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5년 12월 2005-12-01   2220

보랏빛 수건 눌러쓰고 지성껏 악 쓰며 걸어온 민가협의 산 역사

임기란 민가협 전 상임의장

▲ 사진_김영광은행잎이 폭우처럼 쏟아지는 서울 탑골 공원 앞, 목요일 오후 2시. 어김없이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회원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1993년부터 시작되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단 한번도 거르지 않았던 민가협의 목요집회는 보랏빛 수건과 함께 어느덧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상징이 되었다. 비록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가슴 밑바닥에서 차 올라오는 소망으로 한 마음이 된 참석자들이 “국가보안법 폐지하고 모든 양심수를 석방하라”고 외치는 찰나, “빨갱이 년들, 집에 가서 밥이나 해”라는 거친 욕설이 날아온다. 목요집회가 시작된 지 10여 년이 지났건만, 절실한 외침에 진지하게 귀 기울이기보다는 욕설로 맞불을 놓는 세태 역시 여전하다. “빨갱이 손가락질, 이제 그만”이라고 늘 외쳐오던 참여사회 12월호 인터뷰의 주인공인 임기란 어머니(민가협 운영위원)가 그 자리에 없어 다행이다.

어머니가 민가협의 목요집회에 빠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오늘 참석하지 못한 이유는 “날마다 자빠지고 엎어지면서 거리에서 늙었고 병들었기”때문이다. 어머니는 현재 고혈압, 당뇨병 등 만성질환은 물론, 척추연골수술에 이어 다리연골수술까지 해야 하는 상태. 머리가 흔들려 누워있는 것조차 힘들다는 얘기를 듣고서도 무작정 서울 신림동 자택으로 찾아갔다. 인터뷰를 못하더라도 문병이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이었는데, 자존심 강한 어머니는 꼿꼿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 “난 체계적인 이론도 없고, 별 경력도 없는데, 왜 날 찾아왔어?”라며 퉁바리를 놓는다. 하지만 신철이 엄마에서 민가협 엄마로, 양심수들과 함께 울고 웃고 아파해 온 20년 세월이 어떻게 체계적인 이론보다 못하다고 할 수 있으며, 특별한 경력이 아닐 수 있는가.

맞고 쫓겨나며 온 몸으로 인권역사 새로 쓴 거리의 어머니들

임기란 어머니의 20년 세월은 다가오는 12월 12일 20주년을 맞이하는 민가협의 역사이다.

“85년에 미문화원점거라든가 학생들 데모가 많았잖아요. 우리 막내아들도 그 때 민정당 가락동 연수원을 점거해서 끌려갔지. 근데 도대체 애들이 어디로 끌려갔는지 모르는 거예요. 겁이 나서 아무도 구출할 생각을 하지 못했지만, 우리 엄마들은 하나 둘 씩 모여 자식들을 찾아다녔지요.”

“악 잘 쓰고 겁없이 싸우는” 사람이라 <구속자학부모협의회>회장으로 뽑혔다가 민가협 회장이 되었다. 어머니가 민가협 회장으로 선출된 곳이 서울 구치소 농성장이었다는 사실이 말해주는 것처럼 민가협은 “어미로서 우리 자식 살려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자식은 죄가 없다. 너희들 알고 보니까 독재다” 로 시작되어 “애들은 안에서 두들겨 맞고 우리는 바깥에서 두들겨 맞고 쫓겨나고 실신하는 식으로 점점 단련이” 된 조직이다. “서로 느끼는 절망감, 슬픔도 쪼개고 위로를 나누면서” 말이다.

어머니는 어떻게 20년이 흘러갔는지 모른다면서도 마치 머릿속에 필름이 있는 것처럼, 지난 20년을 조목조목 기억해낸다. 기억의 대부분은 분노와 슬픔이다. 그동안 눈가가 짓무르도록 울었을 텐데도 어머니의 눈에는 아직도 눈물이 차오른다.

“유가협은 자식이 죽은 가족이었고 우리는 산 자의 가족이라 굉장히 고달팠어요. 안 죽은 죄로 하루도 안 빠지고 어디 가랴, 장사 지내랴. 또 애들이 감옥에서 가만히 있지를 않잖아요. 등에다 치약으로 글씨 써서 재판장 나가고. 그러면 또 두들겨 맞고. 벌방이라고 벌레들 우글거리고 곰팡이 핀 방에 처넣고. 묶인 채로 밥 먹이니까 오줌 똥 바지에 싸고…. 지금 대한민국 참 좋아졌지요.”

아직 국가보안법이 엄존하며 테러방지법 제정 기도가 끊이지 않는 현실이지만, 한때 1,600여 명에 달했던 양심수가 2005년 10월 현재 61명(양심적 병역거부 수감자 제외)으로 줄어들었다. 고문 등 국가권력에 의한 가혹행위나 공안사범 조작 사건도 현저히 감소했다. 이런 변화의 중심에 민가협이 있었다. 어머니 스스로 “투철한 사상 같은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나라를 위해서 뭐가 한 가지는 한 것 같은” 긍지를 느낄 만 하다. 특히 어머니는 민가협이 우리 사회에서 완전히 묻혀 있었던 장기수 문제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 낸 사실에 대해 퍽 자랑스러워하는 듯 했다.

“쥐도 새도 모르게 감옥살이를 수십 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몰랐어요. 양심수 후원회 만들어서 영치금 넣기, 편지 쓰기를 하면서 석방 운동을 벌였지요. 김선명씨는 얼굴도 모르고 면회 간다고 했는데, 우리랑 똑같은 멀쩡한 사람이더라구요.”

인권 감수성을 끊임없이 갈고 닦아라

장기수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성이 ‘장’가고 이름이 ‘기수’인 사람인 줄 알았다는 어머니가 장기수 인권 운동의 역사를 새로 쓸 수 있었던 것은 “몸소 겪어야 하는 양심의 귀중함”에 대한 깨달음과 인권에 대한 부단한 자기 학습 때문이다. 한 민가협 활동가는 “어머니는 동성애자 인권 문제 같은 어머니 연배나 신앙인으로서 쉽게 품어 안을 수 없는 이슈의 경우에도 머리로는 이해되나 감성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을 슬퍼하면서 시도 때도 없이 간사들에게 묻고 또 물으며 새로운 인권의 감수성을 높이기 위한 노력한다”고 했다. 그런 노력이 막내아들이 두 차례 수감 생활을 마친 뒤에도 민가협 활동을 하게 되는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자식이 자유의 몸이 되면 민가협 활동에 소원해질 법도 한데, 어머니는 어떻게 20년을 한결같이 한 길을 갈 수 있었는지 묻자 “사람 수를 채워야 하기 때문에 빠질 수가 없었어요.” 한다.

▲ 사진_김영광“회원들이 병들고 많이 아파요. 어떤 엄마는 십 년 전에 방패에 찍혔는데 여태 머리가 아프고. 가정 파괴된 경우도 부지기수고. 나머지 가족들이 찬밥을 물에 말아 먹든 어쩌든 길에서 살아야 하니. 아들 잡혀가고 바로 위암 생겨서 돌아가신 경우도 있고. 또 문어가 자기 다리 뜯어먹듯이 자기 돈도 많이 들여야 하고. 어려운 일들이 많지요. 하지만 안일하거나 편안하게 민가협 회원이고자 한 사람은 없고, 남이 볼 때 귀신 씌듯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남이 볼 땐 헌신이지만 자기 스스로 몰두하고 집중하면서 한가지 일이 되면 나름대로 보람도 얻고, 아무것도 모르는 엄마들이 기여를 했구나 하는 자부심도 느끼게 되고.”

하지만 어머니가 수많은 좌절, 험준한 애로, 절망을 딛고 한 길을 달려온 데 빠뜨릴 수 없는 특별한 조력자가 한사람 있다. 바로 남편인 박희봉 씨. 어머니가 ‘보랏빛 수건 눌러쓰고 춘하추동 지성껏 악을 쓰며 궂은 일 슬픈 일 찾아다니는’ 동안 살림을 온전히 책임졌다. 그랬기에 어머니가 “나 같은 경우엔 참 좋아요. 내가 못 걸으니까 우리 영감이 꼭 현장까지 태워다 주거든.” 이라며 자랑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찾아간 날에도 떡이며, 과일 같은 먹거리가 풍성했는데 모두 그가 준비한 것이었음은 물론이다. 끊임없는 어머니의 주문을 찡그림 한 번 없이 성심껏 들어주는 그는 우리에겐 또 하나의 귀감이었다.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결혼해서 다섯 남매가 모두 일류대학 가는 것을 유일한 소망으로 가졌던 어머니. 길거리에서, 분노 속에서 하나하나 깨달아가며 ‘민가협 엄마’로 스스로를 키워왔다. “사람 죽는 게 제일 슬프고 학생이고 노동자고 석방될 때가 제일 기쁘게” 생각되던 고단한 시절은 이제 모두 지나간 것일까?

“국가보안법 사범이 줄더라도 집시법 등 실정법으로 끌려가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노동자, 농민, 철거민들이 많아졌지요. 그 사람들도 양심의 소리를 외친 것이니까 양심수이지요.”

어머니의 정의에 따르면 양심수란 “나 이외 다른 사람의 행복과 이익을 위해 자기가 손해 보고 불리해지더라도 바른 말을 외쳐 운동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어머니의 손길과 발품이 필요한 곳은 아직도 많다.

목요집회 필요 없는 그 날 위해

▲ 사진_김영광 

대학교 2학년 때 일이다. 대학마다 조직되어 있었던 00투쟁위 발대식. 위원장을 맡은 선배의 부모님이 미리 와 계셨다. 시위 한 번 주동하고 바로 감옥으로 향할 딸내미를 선선히 보낼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선배의 부모가 눈물로 선배를 끌어내릴 때 우리도 모르게 시작한 노래가 있었다. 바로 ‘어머니’라는 노래였다.

사람 사는 세상이 돌아와 / 너와 내가 부둥켜안을 때 / 모순 덩어리 억압과 착취 / 저 붉은 태양에 녹아내리네 (중략) 아아 우리의 분노 죽어간 동지의 뜨거운 눈물 / 아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두려움 없이 싸워나가리 / 어머니 해맑은 웃음의 그 날 위해.

임기란 어머니에게 해맑은 웃음의 그 날이 언제쯤일까? 새로운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이 되겠거니 하며 개최했던 목요집회가 벌써 600회를 앞두고 있다.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은 올해에도 열린다.

“나와 내 가족만 잘 사는 건 아무 소용없어요. 어떤 세상이 온다 해도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을 거란 말이에요. 그들과 함께 하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줘야지요. 가난한 나라에서 돈 벌겠다고 온 이주노동자들을 이 잡듯이 잡아가지 않았으면 좋겠고. 그리고 무엇보다 땅 딛고 하늘을 쳐다볼 수 없는 부자유가 제일 안 좋아요. 그런 암흑 같은 시대는 더 이상 계속되지 않아야지요.”

어머니의 간절한 기원이 허공의 메아리로 흩어져버리지 않는 새해가 되기를 기대한다.

박영선 참여연대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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