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5년 09월 2005-09-01   445

배추 150포기의 목욕

말복 무렵 호박을 걷어 내고 김장배추를 갈았다. 캐낸 호박 뿌리를 보니 기분이 시원섭섭했다. 시골로 이사온 이듬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호박을 심었는데 거름이 부족했던지, 물이 부족했던지 얼마 못 가 죽어버렸다. 호박에는 인분만큼 좋은 것이 없다는 말을 듣고 그 뒤로 호박을 심지 않았다.

그런데도 지난해 호박은 풍족했다. 우리 집 옆 밭의 주인 할아버지가 호박 서너 개를 우리 집 계단에 말 없이 놓아두시고 가곤 했다. 땡볕에서 일 하실 때 음료수나 과일을 챙겨다 드린 게 고마우셨나보다. 못 먹고 버리면 안 될 것 같아 부지런히 호박 반찬을 해먹었다. 그런데 다 먹어치워 홀가분한 기분이 들 때쯤이면 계단에는 어김없이 호박 몇 개가 얌전히 누워있는 것이었다. 할아버지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그 때는 호박이 정표가 아니라 고문도구로 보였다.

식구가 적은 우리 집은 손바닥만한 텃밭에서 거둔 푸성귀도 남아돌 때가 많다. 이웃들은 대개 텃밭을 갖고 있다. 더운 날씨에 도시의 친척들에게 부치기도 마땅치 않다. 농산물은 짧은 기간 수확이 집중되는 특성이 있다. 이래서 귀농한 이들이 농산물 가공의 필요성을 부르짖는구나 싶다.

일전에는 고춧잎을 꽤 땄는데 마침 옆 밭의 주인 할머니도 고춧잎이 가득한 비닐봉지를 들고 오셨다. 사양을 잘 못하는 무른 성격이지만 냉장고에 쌓여있는 고춧잎이 떠올라 선뜻 손을 내밀지 못했다. 망설이는 기색을 눈치 챈 할머니는 웃음을 띠며 “못 먹고 버릴 것 같으면 그냥 가져가고.” 하시는 게 아닌가. 기다렸다는 듯 용기를 내어 “네.” 하고 대답하고 말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고춧잎 봉지를 들고 돌아서는 할머니의 무안한 표정을 보고 후회했다. ‘못 먹고 버리더라도 그냥 받을 걸.’

올해도 역시 호박을 심지 않았는데 어디선지 씨가 떨어져 호박 넝쿨이 거침없는 기세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노란 꽃송이가 탐스럽게 피어나는가 싶더니 이내 꽃 밑에 동그란 혹이 불거져 나왔다. 요술이라도 부린 듯 자고 나면 눈에 띄게 커져 있는 덩이들. 텃밭 없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인심이라도 쓰듯 한 덩이씩 따다 주곤 했다.

심지 않아도 그 넉넉함으로 나를 익사시킬 정도였던 호박이 사라진 자리에 요즘 연둣빛 배추가 하루가 다르게 커가고 있다. 지난해 배추를 심을 때에는 남들 다 한다는 약을 치지 않았다. 거름기까지 부족해 초반부터 진딧물의 공격이 엄청났다. 날마다 들여다보고, 벌레 잡아주고, 목초액 뿌려주며 보살펴 주는데도 배추는 누렇게 뜨고 이파리는 진딧물로 까맣게 뒤덮였다. 빈사 상태의 배추들을 볼 때마다 걱정에, 스트레스에, 우울감조차 느껴졌다.

손수 기른 무공해 배추로 김장하자고 형제들에게 큰소리까지 탕탕 쳐놓았는데 더 머뭇거리다가 배추 농사 망칠까 덜컥 겁이 나 약을 사오고 말았다. 배추의 생육상황을 듣고 서울에서 달려 내려온 친정 어머니와 약물을 뿌려가며 배춧잎에 달라붙은 진딧물을 칫솔로 씻어냈다. 비지땀을 흘리며 150포기가 넘는 배추를 한 장 한 장 목욕시키고 나자 엄마는 내년에는 남들처럼 하자고 말씀하셨다. 올해 약을 뿌리면서 신념을 너무 쉽게 포기한 것 같아 아쉽고 속상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좋고 의미 있는 일이라도 속도 조절은 필요하다. 숨 좀 돌려서 유기농 배추 재배 다시 시도해볼 것이다.

고진하 (참여사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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