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5년 09월 2005-09-01   607

부정 선거 폭로하는 도청 테이프, 위기에 놓인 필리핀 민주주의

지난해 실시된 필리핀 대통령 선거에서 아로요 대통령의 주도로 부정이 이뤄진 사실을 폭로하는 도청 녹음 테이프가 최근 필리핀 정국을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2004년 5월 10일 실시된 필리핀의 대통령 선거는 현직 아로요 대통령의 집권 3년을 평가하고 향후 6년의 차기 대권을 결정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선거였다. 아로요 대통령은 2001년 1월 에스트라다 당시 대통령이 권력 남용과 부패 혐의로 국회의 탄핵 압력과 ‘제2차 민중의 힘’ 시위에 밀려 권좌에서 물러나자 부통령으로서 권력을 승계하였다. 그녀는 같은 해 5월 발생한 수도 마닐라의 빈민폭동을 효과적으로 진압하고 연이어 실시된 중간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어 자신의 정치 기반을 굳힐 수 있었다.

아로요 대통령 탄핵안 제출

2004년 선거는 차기 정·부통령을 비롯하여 하원의원 전원과 상원의원 절반,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원 전원을 함께 선출하는 전국동시선거로 실시되었다. 대통령 후보로는 현직 아로요 대통령을 포함하여 영화배우 출신으로 전임 에스트라다 대통령의 절친한 친구인 포, 교육부 장관과 상원의원을 지낸 로꼬, 상원의원 락손, 복음주의자이자 ‘에디 형제(Brother Eddie)’로 잘 알려진 빌라누에바의 5명이 경합하였다. 그러나 1998년 대통령선거의 쟁점인 ‘대중 대 엘리트’의 대결구도가 되살아나 아로요 대 포의 경쟁으로 곧 압축되었다.

사실 1998년 에스트라다 대통령의 승리는 엘리트 정치에 실망을 느끼고 빈곤으로부터의 탈출을 염원하던 다수 대중이 서민 출신인 에스트라다를 지지한 결과였다. 이에 따라 2001년 에스트라다 대통령의 하야는 비록 그 자신의 부패 혐의에도 불구하고 일반 대중에 대한 정치엘리트와 기득권층의 반격으로 비춰지기도 하였다. 2004년 선거과정에서 전형적인 엘리트 계층을 대표했던 아로요와 전임 에스트라다 대통령과 동일한 이미지로 대중들에게 호소하였던 포 의 대결은 민중과 엘리트, 빈곤층과 부유층 사이의 사회경제적 경계선을 사이에 둔 접전이었다.

여론조사에서 두 후보는 박빙의 접전을 벌였지만 선거 결과는 아로요의 승리로 나타났다. 필리핀 선거관리위원회의 최종 발표에 따르면 아로요가 39.99%의 득표율로 36.51%의 득표율을 기록한 포를 누르고 차기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던 것이다. 포 후보 측은 즉각 선거 이전의 여론조사 결과를 근거로 정부 여당과 아로요 후보 진영에 의한 개표 부정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전국적인 부정선거 불복운동과 동시에 재선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산발적으로 지속된 불복운동에도 불구하고 부정선거에 대한 뚜렷한 물적 증거가 제시되지 못한 채 포 후보가 지난해 12월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함에 따라 사태가 종결되는 듯 하였다.

그러나 올 6월 아로요 대통령과 선거관리위원장의 음성으로 확인된 도청 녹음테이프가 언론에 전격 공개되면서 2004년 대선의 부정선거 논란은 다시 한번 필리핀 정국을 들끓게 만들고 있다. 공개된 테이프 내용은 아로요 대통령이 선거관리위원장에게 선거관리위원회의 선거 개입과 부정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는 포 후보 쪽이 제기했던 개표부정 가능성을 입증하는 자료였다. 아로요 대통령 측은 ‘테이프가 조작되었다’고 부인하였으나, 야당과 시민단체들은 부정선거에 대한 책임을 물어 아로요 대통령의 즉각적인 하야를 요구하는 전국적인 시위를 폈다. 여론의 압박에 밀린 아로요 대통령은 결국 녹음된 내용이 사실이며, 일부 내용이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해명하였다. 그러나 의회는 야당을 중심으로 7월 25일 아로요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을 내기에 이르렀다.

부정선거 논란으로 시험대에 오른 필리핀 민주주의

이 사건은 필리핀의 민주주의 공고화 과정에서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어온 ‘추장정치(cacique politics)’와 ‘엘리트 민주주의(elite democracy)’의 전형적 폐단을 보여준 사례로 볼 수 있다. 필리핀은 1986년 민주화 이후에도 일반 대중의 정치참여가 부재한 가운데 경제적 기득권을 가진 일부 엘리트들이 정치를 주도하여 왔다. 그러다 보니 권력과 금권에 유착된 폐단이 끊임없이 이어져왔으며, 민주화 이후에도 제도적 개선이 이뤄지지 못한 채 정치적 혼란이 지속되어 왔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이번 사태에도 불구하고 선거부정을 독려한 것으로 밝혀진 아로요 대통령의 사임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다는 점이다. 필리핀 사회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지닌 가톨릭 주교단이 아로요의 사퇴를 요구하지 않기로 이미 결정했고, 군과 경찰도 아로요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였기 때문이다. 의회의 탄핵 또한 하원의 3분의 1 이상 동의와 상원의 3분의 2 이상 찬성을 얻어야 하는데, 여당이 상·하원의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어 탄핵이 어려운 실정이다. 1986년 민주화와 2001년 에스트라다 대통령의 하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민중의 힘’도 이번에는 그 결집력이 미약한 형편이다. 자유로운 정치 참여와 공정한 선거를 근간으로 한 현대 민주정치에 필리핀이 일탈 사례를 보태지 않도록 국제사회의 관심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동윤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 실행위원, 서강대 동아연구소상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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