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시민사회, 86년 1차 민중혁명에서 현재까지
필리핀의 시민사회 영역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탄탄하다고 할 수 있다. 필리핀 시민사회의 성장은 다양한 정치화된 부문들이 수십 년 동안 정치, 사회 운동을 계속해온 데 힘입은 것이다.
필리핀은 1946년 미국으로부터 독립한 뒤 형식적으로는 민주주의 정치 체제를 이뤘지만 사회 경제적 불평등은 고스란히 남았다. 독립 이후에도 자원 이용이나 군사 기지에 대한 권리는 미국이 가지고 있어서 외국에 의존하는 경제 성장이 이루어졌다. 기득권층의 부에 대한 독점도 심화되었다. 이러한 불평등 구조에 처한 도시빈민, 농민, 고산지역에 사는 원주민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대중운동이 전개되었다.
가톨릭과 만나면서 본격화된 필리핀 사회운동
필리핀의 대중운동은 19세기 후반부터 불완전하게나마 시작되었는데, 이 때에는 정치운동이나 노동운동이라기보다 신흥 엘리트들이 자선을 베풀고 문화적 소양을 넓히려는 정도의 활동이었다. 이러한 활동은 20세기에 들어서도 활발했다. 그러나 예수회를 중심으로 한 가톨릭 교파가 대중과 접촉하면서 사회운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1960년 이후 본격적인 사회운동이 시작된다. 60~70년대 들어 사회주의 조직들과 학생운동 세력을 중심으로 라틴아메리카에서 시도되었던 해방신학, 의식화론, 주민조직화론 등을 받아들였다. 이 때부터 대중운동은 소외된 계층을 위한 자선 활동의 수준을 뛰어넘어 정치변혁 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특히 소울 알린스키의 주민조직화 이론은 정치적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동원 대상으로 민중을 보는 것이 아니라, 민중을 조직화하여 그들 스스로 환경을 극복케 한다는 지역사회조직화(Community Organizing) 이론의 토대가 되었다. 지역사회조직화론은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농어촌이나 산간 지역을 개발하는 방식으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나 필리핀에서는 소외된 사람들의 권리를 찾는 정치운동의 성격을 띠었다. 지역사회조직화를 지역사회개발(co-mmunity development)과 구분하는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이다. 지역사회조직화는, 지역주민들이 억압적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 대중의 능력과 자원을 동원하고 향상시킴으로써 집합·참여·변혁·해방·지속·체계적 주민조직을 만드는 과정으로 정의되었다. 개인주의적이고 냉담할 수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참여적이며 적극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 발전의 한 방법론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러한 방법론 이외에 사회주의 운동이나 학생운동도 영향력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72년 마르코스의 계엄령 선포로 많은 사회운동이 탄압을 받았으며 다수의 활동가들이 투옥되기에 이른다. 종교 운동이나 정치성을 숨긴 지역운동을 통해 명맥을 유지하던 필리핀의 사회운동은 마르코스의 장기집권에 대한 저항을 위해 단결하게 된다.
86년 1차 민중혁명(People Power)으로 독재체제가 무너진 뒤 개정된 헌법에는 ‘국가는 복지를 향상하기 위해 비정부기구, 지역공동체를 지향하는 조직, 또는 지역 조직들을 참여시킬 의무가 있다’(2조 33항)고 명시되었다. 91년에는 지방정부법령에 지방 행정에 NGO의 참여 의무를 포함시켰다. 마르코스 독재 이후의 정치 상황을 ‘정치의 사유화’로 볼 때, 필리핀 NGO들은 정부가 해야 할 일을 대행하거나 보완하는 기능을 해 왔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내부의 제도 변화와 아울러 외국 재단이나 국제기구의 후원금이 큰 규모로 들어왔다. 제도와 재정 면에서 지원이 커지자 필리핀 NGO들은 정책 결정과 개발 과정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86년에서 95년까지 10년 사이에 필리핀의 NGO는 2만7,100개에서 7만200개로 2.6배나 증가하여 어떤 개발도상국보다 시민사회 영역이 확대되었다.
10년 사이에 7만200개로 늘어난 NGO
마르코스 독재 타도를 이유로 결집했던 사회 운동 세력은 이후 다시 분화되기 시작했다. 단체의 성격, 기원, 관점, 이데올로기 등에 따라 단체들의 활동이 분열 양상을 보이고 있다. 라모스나 코라손 대통령 집권기에 빈민 섹터의 연합을 이루거나 토지개혁 정책을 발의하고 법안을 만들었던 성공적인 사례들도 있었지만 법안은 제대로 실행되지 않은 채, 공조했던 단체들도 현저히 감소했다. 해외 재원을 기초로 형성되었거나 국제사회의 지원을 계속 받을 수 있는 주류단체와 주변단체 간에는 활동 대상이나 성격에 큰 차이가 있어 협력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또한 NGO의 정부 부문 참여에 대한 태도의 차이, 사회구성체 분석이나 대안에 있어서의 이데올로기 차이가 시민사회 영역을 분산시키는 다른 요인이 되고 있다. 더욱이 사회주의 세력인 공산당이나 무슬림 해방운동세력이 신인민군(NPA)이나 모로민족해방전선 등의 무장세력과 결탁되어 있어 좌파의 협력을 어렵게 하고 있다. 중도적 입장을 가지는 시민사회 영역을 묶는 시민사회발전연대(CODE-NGO)와 같은 조직도 있지만 외형에 비해 실질적인 힘을 행사하는 데 많은 한계를 보이고 있다.
전통적으로 필리핀 사회운동사에서는 풀뿌리 대중운동이 강했지만, 최근 시민사회의 성장은 주민조직(PO, People’s Organization)보다 NGO에 편중되어 있다. 풀뿌리 대중조직을 키워 주민들의 자생적이고 지속 가능한 개발을 돕는다는 전망을 공유하지만, NGO만 급증해 현재 PO 숫자의 세 배에 이른다.
필리핀 시민단체들은 일찍부터 초국가적 연대를 통해 자국의 환경이나 빈곤 문제에 대한 폭넓은 국제네트워크를 형성해왔다. 이러한 네트워크의 힘이 필리핀 시민사회의 힘을 강하게 했으며 해외로부터 재정이나 실무적 지원을 많이 받아 왔다. 그러나 반대로 이같은 대외 의존이 단체들의 자립성을 많이 떨어뜨렸으며 해외 자금이 다른 동남아 국가로 분산되는 것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지금 필리핀 시민사회단체들은 아로요 정부에 저항하는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부패한 에스트라다 대통령을 민중혁명을 통해 끌어내린 뒤 추대한 아로요의 하야를 요구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하야 요구는 아로요의 부정행위에 기인하지만, 이와 상관없이 아로요 정부는 자본주의와 세계화에 대항해 민중들을 대변할 수 없는 지도자로 인식되었다. 아로요는 해외 자본 유치에 적극적이었으며 간접세와 담배, 술 따위에 물리는 죄악세(Sin-Tax) 등의 대중 과세를 통해 정부 예산을 늘리려 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필리핀 시민단체들은 세계화가 악화시킨 환경·여성·빈곤 문제에 대응하는 한편 지금의 상황이 부패한 정치체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대통령 선거제도의 개혁과 내각제로의 전환을 논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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