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9년 12월 2009-12-01   1709

최성각의 독서잡설_문학이 할 일을 대신하는 경제학자 우석훈



문학이 할 일을 대신하는 경제학자 우석훈

최성각 작가, 풀꽃평화연구소장


우석훈의 책은 우선 읽기에 경쾌하다. 그가 다루는 고통스러운 내용의 이야기도 일단 전달되어 오는 방식은 즐겁게 다가온다. 어깨에 힘을 주지 않고 방망이를 휘두르는 사람의 자유로움과 편안함이 그의 문체에 있다. 문체라기보다는 그의 기질 같다. 그래서인지 그가 쏜 화살은 대체로 과녁을 잘 맞춘다. 빨리 타넘고 가야 할 한 시대의 매우 슬픈 현상을 간단하게 요약해버린 ‘88만원 세대’라는 신조어를 개발한 것도 적중률이 높은 그의 활쏘기 재주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그가 최근에 펴낸 『생태요괴전』을 손에 들고 아무 곳이나 펼쳐보자. 그의 책 어느 곳에서도 그가 자주 사용하는 형용사인 ‘명랑한’ 기운이 깔려 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한국 사람들이 자연을 사랑하는 방식은 대체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 첫째, 말 그대로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 / 둘째, 자연을 골프장으로 바꾸어, 그 안에서 자연을 즐기는 사람. / 이 두 부류의 인간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대부분의 정상적인 인간과 소수 ‘개발요괴’라고 부를 수 있다. 개발요괴가 즐거워지려면 너무 많은 생태적 가능성이 파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한국의 자연은 스코틀랜드와 다르고 미국과도 다르기 때문이다. / 조금만 생각해도 금방 알 수 있지 않은가? 스코틀랜드 태생의 금잔디가 한국의 골프장에서 살아남으려면 얼마나 많은 제초제와 농약의 도움이 필요한지, 그리고 평평한 골프장 지형을 만들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산지를 깎아내야 하는지…. 그런 것은 생각해본 적 없다면 바보이고, 알면서도 그랬다고 하면 악질이다.”(『생태요괴전』, 158쪽)

골프 치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바보’이거나 ‘악질’, 둘 중의 하나다. 골프 치는 사람들의 자의식은 죽었다 깨나도 스스로를 바보라고 여기지 않으므로, 그들은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악질’로 간주해도 되는 것이다. 한국 사회를 살아내면서 바보나 악질이기를 거부하는 삶이 어떻게 이 세계의 고통에는 무심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마냥 골프채를 휘두를 수 있을까? 그가 쏜 화살이 과녁을 맞추는 방식이 대충 이렇다.


부조리한 세계의 ‘참을 수 없는 불안정’

우석훈을 처음 만난 때는 오래 전의 일이지만, 『녹색평론』 편집자문회의장에서였다. ‘회의장’이라고 써놓고 보니 거창한 장소 같지만, 삼청동 골목의 보쌈집이 그곳이었다. 두부와 막걸리 주전자가 도는 보쌈집 화장실 앞 문간방에 비좁게 찡겨 앉아서 얼추 인사를 나눴다. FTA를 굳이 강행해야만 한다는 정권에 대해 도무지 그 강집强執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성토가 당시 그 모임에서 늘 되풀이되던 끈질긴 주제였다.

사실 나는 그 전부터 그를 알고 있었다. 아토피에 신음하는 아이들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그가 쓴 『아픈 아이들의 세대』를 읽을 때부터, 우리가 먹고 있는 것들이 바로 우리를 망친다는 문제의식에서 쓴 『음식국부론』을 읽을 때부터 나는 그를 범상한 경제학자로 볼 수가 없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남의 애들만큼이나 자신이 몸소 이 세상에 등장시킨 자기애들 걱정을 더 심각한 어조로 피력했고, 그 애들에게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무엇을 ‘멕’이고, 최소한의 가거지家居地로서 어디로 이주해야 옳을 것인가, 고민하는 정직한 사람 같았다. 환경판에서 매체를 펴내는 사람들에게 나는 그의 책을 적극 선전했고, 내가 일하고 있는 연구소에서 펴내는 웹진(풀꽃평화목소리)을 통해서도 그의 책과 고민, 혹은 그의 출현에 대해 반갑게 소개하곤 했다. 그런 호감이 지속되어 나는 수년 전 <한겨레>가 섹션지면을 통해 ‘녹색에세이’라는 지면을 마련했을 때, 격주로 쓰던 1년 여 연재가 끝난 뒤, 그 후속필자를 찾는 한승동 기자에게 주저 없이 그를 소개했다. 한기자는 그를 추천하는 나를 믿었는지, 추천받은 우석훈을 믿었는지 ‘달려라 냇물아’라는 타이틀의 내 글이 끝난 뒤, 그에게 지면을 부탁했다. 그가 쓰기 시작한 연재물이 곧 ‘명랑한 국토부’였다. 내 연재물의 타이틀이 그저 아득하기만 한 고전적 은유였다면 난데없이 출현한 ‘명랑국토부’는 차라리 도발적이기조차 했다. “이것은 세대차다”, 하면서도 이 사람은 보통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의 등 뒤에서 총을 쏜 게 아니라 찬사를 표한 나의 존재를 나중에 알고, 후일 만났을 때 그만의 방식으로 짧게 감사를 표했는데, 그것도 인사 받을 일인지 몰라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나는 쑥스러웠다.

처음 만남 이후 몇 차례 더 만났는데, 그는 말할 때 다른 사람들과 좀 다르게 말했다. 말할 때마다 그는 두 손을 함께 사용했다. 허리는 조금 굽어 있었고, 젊은 날부터 하고 싶은 공부를 원 없이 한 사람답게, 그래서 무거워진 머리는 늘 막걸리 탁자 아래로 쏟아질 것처럼 흔들렸다. 말할 때 그는 딱히 가려운 데가 없는데도 마치 마임이스트처럼 자주 두 손을 머리(통)를 긁적이는 데 사용했다. 도저히 가만히 얌전하게 앉아 있지를 못하는 사람이었다. ‘귀국한 프랑스 박사학위 소지자’ 등속의 권위는 그의 행동거지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유시민 전 장관은 넥타이를 싫어하고, 청바지를 입는 것으로도 부족해 자신의 탈권위적인 소탈함을 기회 있을 때마다 말로써 한번쯤 더 강조하는 데 반해 그는 비권위적인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굳이 언어를 도구로 삼지는 않았다. 마패가 있다고 말하는 암행어사가 이재오나 유시민이라면, 우석훈은 그의 몸짓이 곧 말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얌전하게 앉아 있지를 못하고, 끝없이 머리를 흔들고, 말할 때에는 머리에 거미줄이 낀 것처럼 두 손으로 허공의 있지도 않은 거미줄을 끝없이 걷어내는 시늉을 함으로써 그는 부조리한 이 세계에서 도저히 잠시라도 좌불안석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참을 수 없는 불안정’이라 요약할 수 있는 그의 제스처를 나도 장난삼아 흉내 낼 수 있겠다 싶었지만, 실례가 될까봐 참았다. 그러나 속으로는 “참으로 이상한 사람이다”, 하는 생각과 함께 “이 사람이 이제 보니 천재형이로구나”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한번은 집이 같은 방향이라 그와 같이 택시를 탄 적이 있었다.

그가 난데없이 물었다.

“최선생님. 우리 나라의 도로면적과 주거면적 중 어느 쪽이 더 넓을까요?”

모든 제대로 된 질문이 그렇듯이 이미 질문 속에 문제의식이 있으므로, 사실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문제였지만, “으음, 어쩌면 도로 면적이 더 클지도 모르겠네요”라고 답하는 것으로, 나 역시 그 문제에 대해 한번쯤은 골똘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 척했다. 이 문제의 답을 알기 위해 할 계산은 매우 쉽다. 이 나라의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의 넓이를 모두 계산해서 합한다, 그리고 이 나라에 사람이 사는 집과 마당의 면적을 모두 합한다. 계산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답이 나온다.

“자료를 구하기 쉽지 않을 텐데요.”라고 내가 말하자, 그는 “나는 자료를 어디에서 어떻게 구해야 할지 알고 있기 때문에 계산하려고 든다면 그다지 어렵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늦은 그날 밤, 나는 알았다. 이 나라의 도로 총면적과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이 국토에서 차지하고 있는 총면적을 비교해 보려는 젊은 학자와 한 택시에 동승하고 있었던 것을. 고삐 풀린 토건국가에 대한 접근을 그는 그렇게 ‘우석훈식(式) 상상력’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그가 공저로 펴낸 『88만원 세대』가 불우한 시대가 원인이 되어 그만 확 떠버려, 그 신조어가 누구나 입에 올리는 일상어가 되어버리기 한참 전의 일이다.



상상력, 예술, 농업… 아직은 남아있는 미래

『88만원 세대』가 20대를 대상으로 한 우석훈식 애정의 표현이었다면, 『생태요괴전』은 10대들을 위한 책이다. 정확하게는 13살부터 18살 가량의 청소년들을 겨냥하고 쓴 책이다. 저자는 생태경제학 시리즈라는 이름으로 전4권을 기획한 모양인데, 『생태요괴전』과 『생태페다고지』, 두 권을 일단 지난 가을에 펴냈다. 『생태페다고지』는 어린이를 키우는 어머니와 교사들을 대상으로 쓴 책이다. 두 권의 책을 저자는 쌍둥이 책으로 간주해 주기를 바란다.

『생태요괴전』에는 ‘세계의 메이저급 요괴들’과 ‘한국의 개발요괴’가 대거 등장한다. 책의 끝부분에는 이 요괴들을 퇴치할 퇴마전이 처방전처럼 담겨 있다.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를 밝히는 머리말에서 나는 명치끝이 조금 아려오는 통증을 느꼈는데, 왜 그랬는지 모른다. 우석훈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나는 이제 과학의 세계에 속하는 사람이다. 어릴 때의 나는 드라큘라 백작도 보고, 숲 속에서 플래시를 비출 때마다 나무 사이로 달아나는 숲의 정령도 보고, 개나리꽃 너머에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나무귀신도 보았는데, 이제는 내 주위에서 그런 것들을 볼 수 없는, 그런 과학의 세계에 속한 사람이다. 따라서 지금부터 나는 내가 볼 수 없는 것들을 보는 사람들과, 우리가 잘 모르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른다. 무슨 상관이랴.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 10년간 한국은 그렇게 합리적인 세계가 아니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엄청나게 과학적인 세계에 대한 이야기나 혹은 진리에 대한 이야기를 할 생각은 전혀 없다. …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책은 생태에 관한 책이고, 생태학에 관한 책이고, 경제학에 관한 책이라는 점이다.”

‘생태경제학’이라는 낯설고 어린 학문에 일찍부터 뛰어든 40대의 한 사내가 책을 읽을 만한 나이가 되어 만난 21세기 초반의 우리 청소년들에게 사라진 요괴들, 다시는 볼 수 없는 요괴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이제는 ‘정령의 세계’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과학의 세계’에 속한 사람이라고 술회하는 장면은 우석훈 특유의 명랑한 천성에도 불구하고 왠지 조금은 비장하고 그래서 처연한 감을 주기도 했다.

기실은 중세가 아니라 20세기초에 등장한 드라큘라라는 이미지가 어떤 배경 속에서 출현했는지 아는가? 그의 신분이 한 지역의 봉토를 지배하던 백작의 신분이었고, 그가 좋아하는 사람의 피를 오늘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 아는가? 저자는 드라큘라를 초일급의 요괴로 책봉한 뒤, 오늘날의 드라큘라 백작이 바로 다국적기업의 자본가라는 것, 그리고 백작이 미칠 듯이 좋아하는 피는 오늘날 ‘이윤profit’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재미있게 풀고 있다. 사람들은 드라큘라를 두려워하듯이 다국적기업의 독식과 오만을 두려워하고, 노동자의 피를 빨아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만이 유일한 존재이유인 이 요괴와 드라큘라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는 것을 이내 이해하게 된다. 이어서 좀비나 프랑켄슈타인이 등장하고, 동방불패도 등장한다. 우리 삶을 통째로 쥐락펴락하는 신자유주의 시대 속에서 ‘사람의 얼굴을 한 기업’을 요구한다는 것은 드라큘라에게 “피를 그만 좋아하시라”고 권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이야기는 이 시장 자본주의와의 한판 대결이 결코 쉬운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드라큘라와의 대적에는 십자가나 마늘 같은 극약처방이라도 있지만, 이윤의 극대화를 위해서는 지구를 몇 백 개라도 집어삼킬 현대판 드라큘라의 탐욕은 제어불가능하다는 통찰과 우려도 우석훈은 빠뜨리지 않는다. 죽어서도 노예노동에 시달리는 가련한 좀비는 곧 ‘대량생산 대량소비’ 시대에 새롭게 등장한 거대 소비자 집단이 가진 이중성에 대한 연민으로 이어진다. 자신을 창조한 인간을 죽이고 스스로 북극으로 사라져간 괴물 프랑켄슈타인 역시 첨단 과학기술이 빚어낼 끔찍한 사태의 은유로 등장한다. 또한 인간이 그동안 마구 모욕한 자연의 역습은 이 책에서 생태요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스스로 욕망의 요괴가 되어 미증유의 괴물을 허락했고, 그 괴물과의 합종연횡으로 인해 맞이하게 된 다양한 얼굴의 생태요괴의 기습에 장차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그것이 청소년의 정서와 눈높이에 맞춘 이 책의 주제다.

그러나 우석훈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세계의 요괴들이 아니라 한국에서만 기승을 부리는 토종 개발요괴들이다. ‘아파트를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콘크리트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돈을 생각하면 황홀해지고, 경쟁이라는 단어에서 푸근함을 느끼는 경제적 동물’이 바로 개발요괴들이다. “지난 몇 년간 OECD 국가들에서 ‘다음 세대’들에게 생태교육을 더욱 강화하는 동안, 한국에선 어린이들에게 『어린이 마시멜로』를 쥐어주고, 재경부와 전경련에서 ‘어린이 경제교실’이라는 프로그램을 대대적으로 실시하고, 중고등학생이 되면 담임요괴가 ‘지면 죽는다’라고 끊임없이 설교를 하고, ‘엄마에’가 ‘엄마 말 잘 들어야 착한 사람이지?’라고 속삭이며 ‘정치적으로 무감각한 순둥이’를 길러내고 있는 데” 대한 우석훈의 비판과 우려는 날카롭고 격렬하다.

어떤 퇴마술이 가능할까? 우석훈식 퇴마술의 요체는 한마디로 ‘넓게 생각하고 좁게 살기’다. 과시적 욕구로 가득 찬 본능, 혹은 마케팅에 의해 급조된 욕망의 지시에 따라 살아가는 것은 ‘넓게 살기’다. ‘좁게 살기’는 이와 반대되는 삶의 상징적 표현이다. 좁게 살려면 생각을 많이 해야 한다. 넓게 생각해야 좁게 살 수 있다. 좁게 사는 일은 싸게 사는 일과는 다르다.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기, 독서와 문화의 창달, 주체적 경험 들이 넓게 생각하기의 도구들이라고 제시한다. 그래야만 개발요괴의 전성기를 극복하고, 다가오는 ‘희소성의 시대’를 감당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물리적, 경제적 힘은 개발요괴들이 이미 장악한 상태이지만, 상상력, 예술, 농업의 영역은 온전히 10대들에게 남아 있다는 게 우석훈식 퇴마술의 핵심이다. ‘언젠가 농부가 되고 싶은 사람들에게’라는 글은 눈물겹고, 뜨겁다. 그 글에서도 우석훈이 또 다짐한다. “니네들 10대들이 피눈물 흘리지 않도록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리라”고.

언제부터인가 얼(정신)이 빠져 기교만 승한 한국문학이 못하고 있는 일을 지금 가슴 뜨거운 한 경제학자가 대신하고 있다.


『생태요괴전』, 우석훈
개마고원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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