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8년 10월 2008-09-01   639

북리뷰_과거와 현재의 대화

과거와 현재의 대화

은수미 한국 노동연구원 연구위원 esumi@kli.re.kr

이미 15년쯤 되었나보다. 두 번째 감옥살이는 꽤 길었고 시작부터 힘겨웠다. 고문 후유증과 정신적 피로 때문이었는지 소장과 대장을 잘라내는 대수술 말고도 결핵에 후두염까지 내내 병치레로 보냈다. 몸을 누이면 꽉 차는 창문 없는 독방. 냉방이 안 되는 여름에는 35도를 넘고 난방이 안 되는 겨울에는 아침에 일어나면서 “나 말고 다 얼었네?” 하며 웃던 그곳. 오죽 건강했으면 전기충전 인간이라고 붙여진 별명이 ‘아톰’이었을까마는 너무 아파 가끔은 앉아 있기도 버겁던 그곳, 어두운 방에 누워서 손에서 놓지 않았던 것이 시와 소설이다.

온갖 질문과 의혹으로 마음이 지옥일 때, 말하는 법을 잊은 것은 아닐까 문득 두려울 때, 여사 뜨락의 유일한 나무에 봄빛이 하얗게 웃는 것을 보다 눈물이 나려 할 때, 문자세대인 나에게 벗이 되어준 수많은 책들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 중에 몇 권을 다시 읽는 것으로 이 글을 시작할까 한다.

아픔을 어루만져주던 시의 힘

나희덕의 두 번째 시집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에 발표된 시, “빨래는 얼면서 마르고 있다”의 건강함은 당시 아픈 내 몸과 마음을 위로했기에 맨 먼저 손이 간다. 난데없는 구속으로 일상에서 격리된 수많은 네티즌들과 그 소식에 가슴 아픈 사람들에게 이 시의 건강함은 여전히 위안일 지도 모른다.  

이를 테면, 고드름 달고 / 빳빳하게 벌서고 있는 겨울 빨래라든가 /
달무리진 밤하늘에 희미한 별들, / 그것이 어느 세월에 마를 것이냐고 / 또 언제나 반짝일 수 있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 나는 대답하겠습니다 / 빨래는 얼면서 마르고 있다고, / 희미하지만 끝내 꺼지지 않는 게 / 세상엔 얼마나 많으냐고 말입니다. / 상처를 터뜨리면서 단단해지는 손등이며 / 얼어붙은 나무껍질이며 / 거기에 마음 끝을 부비고 살면 / 좋겠다고, 아니면 겨울 빨래에 / 작은 고기 한 마리로 깃들여 살다가 / 그것이 마르는 날 / 나는 아주 없어져도 좋겠다고 말입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 내 짐이 가장 무겁고 가장 아프게 느껴질 때 만났던 브레히트도 찾아 읽는다. 그의 번역 시집 『살아남은 자의 슬픔』 중 ‘나의 어머니’에서 브레히트는 말한다.

그녀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녀를 땅 속에 묻었다.
꽃이 자라고, 나비가 그 위로 날아간다…
체중이 가벼운 그녀는 땅을 거의 누르지도 않았다.
그녀가 이처럼 가볍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 이 짤막한 구절을 발견한 것은 내게 행운이었다. 다른 사람 역시 나 이상으로 아프고 힘겹다는 사실을 깨닫고, 감옥의 긴 세월 동안 미소를 잃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힘겹지만 또한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부라는 느낌은 따스한 행복이자 위안이었다.

끝없는 실패에도 꿈꿀 수 있는 자 행복하다

이 위로가 작은 희망으로 커진 것은 에른스트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를 접한 후였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 무려 5권으로 완간되었지만 당시에는 1권만이 발간된 그 책을 읽으며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끊임없이 유토피아를 꿈꾼 일군의 사람들을 만났다. 나의 20대를 뜨겁게 달구었던 마르크스주의도 그와 같은 꿈의 일환이라는 발견은 내게 평화를 주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서 희망을 꿈꿀 권리가 있고, 비록 끊임없이 실패한다 해도 꿈을 꾸는 사람들은 또 생겨난다. 나의 실패는 작은 것일 뿐, 인간의 역사에서 아주 작은 것일 뿐, 끝없는 실패의 연속이라 해도 꿈을 꿀 수 있는 자는 행복하다는 작은 확신이 아픈 몸과 마음을 추스르게 했다. 하지만 이 ‘긴’ 철학서를 추천할 자신은 없다. 다만 어렵게 읽기 시작한다면 책만큼 ‘긴’ 위로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보장한다.    

  
   

물론 희망의 빛은 성냥불처럼 순간적이어서 감옥에서의 대부분의 시간은 몸이 묶이니 꿈도 묶인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꿈속에서나마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을 기대했지만 단  한 번도 그런 행운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브레히트가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서 말하였듯이 나 역시 살아남으려 안간힘을 쓰는 것이 미워지기도 했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어떻게 살아남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닐까. 꿈을 꾸며 살아남는다면 먼저 간 사람들도 웃어주지 않을까. 시집을 덮으면서 그렇게 위안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꿈속에서 먼저 간 사람들의 모습을 본 듯할 때면 그런 다독임도 그다지 힘이 되지는 않았다. 그 때 백무산의 시집 『인간의 시간』을 펴들었고 그의 시 ‘인간의 시간’ 마지막 구절에서 잠시 숨을 멈추었다. 그런데 지금도 숨을 멈추게 된다.   

역사가 강물처럼 흐른다고 믿는가
그렇지 않다
단절의 꿈이 역사를 밀어간다

또한 80년대가 끝난 후 그 허망함을 견뎌냈던 사람들은 비슷했나 보다. 백무산의 시 ‘매화’는 이렇게도 말한다.

…매화라도 한참 때 이른 계절에
저도 이를 아는지
가지마다 봉오리 꽃봉오리 붉은 잎 다 피웠네
칼날 바람에 뚝뚝 붉은 잎 떨구네
마른 풀섶에 얼음강에 핏방울로 떨구네
해마다 산마을 봄 가장 먼저 부르더니
목숨 남은 날 마지막 순간을 앞당겨
스스로 피 흘려 봄을 부르네

지금은 세상에 없는 사람이여
피 한 방울 헛되이 살지 않은 사람이여.

이 시가 던져준 여운이 컸는지, 바로 그 페이지에 90년대 후반부터 지급되었던 한 자루 볼펜으로 써놓았던 글을 이제야 다시 본다. “스스로 피 흘려 불렀던 봄, 그 봄은 소리로만 있는가. 눈 밑 가득 만져지는 잔주름에, 문득, 봄을 볼 수 있겠는가, 그것마저 포기한다. 완전히 빈 마음으로 남은 목숨을 살아가리라. 97. 2. 16.” 97년이면 내가 감옥에서 살아 걸어 나온 해이고 결핵이 완치되었던 해이다. 빈 마음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 시에 고마워했던 모양이다.

     
     

오직 양심과 진실을 좇아 ‘나는 고발한다’

하지만 10년이 흐른 후, 여전히 비우고 사는지 대답을 찾지 못하면서 발견한 책이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이다. 에밀 졸라는 로망 롤랑과 함께 입시에 힘겨웠던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을 채워준 작가이다. 지금의 입시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당시에도 대입의 부담은 컸다. 더군다나 감시와 통제가 심하던 시절의 여학교는 흡사 어두운 수녀원과 같았다. 은밀하게 여고괴담이 양산되고 인터넷은커녕 다른 놀거리도 없는 규격화된 학교, 해외여행은 금지이고 국내여행도 어려운 일상에서, 책은 유일한 숨통이었다. 그 와중에 만난 에밀 졸라의 대표작 『목로주점』과 『나나』의 충격은 컸다. 아침 7시부터 저녁 10시까지 학교→도서관→집을 오가는 10대의 일상에서는 상상할 수 없던 사람들의 삶이 글자로 전해질 때, 근로 빈민들이나 서민들의 삶이 시공간을 넘어 눈앞의 현실처럼 느껴질 때, 기존의 제도와 관행에 대한 믿음이 뒤흔들리는 것을 희미하게 느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30대 중반이 넘어 대학 4학년에 재입학한 후 박사학위를 따고 직장에 입사하면서 졸라를 잊었다. 그래도 드레퓌스 사건을 통해 프랑스의 양심을 고발한 그의 글 13편이 묶여 『나는 고발한다』는 이름으로 출간됐다는 것을 알자마자 구입하여 읽은 것을 보면 어릴 적 충격이 남았던 것일까. 느닷없는 궁금함이 더 중요한 이유이다. 나이가 들수록 과거와 현재에 집착하고, 나이가 들수록 보수적이 된다. 그럼에도 인생의 황혼기에 졸라는 “단언하건대 드레퓌스는 무죄이다. 나는 거기에 내 생명을 걸고, 내 명예를 걸겠다”고 했다. “진실이 전진하고 있고, 아무것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하리라”고 확신했다. 그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글이 발표된 당시의 정황을 살펴보면 이 질문은 오히려 너무 늦었다. 1894년부터 1906년까지 12년에 걸쳐 진행된 드레퓌스 사건에서 에밀 졸라는 모든 타협책을 거부하며 진실규명으로 일관했다. 독일에 패배한 후 제3공화국 프랑스의 대외 정책이 온통 독일에 대한 복수에 집중되어 있던 시기, 프랑스 국민이 반독일과 반유태 애국주의에 휩싸인 바로 그 혼란기에 60세를 넘은 노 대가는 진실을 위해 런던 망명까지 감수했다. 드레퓌스 자신조차 수용한 사면을 거부하면서 졸라는 대가를 치렀다. 10년여를 공들여온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 피선도 물건너갔고 유태인 조직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중상모략에 시달렸다. 재판비용, 작품 판매 부수의 격감, 망명생활과 집필 시간 부족으로 파산상태에 이르렀다. 더군다나 그는 드레퓌스의 무죄가 입증되기 전에 의문의 가스 사고로 사망했다.

1900년 12월 22일 <로로르>지에 발표된 ‘공화국 대통령 에밀 루베 씨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죽음을 예감한 듯 “한 걸음 전진할 때마다 하나의 고통이 따를 것입니다. 어쩌면 아버지가 이룬 성공을 아들이 확인해야 할지도 모릅니다”라고 쓴다. 궐석 재판으로 이루어진 유죄 선고 이후 상소할 권리마저 박탈되고 고립된 상황에서도 그는 “아! 고독한 사람이 된다는 것, 어떤 정파에도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 오직 자신의 양심만을 따른다는 것은 얼마나 고귀한 일인지요! 오직 진실만을 사랑하면서, 진실이 대지를 뒤흔들고 하늘을 무너지게 할 때조차도 진실을 요구하면서 자신의 길을 꿋꿋이 간다는 것은 얼마나 고귀한 일인지요!”라고 한다.

특히 1898년 로로르지에 발표된 그 유명한 ‘나는 고발한다!’에서 프랑스를 고발한다. 심약함, 잘못된 조사와 사법적 오판, 은폐와 공범, 가증스러운 언론 캠페인, 인간 모독과 정의 모독을 이유로 전쟁 영웅들과 군사법정을 고발한다. 그러면서도 “프랑스가 결국 우리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리라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프랑스는 언제나 정의롭고 아름다운 대의를 위해 스스로 불타오르기 때문이다”(1897년 12월 1일 <르피가로>지에 실린 글 ‘조합’ 중에서)라고 자신의 믿음을 밝힌다.

『나는 고발한다』는 먼저 간 친구들이 사랑했던 우리의 조국과 졸라의 조국 사이의 간극을 보여준다. 이것은 후자가 에밀 졸라를 가졌지만 전자는 그런 사람을 갖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후자가 과거의 잘못에 대해서 단호하지만 전자는 과거의 잘못을 덮어버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현재까지도 똑같은 관행이나 행동양식을 갖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40대 중반을 넘어 이미 기득권층이 되어버린 나와 나의 세대 그리고 우리 선배세대가 진실보다 자신의 명예와 재산을 더 사랑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불안해졌다. 빈 마음 빈손으로 시작하자 했던 나의 첫 마음이 아직 유지되고 있는지 의심이 생겼고 그래서 노 작가의 책을 다시 찾았다. 『제르미날』을 읽고 『작품』을 읽으며 그 시대 사람들의 고뇌와 아픔, 기쁨과 행복이 100여 년이 지난 지금의 삶에서 부딪히는 문제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발견한다.


   

   

사람에서 시작된다

결국 사람을 사랑하는 것, 사람으로부터 희망을 찾는 것이 하나의 동력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또다시 한다. 언제나 돌아오는 꼭짓점이지만 돌아올 때마다 새롭다. 박노해의 『사람만이 희망이다』를 찾아든 것도 그 때문이다.

희망찬 사람은 / 그 자신이 희망이다.
길 찾는 사람은 / 그 자신이 새 길이다.
참 좋은 사람은 /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사람 속에 들어 있다. / 사람에서 시작된다.
다시 / 사람만이 희망이다.


  

버리고 또 버려 가볍게

최근 읽은 책을 훑어보다가 없어진 책들의 흔적에 가슴이 아프다. 자유의 몸이 된 이후 셋방을 전전하면서 많은 책을 버려야 했다. 특히 올 초 뉴타운 바람으로 전월세 값이 더 오르면서 손때 묻은 책들을 정리하고, 책과 함께 과거의 기억과 기록을 버려야 했다. 그 아쉬운 마음이 깊을 때마다 물어보았다. 이것이 과거에의 집착이라는 좋지 않은 현상은 아닌가. 나도 (부정적인 의미에서) 보수적이 되는 것은 아닌가. 현재와 미래를 위해 필요한 과거라는 미명아래 사실은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가. 아직 대답을 하지 못했다.

대개의 연구자들은 책 욕심이 많고 나 역시 예외가 아닌 단순한 현상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중한 것에 집착하다보면 소중한 것이 많아진다. 손이 차고 넘치는데도 더 쥐려 한다. 나의 서재를 만들고 싶다는 욕심에 무리하여 집을 사게 되고 더 큰 집을 위해 타협의 기술을 배우다 보면 챙기는 것은 나의 욕심이고 버리는 것은 사람에 대한 희망일 수도 있다.

감옥을 걸어 나오면서 그랬다.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이 마음을 잊지 않겠노라고. 그런데 요즘은 없는 것, 부족한 것이 더 많이 보인다. 육신의 자유조차 없었을 때는 무수한 겨울과 여름을 견디고 사회로 돌아가는 것만 해도 기쁘더니 이제 그 기억을 잊었다. 나의 부족과 고통에 탐닉하면 이웃의 기쁨과 고통에 무뎌진다. 과거와 현재 간의 대화는 사라지고 나의 미래가 전체의 미래로 대체된다.

그래서 버리면서 읽어야 할 모양이다. 기억과 기록마저 아까워하지 말고 점점 더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해야 할 모양이다. 땅에 뉘어지는 그 순간 너무 가벼워 흔적조차 없어질 때까지 버려야 할 모양이다. 이 글을 쓰면서, 삶은 현재에 집중하고 기뻐하되 머리와 꿈은 미래에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책을 소개하다가 결국 내가 또 배운다.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


참여연대 NOW

실시간 활동 SNS

텔레그램 채널에 가장 빠르게 게시되고,

더 많은 채널로 소통합니다. 지금 팔로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