 세월, 그에게 반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을 수 없었던 시절, 그로 인해 나는 오래된 많은 사람들을 잃었다. 특히 내 고향사람들은 근거도 이유도 논리도 없이 맹목적으로 그를 싫어했고, 심지어 혐오했다. 빨갱이라고 했고, 전라도 어쩌구 하는 유치찬란하고 한심한 막말을 해댔다. 나는 그런 내 고향사람들을 혐오했다. 그래서 나중에는 “고향의 산천은 내 여전히 사랑하지만, 고향사람들은 경멸하게 되었다.”고 노골적으로 밝히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은 그의 서거를 ‘충격’이라 했지만, 그것은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에 어울리는 반응이지 고인의 경우는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연로하셨고, 3개월 전의 엄청난 충격으로 인해 더 사실 수 있는 분이 명백하게 민주주의가 후퇴한 앞날이 불안하고 염려스럽고, 분기를 억누르다 가셨을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충격보다는 안타까운 감정이 앞섰다. 장례기간에 일부 공개된 일기에도 드러나 있듯이 그분은 스스로도 자신의 일생을 성공한 삶으로 여기던 분이셨다. 나는 죽기 직전에 자신의 삶을 회한하고, 자탄하는 인물에 대한 맹목에 가까운 호감을 품는 경향이 있는지라 그의 눈부신 자평이 거북살스러웠던 게 사실이다. 내 죽을 때에도 반드시 후회와 자탄이 앞설 게 뻔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그의 경우에는 그렇게 자평해도 마땅한 눈부신 일생이었기에 그런 자부심을 지닐 자격이 있다고 내 본성에 반하더라도 인정하게 된다. 그런 분이 당신이 떠나고 난 뒤에도 그가 그토록 사랑하던 백성들이 고약한 시절을 만나 겪어야 할 앞날이 어찌 염려스럽지 않았을까. 오죽하면 “국민들이 불쌍하다.”고까지 하셨을까. ‘노무현’ 때에도 그랬지만, 국장 기간 내내 나는 마음이 스산해졌다.

그런 마음으로 서가의 아주 후미진 곳의 잡서들 무더기를 뒤져 내가 꺼낸 책은 『김대중옥중서신』이 아니라 그를 험구하기로 작정하고 함아무개라는 그의 경호원이 펴냈던 『동교동24시』(1987년)였다. 이미 세상에서 반짝, 하는 일순간의 추한 효력을 다한 그 잡서의 먼지를 털고 통독하면서 나는 기묘한 생각에 빠졌다. 비판의 수준에도 못 미치는 『동교동24시』에 드러나 있는 김대중 험구의 내용들은 다시 살펴봐도 대단한 것들이 아니었다. 18년간 모신 경호원이 조지기로 작심하고 열심히 채운 내용이 이 정도라면 김대중은 정말 괜찮은 분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또 암베드카르를 떠올렸다. 그것은 순전히 한완상 선생 때문이다. 한 선생이 간디 이야기를 꺼냈다. 1983년 ‘전두환’의 특사로 미국에 간 김대중은 ‘전두환 각하’에게 보냈던 2통의 탄원서에 적은 내용과 달리 위싱턴에서 그 특유의 지칠 수 없는 정치활동을 재개한다. 그 즈음 뉴욕과 워싱턴을 오가며 김대중의 생활을 가까이에서 보던 한 선생이 충고한다.

“선생님, 지금은 간디 같은 삶을 사셔야 합니다. 네루 같은 행동을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간디같이 높이 올라가면 후일 네루가 될 수 있습니다만, 처음부터 네루같이 처신하면 위험합니다. 아직 한국 정치풍토에는 힘으로 정적을 제거하는 분위기가 팽배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간디처럼 인권, 평화 같은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민족의 스승, 인류의 스승이 되셔야 합니다.”라고 충고한다. 충고가 여러 차례 되풀이 되자 김대중은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한다.

“한 박사, 당신은 학자니까 자꾸 그런 말을 하는데, 나는 현실 정치인임을 잊지 마세요.”(<한겨레>, 2009. 8. 22. 대화 부분).

나는 한완상 선생의 이 글에서 고인을 통째로 느낀다. 다른 곳에서도 고인은 ‘생각은 선비처럼 신중하고 깊게, 행동은 상인처럼 현실적으로’라는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그 분을 여느 전직이나 현직처럼 존경심 없이 마구 부른 적은 없지만, 바로 그 대목이 늘 나를 심기불편하게 했던 것도 사실이다. 불량시민이 아니면서도 평범한 상식인들 중에서도 ‘반김대중 정서’를 품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면, 어쩌면 바로 그 대목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서생이나 선비처럼 우직하게 정도(正道)를 걷는 것은 불세출의 경륜가이거나 당대의 위대한 지도자로 이어지는 덕목이고, 상인처럼 현실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곧 ‘권모술수를 마다하지 않은 현실 정치인’, ‘사당정치의 화신’, ‘거듭된 말 바꾸기’,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대권욕’, ‘자화자찬의 달인’의 이미지로 이어졌을 것이다.

간디 이야기 때문에 내 머릿속에 떠올랐던 암베드카르는 누구인가.

그는 간디 시대의 인도 불촉천민이었다. 카스트의 맨 하층계급으로 태어난 어린 암베드카르는 어느 날 하교하는 길에 평소 알고 지내던 이웃 아저씨의 수레에 태워달라고 부탁한다. 친절한 이웃 아저씨는 “영리하고 착한 암베드카르야. 다른 부탁은 다 들어주어도 네게 수레를 태워줄 수는 없단다.”라고 답한다. 집에 돌아온 암베드카르는 아버지에게 그 이상한 답변에 대해 묻자, 아버지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너는 불가촉천민이란다. 그러므로 상위 카스트가 몰고 가는 수레에 같이 타면 안 된다.”고 대답한다. 그 순간의 충격은 후일, 힌두 카스트 파괴운동의 대명사인 ‘암베드카르 박사’가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젊은 변호사 간디가 자신도 영국인과 같은 신분인 줄 알았다가 남아프리카 철도역에서 망신을 당하고 뒤집어진 것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암베드카르는 자신의 정체성을 뼛속 깊이 아로새기게 된다. 명석한데다 운이 좋아 암베드카르는 아이러니컬하지만 브라만 계급이었던 스승의 도움으로 공부를 하게 됐고, 나중에는 간디처럼 영국에 유학해 변호사가 된다. 그리고 김대중만큼 험난한 역경을 거쳐 마침내 간디와 함께 독립 인도를 건국하는 주역이 된다.

하지만 간디와 암베드카르, 두 거인의 생각은 서로 달랐다. 간디는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이 우선이었으며, 카스트는 단지 인도의 오래된 직업상의 관습이고 전통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암베드카르는 영국으로부터의 독립도 중요하지만 지옥보다 처절한 인도의 모순인 카스트로부터의 독립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1932년 암베드카르는 천민들의 별도선거를 주장하고, 그것이 관철되자 간디는 무기한 단식투쟁에 들어가면서 천민들만의 별도선거를 반대한다. 자주 단식을 무기로 삼던 간디의 치명적인 힘에 의해 암베드카르와 간디의 주장이 절충되자 간디의 추종자들은 이를 일러 ‘위대한 승리’라고 일컫는다. 간디는 자신이 반대한 것은 천민들의 신분개선이 아니라 인도인의 분열이었다고 하면서 전국을 순회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과 같이한 어떤 자리에서 간디는 “천민을 위해 기도는 하되, 소에게 선교하려하지 않는 것처럼 그들을 기독교로 전향시키려 시도하진 말라. 그들(천민)에게는 당신들이 말하는 바를 이해할 만한 바탕이 없다.”라고 말한다. 이 발언으로 간디에게 동조했던 불촉천민들마저 격분하게 되자, 궁지에 빠진 간디는 “힌두교에서 소만큼 신성한 것이 어디 있나?”라고 변명한다.(정무진, 『우리는 인도로 간다』, 민서출판사, 2000년 개정판3쇄, 251쪽.)

궁색하다 못해 교활하기까지 한 변명은 한완상 선생을 비롯해 온 세계가 숭배하는 ‘마하트마’ 간디의 말이라기보다는 네루를 이끌던 ‘정치인 간디’의 말이기도 했다. 인도의 초대헌법을 작성한 암베드카르는 임기웅변에 능한 카스트 옹호자 간디와 자주 붙었고, 내심으로 그의 위대성에 회의하고, 경멸했다. 암베드카르가 “간디 씨, 나(불촉천민)에게는 조국이 없습니다”라고 말할 때, 간디는 “그가 하리잔(불촉천민)에 대해 마구 떠드는 브라만 출신인지 알았다.”고 비서에게 말한다(게일 옴베트, 『암베드카르평전』, 필맥, 2005년, 85-86쪽). 암베드카르는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기울여 독립인도의 헌법에는 카스트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만들고 죽었다. 죽기 전에는 스스로 불교도로 개종함으로써 수백만 명의 불촉천민들이 암베드카르를 따라서 개종하기에 이른다. 그때 암베드카르가 한 말은 “나는 비록 힌두로 태어났지만 불자(佛者)로 죽겠다”는 명언이었다. 힌두교도에서 불자로 개종하는 순간, 카스트는 적어도 그런 선택을 한 ‘개인’에게는 효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피맺힌 개종운동을 벌였던 암베드카르가 사망했을 때 위대한 간디가 사망했을 때보다 더 많은 하층민중이 모여들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지금도 카스트라는 질곡을 해결하지 못한 인도에는 간디를 숭배하는 사람들만큼이나 암베드카르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같이 엄존한다.

나는 19년 전부터 인도, 네팔을 들락거리며 암베드카르의 책들을 모았다. 힘들게 모은 책들이 7-8권 되었기에 그 중 평전이라 할 만한 책들을 국내에 소개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내가 아는 출판사들은 “간디를 지나칠 정도로 존경하는 이 나라에서 간디와 맞섰던 암베드카르 이야기는 장사가 안 될 것”이라고 손사래를 쳤다. 나는 “간디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도 암베드카르에 대한 소개가 필요하지 않겠는냐?”고 역설했으나 결국, 『암베드카르평전』이 출간된 것은 내가 접촉한 출판사가 아닌 다른 곳에서 나왔다. 카스트 해결을 위해 단지 불자로 개종하는 데에서 멈춘 게 아니라 암베드카르는 붓다를 ‘저 세상에서가 아니라 이 세상 현세에서의 인간구원의 진리와 실천을 가르쳤던 인물’로 파악했다(암베드카르, 『인도로 간 붓다』, 이상근 옮김, 2005년).

한완상이 워싱턴에서 고인에게 충고한 것은 네루의 흉내가 아니라 간디의 흉내를 내라는 것이었다. 간디의 흉내를 내다보면 네루 정도는 될 수 있다고 한 말은 고인을 충심으로 염려하고 깊이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충고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 충고에 고인은 역정을 내신 것이다.

간디가 한 올곧은 지식인에 의해 고인의 모델로 권유될 때, 나는 위대한 간디와 동시대인이면서 간디와 평생 불화했던 또 하나의 위대한 인간, 암베드카르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망자에게 관대한 정서가 미덕으로 통하는 이 나라에서 매체가 끊임없이 전하는 순화된 정보에 영향을 받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국상을 치르는 사람답게 정숙한 마음으로 고인에 대해 골똘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를 험구하기로 작정한 함아무개의 악서부터 꺼내보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분이 펼친 햇볕정책에 대해서도 생각했고, 노벨상수상 연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햇볕정책은 전쟁은 결코 안 된다는 면에서는 나 역시 백번천번 찬성하지만, 그 말을 북조선사람들은 어떻게 여길까? “우리 옷을 천천히 벗기겠다고? 남녘 동포들 참으로 웃기는구나. 벗을 사람이 벗을 마음이 없는데 도대체 무슨 헛소리야.”라고 업신여기지는 않을까? 나는 그 말이 출현했을 때부터 그 표현의 일방주의와 노골성으로 인해 마음이 뒤숭숭해지곤 했다. 끝내 벗기고야 말겠다는 면에서는 불량한 과격분자들이 소망하는 흡수통일론과 얼마나 다를까? 정책이니만치 대명천지에 ‘햇볕정책’이라 공표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 정책에 해당되는 당사자들이 그 표현을 접하고 품을 모욕감에 대한 역지사지의 배려는 결여된 용어가 아니었을까, 그 정책은 ‘김대중’과 ‘대한민국’과 ‘서방’을 위한 정책이지, 정작 그 정책의 대상인 북조선은 ‘벗길 아이들’로 간주하고 있으므로 비호혜적이고 모욕적인 표현이라는 게 여전히 내 생각이다. ‘퍼주기’라는 말도 그렇다. 받는 이의 마음을 배려하지 않는 무례한 표현이 아니겠는가. 어느 국가나 그렇지만, 지상에서 가장 지독한 현실주의자들인 북조선은 햇볕정책에 공감해 김대중을 맞이한 게 아니라 자신들의 잇속을 위해 그의 방북을 허용하지 않았을까.

고인의 노벨평화상은 민족이라는 차원에서는 우리 동시대인 모두를 격상시킨 쾌사였지만 노벨평화상 수상연설은 만델라나 달라이 라마나 테레사 수녀 등 역대 수상자들 중에 고인의 것이 가장 수준이 떨어졌다고 나는 당시 느꼈다. 그들의 수상소감에는 ‘인류’가 있었지만, 고인의 그것에는 ‘개인’만 있는 것 같았다. 고인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할 때, “이 상을 나는 북조선의 김정일 위원장과 같이 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는 바입니다.”라는 말을 덧붙이기를 나는 숨죽이고 소망했다. 내비칠 수 없는 말인 줄 잘 알지만, 그런 말이 ‘상인(정치가)’으로서가 아니라 ‘서생(경륜가)’으로서 덧붙여졌더라면, 그를 맹목적으로 비난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의 업적과 눈부신 생애 때문에 그를 존칭하면서도 못내 마음속에 불편한 게 있던 사람들마저 감동시키지 않았을까? 물론 그런 소회를 밝혔더라면 주석궁에 탱크를 몰고 가자는 불량배들에 의해 고인이 ‘진짜 빨갱이’로 고착되는 수난을 겪게 되었겠지만, 평화에 대한 고인에 진정성은 한층 배가되었을 것이다. 고인의 눈부신 생애 내내 번갈아 함께 보여주신 ‘서생과 상인’ 사이에서 나는 늘 심기 불편했었다.

그러나 나 역시 그에게 진심으로 감동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것은 흔히 일컫는 경제환란의 조기극복, 아이티 강국의 초석 등, 그의 비상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도 지켰던 그린벨트를 해제했으며 골프를 대중스포츠라고 부르던 망발도 내뱉으시던 재임 중이 아니라 이명박 정권 출현 이후 노무현 대통령 서거까지였다. 그 시기에 고인이 보여주신 말과 행동은 진정 우리 시대의 어른이었다. 지난 6월 25일, 6·15공동선언 9주년 기념행사 준비위원들과의 오찬 자리에서 울면서 “모두가 어떤 형태든 자기 위치에서 행동해서 악에 저항하면 이긴다.” “때리면 맞고 잡아가면 끌려가라.” “하다못해 담벼락을 쳐다보고 욕을 하라.”고 하신 주문에서 나는 그가 거목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행동하는 양심’이라는 게 절대 어려운 일이 아니라 담벼락만 있으면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쳐 준 이를 어찌 거인이라 부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주문은 가장 약한 이들이라도 대숲에 들어가서 임금님 귀에 대한 진실을 외치면 산천초목도 듣고, 산천초목이 들으면 하늘도 듣는다는 오래된 우화의 패러디였다. 가히 그의 이름 뒤에 ‘선생’이라는 극존칭을 붙여도 될 가르침이었다. 고인은 알고 보면 꽃을 사랑하는 심성에, 남다른 유머감각도 있고, 서태지도 마이클 잭슨도 좋아했고, 남녀평등이라는 신념을 실천하셨던 멋진 분이었지만, 분노해야 할 바로 그때 마땅한 분노를 촉구하심으로써 우리를 감동시키셨던 것이다.

하지만, 고인은 가셨다. 다시 생각해봐도 그는 큰 인물이었다. 한평생을 그보다 의미 있는 사건들로 꽉 채운 인물도 많지 않으리라. ‘아시아의 만델라’라는 별칭이 허사가 아니다. 그러나 바라건대, 그분을 끝으로 서럽고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이 너무나 많은 내 나라에 다시는 큰 인물이 나오지 말았으면 좋겠다. 불완전한 인간이 큰 인물이 되어가는 과정 동안에 보잘것없는 이들이 치러야 하는 희생이 너무 크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보통사람들이 역사를 끌고 가고 그 내용을 채워야 하기 때문이다.

영결식날 저녁 어두워지기 전에 나는 도청 분향소에 갔다. 연구소가 있는 시골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도청 분향소였기 때문이다. 늦은 시각이라 분향소에는 공무원들 외에 분향하는 이들이 없었다. 방명록에 적었다.

“님에게 너무 많은 혜택을 받았습니다. 그 빚을 갚는 생이 되도록 애쓰겠습니다. 영면하소서.”
저물녘, 텅 빈 도청 분향소에서 홀로 분향하면서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올랐다.
‘나의 국장’도 끝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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