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6년 11월 2006-11-01   10372

탐관오리 조병갑의 증손녀, 역사를 얕잡아 보다

최근《월간조선》11월호에「조기숙 전(前) 청와대 홍보수석은 탐관오리 고부군수 조병갑의 증손녀」라는 특종기사가 실렸다. 이 특종기사로 인해 조 전 수석은 자신이 한나라당과 조선일보를 향해 정치공세의 무기로 사용했던 ‘과거사’를 부메랑으로 맞고 말았다.

노무현 정권 하에서 조선일보와 월간조선이 즐겨 쓰는 ‘족보 캐기’에 의해 ‘과거사 부메랑’을 맞은 정치인은 김희선, 신기남, 이미경 의원 등 한 두 명이 아니다. 그런데 과거사라는 ‘판도라 상자’가 열리자 조선일보의 방응모 사장, 동아일보의 김성수 사장, 한나라당 박근혜 의원의 부친 박정희 전 대통령이 모두 과거사 부메랑을 맞은 여당 정치인들의 선친들과 끈끈한 친일파 동지들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조기숙 전 수석 개인으로서야 불법 심부름센터를 동원한 청부살인을 당한 것 같은 억울함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조 전 수석이 과거 청와대 홍보수석 때 친분을 맺었던 기자들에게 보낸 변명메일은 우리 사회의 기득권 세력으로 남아 있는 과거사 청산 대상자 후손들의 논리와 너무나 똑같다. 조 전 수석은 자신의 증조부 조병갑이 동학혁명을 유발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 오류 가능성까지 거론했다. 또한 “(조병갑) 군수는 재판을 받고 귀양을 간 것이 아니라 무죄선고를 받았다”는 역사왜곡까지 서슴지 않았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가 『승정원일기』,『일성록』,『고종실록』,『매천야록』,『관보』,『동학란기록』같은 기본적인 역사기록만 들쳐보아도 바로 확인이 가능한 거짓말을 한 것은 역사를 얕잡아 보아도 한참 얕잡아 본 것이다. 『승정원일기』고종 31년(1894) 4월 24일자에는 조병갑이 의금부에서 심문을 받을 때 모르쇠로 일관하며 “모호하게 공초하고 끝내 사실대로 진술하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승정원일기』고종 31년(1894) 5월 4일자에는 조병갑을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살기 어려운 섬으로 귀양 보낼 것을 명했다. 결국 조병갑은 재판에서 무죄를 받은 것이 아니라 유죄판결을 받고 전라도 고금도로 귀양살이를 떠났다.

『관보』개국 504년(1895) 3월 12일자에는 총리대신 김홍집과 법무대신 서광범이 “조병갑 등은 지은 죄에 비해 처벌이 가벼워 국법을 올바르게 적용하지 못했다.”면서 “그들을 다시 체포하여 징계하라고 간청”하여, 그를 유배지에서 체포하여 왔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어떻게 다시 대한제국의 판사가 되어 동학의 2세 교조인 최시형 선생에게 사형을 언도할 수 있었을까? 바로 그 해답은 황현 선생이 지은 『매천야록』에 나와 있다. 조병갑이 체포되어 서울로 올라온 지 얼마 안 되어 “박영효가 도주하고 조정에서 다시 변란이 발생하여 그 죄인들은 숨을 죽이고 있다가 모두 처벌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황현 선생은 “7월에 대사면령을 내려 조병갑 등을 모두 석방하였다.”고 기록하며, 이 때 지식인들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음을 탄식하고 있다. 월간조선과 조기숙 전 수석은 황현 선생의 이러한 탄식에 귀 기울이길 부탁한다. 자신과 그 조상의 범죄행위와 죄상을 기억하는 것은 고통스럽고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진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역사는 항상 되풀이 된다”는 역사의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박상표 참여연대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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