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9년 05월 2009-05-01   1281

그 때 그 노래_5월에서 통일로



5월에서 통일로


최양현진

1984년 말 광주에서 자라난 더벅머리의 광주 젊은이가 남쪽 가요계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아름다운 가사와 통기타 하나를 둘러멘 그는 85년 ‘가요톱10’이란 프로그램에 등장해 ‘바위섬’ 하나로 당시 기라성 같은 가수들을 뒤로 하고 당당히 1위에 올랐다. 이 노래는 당시 젊은이들이에게 상당한 사랑을 받으며 이후에도 우리에게 꾸준히 불린 노래가 되었다.

‘파도가 부서지는 바위섬 인적 없던 이곳에’로 시작되는 바위섬은 서정적인 가사에 김원중 씨의 목소리가 더해져 어느 바닷가에 나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젊은이들의 MT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애창곡이 된 이 곡 바위섬은 그 겉으로 보이는 가사와 다른 내용이었다.

그 속에 담긴 내용은 80년대 우리사회의 가장 큰 아픔으로 자리 잡은 80년 5월 광주였다.

그러고 보니 바위섬을 광주로 바꾸어 부르니 그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광주 너는 내가 미워도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해
다시 태어나지 못해도 너를 사랑해
이제는 갈매기도 떠나고 아무도 없지만
나는 이곳 광주에 살고 싶어라’


그랬다. 80년 광주는 우리의 이웃을, 우리의 친구를, 우리의 형제자매를 떠나보내야 했던 곳이다. 잔인한 5월이지만 그곳 광주는 8,90년대를 살아온 젊은 청년들에게는 절대 떠나지 못했던 마음의 고향이었다.

그 광주를 우리의 대중음악은 오랫동안 거부해왔다. 그러나 우리 가수들은 그 광주를 꾸준히 노래해왔다. 이런 노력은 김원중 씨가 처음은 아니었다. 1981년 MBC 대학가요제에서 한양대에 재학 중인 정오차 씨는 ‘바윗돌’이란 노래로 대상을 차지했다. 그는 방송 인터뷰에서 바윗돌의 의미를 묻는 아나운서의 질문에 “광주에서 죽은 친구의 묘비”라고 대답했다. 이후 대학가요제 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상 곡이 금지곡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89년 송시현 씨는 당시 최고의 가수인 이선희에게 ‘한바탕 웃음으로’란 노래를 주어 광주를 노래하게 했다. 최백호 씨도 95년 ‘들꽃처럼’이란 노래를 발표하며 광주를 얘기했다. 이 노래들은 모두 당시 검열을 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은유를 사용했다. 오히려 세상모르는(?) 대학생인 정오차 씨는 솔직히 자신을 말하는 바람에 노래와 함께 사라졌다. 최백호 씨는 광주를 당당히 얘기 할 수 있는 시기에 좀 더 솔직하게 광주를 노래했다.

그러나 80년대 김원중 씨는 은유를 택했다. 그런 그의 은유는 통일이라는 새로운 길을 찾게 했다. 바로 문병란 시인의 시를 노래한 ‘직녀에게’였다. 견우와 직녀가 만나고 싶어도 만나지 못하고 일 년에 단 한 번 칠월칠석에 만나는 아픔을 우리 민족의 분단에 비유했다. ‘직녀에게’는 그가 처음 발매한 음반인 87년 1집 앨범의 타이틀곡으로 대학가에서 꾸준한 사랑을 받았다. 그의 노래는 남쪽의 대학가를 지나 북의 대학가로 이어졌다. 북의 김일성 종합대학 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로 ‘직녀에게’가 뽑혔다.

5월의 노래로 세상에 나타난 그는 아직도 광주에서 그날을 노래한다. 그리고 이제는 통일을 노래하는 가수로 우리의 곁에서 노래하고 있다.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


참여연대 NOW

실시간 활동 SNS

텔레그램 채널에 가장 빠르게 게시되고,

더 많은 채널로 소통합니다. 지금 팔로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