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5년 11월 2005-11-01   707

죽지 않고 다치지 않고 일하고 싶다

한국의 노동자 건강 실태

노동자 건강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불거진 것은 문송면 군의 죽음이 알려지면서부터이다. 1988년 여름, 15세의 어린 나이로 수은에 중독 되어 생을 달리해야 했던 그가 우리에게 던진 충격은 엄청났다. 공장에서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며 삶을 꾸려가야 했던 삶의 조건에서부터 입사한지 단지 2개월 만에 사망에 이를 정도로 수은에 과다 노출될 수밖에 없었던 열악한 노동환경까지, 그것은 올림픽 열기에 들떠있던 대한민국의 또 다른 단면이었다.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오늘, 우리 노동자들의 건강은 나아졌을까? 물론 17년 전에 비하여 노동조건과 노동환경이 일부 개선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는 남아있으며 더불어 새로운 문제까지 더해지고 있다. 노동부가 발표한 공식통계만 보더라도 2004년 한 해 동안 2,825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하루에 8명꼴이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더 많은 노동자의 죽음을 고려하면 심각성은 더욱 커진다. 부끄럽게도 2004년 ILO에서 발표한 ‘노동안전지수(Work Security Index)’에 의하면 한국은 평가대상 97개국 중 47위로서 OECD 가입국 중 최하위일 뿐 아니라, 카자흐스탄, 우크라이나 등 중앙아시아의 신흥공업국보다 못한 수준이다.

2004년, 2,825명의 노동자가 죽어가다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나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영세사업장의 노동조건과 노동환경은 상상을 초월한다. 날로 늘어나는 비정규직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들 또한 건강을 저당 잡힌 채 열악한 조건에서 노동하고 있다. 이들의 노동 및 건강 실태는 많은 부분이 베일 속에 가려져 있지만, 산발적으로 발표되는 것만으로도 심각성을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아직도 많은 수의 노동자들이 12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 최저생계비에도 미치지 않는 임금, 작업환경 측정 자체가 무의미한 노동환경 속에서, 예방 가능한 사고와 화학물질 및 중금속 중독으로 자신의 건강을 희생당하고 있는 현실이다.

제조업에서 서비스업 중심으로 산업 구조가 개편되고 적시생산 체계 등 유연화 된 생산방식이 도입되면서 노동유연성을 늘리기 위해 비정규직이 광범위하게 늘고 있다. 이렇듯 최근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경제·고용 구조는 이전과는 다른 형태의 건강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이전에는 큰 관심을 받지 못하던 스트레스성 질환, 근골격계 질환 등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이에 대한 해결책도 절실해지고 있다. 또 유연화 된 생산방식은 한 명의 노동자가 여러 기능을 수행하도록 요구해 노동자들을 ‘쥐어짜는’ 형태로 바뀌어가고 있다. 적은 수의 인원이 더 많은 일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노동강도 강화와 노동시간 연장에 따른 건강 영향을 고스란히 노동자가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건강 문제 역시 심각한 수준이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위해한 조건에서 노동을 한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여러 가지 압력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직업을 얻기 위한 계약 경쟁의 압박에서 시작해 직업을 얻은 후에는 계약을 지속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며 최저생계비를 벌어야 한다는 이중 삼중의 압박을 받고 있다. 대부분 성과급으로 보수를 받는 비정규직의 고용구조 역시 스트레스를 증가시키는 요인이다. 성과급 구조는 노동 강도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기 때문이다. 심지어 비정규직 노동자가 성과급으로 보수를 받는 것이 아닐지라도, 고용주의 전반적 경제 상태가 위험스러울 때에 그는 과도한 노동을 하도록 강요당할 수 있다. 영세사업장 노동자, 하청노동자, 임시노동자 등은 큰 사업장이나 정규직 노동자가 거부한 일을 하도록 강제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상황이 비정규직 노동자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은 명확하다. 이들은 ‘현대판 노예’처럼 자신의 건강을 저당 잡힌 대가로 근근히 ‘일용할 양식’을 얻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의 무대책과 근시안적인 정책은 현실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기는커녕, 사업주의 눈치만 살피며 미봉책 마련과 현실 가리기에 주력하고 있는 것이다. 산재보험 제도개혁에 대해서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고, 전시성 행정에만 급급한 채 노동자들의 요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게다가 규제개혁위원회를 통해 그나마 있던 보호 장치를 해제하며 규제를 완화하고 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건강과 안전에 대한 규제는 규제 완화의 물결 속에서도 끝까지 보호하고 강화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모든 직업성 질환과 사고는 예방가능하다?

해결방안은 멀리 있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 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사업장에 고용된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을 돌아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실제로 유럽연합에서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평가하는 항목에 고용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을 얼마나 잘 보장하는가를 살필 수 있는 지표를 넣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한편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않은 기업에 막대한 벌칙을 주는 제도도 강구되어야 한다. 실제로 호주, 캐나다 등에서는 사업주가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 않아 노동자가 사고로 사망하였을 경우, 사업주에게 징역형을 처하고, 징벌적 배상에 해당하는 막대한 액수의 벌금을 내도록 하는 법안이 통과된 바 있다.

노동자의 참여도 매우 중요하다. 노동자들은 작업장의 안전과 건강을 지키기 위한 방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안전보건 선진국의 경우 예외 없이 작업장에 노동자들이 선출한 노동자 안전보건대표위원을 둔다. 이들은 사업주가 보장한 시간에 필요한 교육을 받고, 사업장을 순회하며 안전과 건강을 위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할 권리를 보장받고 있다. 그리고 노사 동수로 이루어진 직업안전보건위원회를 운영하여 안전과 보건에 대한 결정에 노동자를 참여시키고 있다. 우리나라도 이러한 제도를 적극적으로 도입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노동부의 보다 적극적인 개입이 절실하다. 현재와 같은 전시 행정 위주의 지도·감독으로는 현실을 바꾸어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않는 기업에 대한 감시, 감독, 제제의 의무를 다해야 할 것이다.

“모든 직업성 질환과 사고는 예방가능하다”는 말이 있다. 다소 선언적인 표현이라 하더라도, 대부분의 직업성 질환과 사고가 예방가능하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피할 수 있는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방치하거나 동조함으로써 사람을 병들게 하거나 죽게 만든다면, 그 또한 윤리적으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더 이상 억울하고 서러운 죽음이 발생하지 않도록 사회가 나서야 할 때다.

이상윤 노동건강연대 정책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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