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6년 01월 2006-01-01   640

화교 부부의 한국살이

맵찬 추위가 급습한 지난 12월의 어느 일요일, 남편을 따라 경기도 이천의 한 비닐하우스를 방문했다. 흔히 보는 비닐하우스를 반토막 내 한쪽에 벽을 쌓은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어서 멀리서도 눈에 잘 띄었다. 수은주가 영하 10도를 넘지 못하는 추위라 두터운 옷차림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갔던 나는 비닐하우스에 들어선 지 5분도 되지 않아 외투를 벗어야 했다. 비닐하우스 안은 초여름 날씨였고, 노란 토마토며 태국 샐러리 같은 이국적인 채소들이 싱싱한 초록을 한껏 과시하고 있었다. 이 비닐하우스는 난방을 하지 않아도 영상 15도 이하로 내려가지 않는데 그 비밀은 황토벽에 있다고 했다. 낮에 비닐을 통해 태양열을 받아 한껏 달궈진 황토벽이 온기를 내뿜어 밤에도 일정한 온도를 유지해 준다는 것이다.

비닐하우스의 주인인 50대 후반의 화교 부부는 이것을 보급해 어려운 우리 농촌을 돕고 싶다고 했다. 그들의 뿌리는 중국 산둥성에 있었고, 부인은 공자의 74세 손이라 했다. 부부 모두 할아버지 대에 한국으로 건너왔으니 이민 역사가 70년을 훌쩍 넘는 화교 3세 가정이다. 그렇지만 남편의 국적은 대만, 부인은 한국이다. 외국 여행을 갔을 때 입국심사대에서 “Where Are You From?”이라는 의례적인 질문을 받고 중국 사람이라고도, 대만 사람이라고도, 한국 사람이라고도 똑 부러지게 대답할 수 없는 자신들의 처지에 심경이 무척 복잡했노라고 털어놓았다.

한때 7~8만 명을 헤아리던 재한 중국인의 숫자는 지금 2만 명을 간신히 넘는다고 한다. 미국, 호주, 뉴질랜드 등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저마다 이유가 있겠지만 “어디 이래도 계속 살 테면 살아봐라”고 등을 떠미는 듯한 극심한 차별대우와 제약을 모르지 않는 나로서는 미안하다는 말도 못하고 얼굴을 살짝 붉혔을 뿐이다. 화교가 재이민한 나라는 한국뿐이라고 했다.

부인은 IMF 직전 서울에서 열린 세계 화상(華商) 대회에서 어느 태국 화교의 연설에 무척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나는 태국사람이다. 우리가 하루라도 가게 문을 열지 않으면 태국 경제가 안 돌아갈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태국 국왕은 나의 형제다”며 태국으로 오라고 큰소리 치는 그를 보면서 한국에서 화교는 어떤 존재이며, 한국을 영원한 삶의 터전으로 여기는 자신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고민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첫눈에도 풍채 좋은 호인으로 보이는 남편은 한국과 중국에 아는 사람이 많은 마당발인데다 무엇을 심고 가꾸기를 좋아하는 성격. 그의 고향은 중국에서도 이름난 채소 산지였다. 그곳에서 비닐하우스 기술을 들여와 한국 실정에 맞게 고치는 일을 10년 가까이 하느라 알게 모르게 재산도 많이 축낸 것 같았다. 부인은 자기도 정확하게 알고 싶어서 남편에게 물어본 적이 있으나 “미래 세대를 위해 가치 있는 것을 남기는 일이니 돈이 문제가 아니다”는 대답만 들었다고 한다. 말릴 수 없다는 걸 알고 자신이 포기하고 말았다고 하는 부인은 남편의 일을 돕기 위해 한국 국적을 취득할 정도로 든든한 동반자였다.

돈이면 어떤 것도 합리화될 수 있다고 믿는 시대에 돈이 문제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신념과 남의 선택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아량이 부러웠고, 나라도 버린 농민들을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고진하 (참여사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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